◆…이 기사는 최근 위의환씨가 본지에 기고한 내용으로, 그동안 미진했던 장흥동학사를 보완할 수 있는 내용일뿐 아니라, 특히 여성동학지도자 이소사와 최연소 소년 동학교도 최동린에 대한 기록이어서 그 의미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의환씨의 기고문을 전재한다-편집자 주.

■글을 시작하며

지난 1월 중순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장흥동학농민혁명 자료수집 출장을 가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중 이소사와 최동자崔童子(일명 崔東麟, 崔童, 崔神童)에 관한 기사와 최초로 발견된 최동자, 문공진, 이득춘, 이인환 등의 처형에 관한자료도 확인했다.

←당시 동학혁명때 효수된 농민군

이소사의 기록으로, 2006년 본 필자가 편찬한 <장흥동학농민혁명사료집> 302쪽, 304쪽, 310쪽, 312쪽, 319쪽에 출전한 바 있다. 또 이소사와 최동자의 기록은 369~372쪽에서 일본신문 기사를 통해 소개했다.

이번에 소개하는 기록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주한일본공사관기록> 6권 53쪽에 출전하는 이소사와 최동자의 치료기록, 또 53쪽~54쪽의 장흥 ․ 강진 전투 이후 많은 匪徒(동학교도)를 죽이는 방침, 62쪽의 장흥토벌 이후의 성과 등이다. 이 기록들은 전봉준의 치료기록 다음에 출전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또 이 기록은 동학농민혁명을 총지휘한 일본군 후비보병 19대대장인 남소소랑南小四郞이 1895년 5월 13일(양력) 동학당 토벌을 완료한 후 아래의 주한일본공사관에 올린 보고서에 출전하고 있다.

■이소사 최동자의 치료 기록

또한 장흥 전투의 틈을 타서 현감(부사)을 죽인 것은 여자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 동학은 사실 미친 사람이었는데, 동학도들이 옹립해서 天使로 만들어 이용한 것이다. 또 崔童子라고 하는 자가 있었다. 역시 동학도들이 그를 우러러 받들어 神으로 모신 것이다. 이 자의 연령은 16,7세인데 노새를 타고 匪徒를 지휘하다가, 때마침 장흥에서 軍에 의해 다리에 총을 맞고 일어설 수 없으므로 이도 역시 병원에 집어넣었다. 또 그 미친 여자는 좌측지대에 소속되어 순회하던 소모관 伯樂中이란 자가 붙잡아 민병으로 하여금 엄하게 糾問(규문)하게 하였다. 그전부터 조선국에서의 처벌이 매우 엄중하다고는 들었지만, 이 여자를 고문하는 것을 보고 정말로 놀랬다. 양쪽 허벅지의 살을 모두 잘라내어, 그 한 쪽은 살을 아주 잘라내서 뼈만 남고, 또 다른 한 쪽은 피부와 살이 금방 떨어져 나갈 것처럼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여자가 압송되어 나주성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거의 죽은 송장 같았다. 이 伯樂中은 운봉에서 나와 식량, 병사 도로 등에 관해 우리 군대의 조달을 맡은 자로서 여러 곳을 수행해 왔지만 그의 거동이 분명치 않아 그 점을 본인에게 규명․조사해 보았더니, 순무영(巡撫營)으로부터 하부받은 완전한 사령장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대로 수행토록 해 두었다. 미친 여자는 崔童子와 같은 날 [장흥에서 나주에] 도착했다. 상처 부위가 썩어 문드러져서 악취가 코를 찌르고 대소변은 앉은 채 나오는 대로 내벼려 두었으며 입은 것이라고는 흰 옷 한 벌 뿐으로, 그 참담한 꼴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의식중에 무참한 感을 느끼게 하였다.

문명한 모든 나라에서는 부녀자에 대해서는 비록 죄수라 해도 대우면에 있어서 얼마간은 관대하므로, 나주에 도착한 뒤 그 여자를 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하였다. 여러 가지 신문 끝에 그 여자가 정신착란자라는 것을 확인했다. 또 崔童子는 의사의 주장으로 그 다리를 자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치유될 가망이 없다고 하기에 발목을 잘랐는데, 정신이 착란되어 감각이 둔해졌던 탓인지 뜻 밖에도 그 큰 상처가 완치되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부상자를 치료해 주었다고 해서 우리 군의 의도를 오해하는 자가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전주감사 같은 사람은 서찰을 보내 청해 말하기를 “귀군의 동학도에 대한 대우를 보니, 전봉준을 죽이지 않으려는 것 같이 보인다. 그와 같은 대죄인을 죽이지 않는다면 천하의 큰 우환이 될 것이다. 원컨대 신속히 그를 경성으로 압송하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小官은 이에 답하여 말하기를 “봉준의 압송에 관한 것은 이미 우리 공사로부터 명령이 있었다. 또 귀국 정부의 의뢰도 있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이에 대해 다른 사람의 용탁(容啄: 쪼아대는 것)을 받지 않는다. 그렇지만 지금 그의 부상이 크고 몸도 몹시 쇠약해 있는데, 즉시 그를 압송한다면 도중에 죽을 염려가 없지 않다. 그러므로 잠시 동안 치료를 해주고 있을 뿐, 그의 생살여부 같은 것은 원래가 小官으로서 알 바 아닌 일이다.”라고 하였다.

