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수/전남대학교 국어교육과)
호계리의 역사와 문화



Ⅰ. 서언

Ⅱ. 마을 개관과 조사 상황

Ⅲ. 別神祭의 실제

Ⅳ. 儀禮와 典籍 검토

Ⅴ. 결론

Ⅰ. 서 언

별신제는 경상도 및 강원도 일원에서 많이 쓰이는 말로, 매년 모시는 골맥이제와는 달리 몇 년에 한번씩 마을단위로 모시는 제사를 지칭한다. 광주와 전남 일대에서 별신제라는 말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또한 몇 년에 한번씩 모시는 형태의 마을제사도 없다. 그런데 유독 장흥지역에서만 특이하게도 별신제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본고에서 대상으로 하고 있는 장흥군 부산면 호계리 외에도 용산면 운주리와 관산면 방촌리 등에 그 유례가 보인다. 이들은 매년 모시는 전형적인 마을제사이면서도 그 명칭과 양식을 약간 달리한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이들 별신제들이 보이는 양식의 공통성은 정형화된 官祭形式을 빌어왔다는 것이다. 이들 중에서도 호계리 별신제는 제례형식 거의 전부가 사직제나 석전제의 그것과 일치하고 있다. 조선조 후기에 여러 관제들이 민간화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1) 이 마을의 별신제는 숙종 41년(1702)에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후 만들어진 󰡔大洞刱契󰡕 및 󰡔大洞契案󰡕과 역사를 거의 같이한다는 점에서 조선조 후기의 문화사적 변화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이들 책과 축문, 홀기 등을 저술한 만수재 이민기(1646-1704)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유학자로서 이 지역에 계속 머무르면서 학문을 연찬했던 사람이다. 또한 마을 뒤쪽 개울을 건너면 소나무 숲 언덕에 동백정이라는 정자가 있어서 전형적인 반촌이었음을 짐작케 해주는 곳이기도 하다.

한편 장흥은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동학혁명 최후의 격전지로서 치열한 전투가 치러진 고장이다. 최근 재조명되기 시작한 동학운동은 과거의 ‘동학란’에서 이제 ‘동학혁명’으로 그 명칭이 바뀐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일제에 의해서도 그렇고 소위 지배자 논리에 의해서 오랫동안 정당한 평가를 받아오지 못해 왔다. 동학운동이 이 지역에서 치열하게 일어났으며, 또한 격전지로 선택된 배경에는 동학의 주체세력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세력간의 첨예한 대립이 자리잡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누르는 힘이 강했기에 튀는 힘이 상대적으로 강해지는 스프링의 원리와 같은 사회구조를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장흥지역에는 소위 유교문화 또는 양반문화가 비중있게 자리하고 있었으며, 훌륭한 학자와 시인묵객의 배출도 많았다. 부산면 호계리의 별신제 역시 이러한 장흥지역의 두터운 유교문화와 결코 무관할 수 없는 역사적 문화자료로서 그에 대한 집중적 연구가 앞으로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몇 가지 연구과제만 예거하더라도, 첫째 별신제가 가지는 민간신앙으로서 의미, 기능, 가치에 대한 연구, 둘째 그것을 모시게 되면서 지금까지 한번도 거르지 않고 관련된 기록들을 남기도 있다는 측면에서 역사 고증적 측면의 연구, 셋째 별신제와 사회구조간의 관련성 연구, 넷째 동학혁명과 유교문화의 대립적 상관성에 대한 연구, 그리고 계승발전 및 축제화나 관광자원화라는 측면에서의 연구 등 다양한 주제를 안고 있는 대상인 셈이다. 또한 이러한 연구는 이 마을의 문화와 예술, 그리고 사회와 역사를 밝히는 데 그치지 않고, 광주․전남의 다른 마을들이 민간신앙에 관련된 문헌자료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보면 이 마을에서 얻어진 어떤 결과들은 다른 마을에도 적용이 가능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앞으로 확대된 연구도 기대된다.

본고는 이들 과제를 모두 총괄할 수는 없어 우선 충실한 조사보고서의 형식으로 꾸며지며, 특히 가장 두드러진 의례와 문적에 대한 설명을 부기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앞으로 호계리 별신제에 대한 연구가 앞에서 예거한 바와 같은 문제들과 관련해서 심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구하는 정도의 선에서 본고의 목적을 찾는다.

Ⅱ. 마을 개관과 조사 상황


호계리는 장흥읍에서 보성읍으로 가는 국도 2호선 길목에 위치해 있으며,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마을 북쪽으로는 虎溪라 부르는 내가 흐르고 있고, 동남쪽으로는 산이 둘러싸고 있지만, 서쪽으로는 부산평야와 연결되는 비교적 넓은 농경지가 발달되어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고려 중엽 趙氏에 의해서 성촌이 되어 長田里 蛇洞으로 불리다가 천재지변으로 인해서 폐촌이 된 뒤 조선 태종조에 청주김씨들이 입촌을 하여 다시 마을이 조성되었으며, 그 후 광산김씨 重器라는 분이 장동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여 두 성씨가 살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장동면 만년리 장항마을에 속하지만, 본래는 호계리에 속했던 곳으로서 호계 건너편 나즈막한 언덕 소나무숲 속에 동백정이 자리잡고 있다. 이 정자는 호계리의 역사와 세를 보여주기에 족한 사적 증거물로서 조선조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을 지낸 金麟(1392-1475)이 관직에서 은퇴하고 여기에 터를 잡아 假精舍를 짓고 기거한 데서 유래했다. 그 뒤 1584년 공의 후손인 김성장이 선조를 기려 이곳에 정자를 짓고 뜰앞 나무의 이름을 따서 동백정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1865년 새로 지은 것이며, 1985년 개보수를 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2)

본래 이 마을은 용계면에 속해 있었는데, 용계면이 부산면과 장동면으로 분면되면서 부산면에 속하게 되었다. 보성과 장흥에 걸쳐 있는 제암산 줄기에서 뻗어나와 이 마을의 동쪽에 이른 산이 호랑이 형국이라 한다. 여기서 연유하여 마을 윗편으로 흐르는 내를 호계라 하였으며, 마을 이름도 호계리가 되었다. 호계를 건너면 獐項(일명 노루목)이라고 하는 마을이 있으며, 이는 범의 먹이가 되는 노루의 형국이라서 얻어진 이름이다. 그리고 마을 서쪽으로 큰 바위가 있는데, 이곳을 가리켜 마을 사람들은 “범통시”라고 부른다. 범이 뛰