■장흥․강진 전투이후 많은 匪徒를 죽이는 방침


장흥․강진 부근 전투 이후로는 많은 비도를 죽이는 방침을 취하였다. 필경 이는 小官 한 사람만의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훗날에 재기할 가능성을 제거하지 위해 다소 살벌하다는 느낌을 살지라도, 그렇게 하라는 公使와 사령관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전봉준이 동학도 안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을 때는 그래도 동학도 중에 다소의 良民과 義士를 찾아 볼 수 있었으나, 봉준이가 일단 그 속에서 떠나자 이들 양민과 의사들은 모두 흩어져 떠나갔다. 그렇기 때문에 남은 무리들은 한결같이 모두 잔학하고 영악한 무뢰한으로만 되었다. 그래서 또한 많이 죽이는 방책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흥 근처에서는 인민을 협박하여 모두 동학도에 가담시켰기 때문에 그 수가 실로 수백명에 달하였다. 그래서 진짜 동학당이 잡히는 대로 이를 죽여 버렸다.

■장흥토벌 이후 민병들이 동학도를 잡은 성과

훈령을 받은 대로 적도를 전라도 서남부로 몰아 쫓았는데, 그들은 장흥 부근 전투후 흩어져서 그 소재를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지방인민을 권장하여 그들 소재 수색에 힘쓰도록 했다. 그러나 지방인민(민병이라 부른 사람들)은 군대의 위세를 빌지 않고는 수색 포박할 수 없었으므로 할 수 없이 군대를 서남 각지에 분둔(分屯)시켜서 비도를 뒤쫓아 잡게 했다. 이렇게 하여 민병이 잡은 적도를 지방관으로 하여금 처형케 한 인원은 다음과 같다.(이 기록이 일본군과 京軍이 직접 사살한 기록이 제외된 민병에 의해 붙잡은 동학도를 지방관이 처형한 기록이다. 당시 장흥은 부사가 부재중이어서 벽사찰방이 이를 행했다.) 해남부근 250명, 강진부근 320명, 장흥부근 300명, 나주부근 230명, 기타 함평현, 무안현, 영암현, 광주부, 능주부, 담양현, 순창현, 운봉현, 장성현, 영광, 무장 각지에서도 모두 30 내지 50명 정도씩 잔적을 처형하였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하면 이제 다시 [동학도는] 일어날 걱정은 없을 것 같다.

■ 최신동, 문진공, 이득춘, 이인환의 처형기록

규장각 문서번호 17247의 첩보존안(捷報存案) 3월 3일자에 호남초토사(나주목사 민종렬)이 내각으로 보낸 첩보에 “비류의 우두머리로서 기강을 범한 죄대악극한 자로는 장흥의 최신동(崔神童), 문공진(文公眞), 이득춘(李得春), 이인환(李仁煥), 광주의 백정놈 치성(致成), 함평의 장공상(張公三), 김달해(金達每), 능주의 한원문(韓遠文) 등 8명인데, 군민대회를 열어 포살하여 군중을 경계하였던 바, 성명과 죄목은 성책하여 위로 바칠 것이라는 첩보”가 있다.

최신동은 최동린, 최동, 최동자 등으로 불리는 동학농민혁명의 소년장수로 천도교 장흥교구의 <갑오동학농민혈사>에서는 “13세의 소아로 衆을 지휘하여 본군 남문밖 석대전에서 수많은 衆을 지휘하다가 전사하다.”로 기록되었고, <동학난기록> 하권에는 “1894년 12월 일본군에 체포되어 나주 일본군 진영으로 압송되어 12월 28일 처형되었다.”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의 토벌을 총지휘한 일본군 후비보병 19대대장 南小四郞이 분명히 崔童子는 이소사와 같은 날 나주로 압송되었다고 했으니, 이 날은 <우선봉일기>에 의하면 1895년 1월 1일이다. 이소사가 소모관 백낙중 부대에 붙잡힌 날짜는 12월 27일 이전으로 추정되므로 아마 같은 날 붙잡힌 것으로 추정된다.

문공진은 <우선봉일기> 12월 18일조에 “보성 경계인 웅치면에서 붙잡힌 농민군으로 장흥부사가 변을 당할 때 포를 쏜 거괴로 기록되어 있다.” 이인환은 <우선봉일기> 1895년 1월 14일조에 “장흥부의 기형군관 김범기가 면정을 이끌고 체포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곧바로 우선봉장 이두황은 나주로 압송하라고 명령한 기록이 있다. 이득춘에 관한 기록은 규장각문서인 <捷報存案>에서 최초로 발견된 인물이다. 장흥의 동학지도자 김학삼, 이사경 등도 벽사역에서 처형되었는데, 나주로 압송된 이득춘도 또한 장흥 동학지도자의 거물임이 틀림없기에 앞으로 이에 대한 추적이 필요하다. 그 동안 이인환의 처형날짜를 천도교 장흥교구의 <갑오동학농민혈사>에 의해서 1895년 3월 27일로 알고 있었는데, 호남초토사인 나주목사가 내각으로 보낸 <捷報存案>의 기록을 토대로 1895년 3월 3일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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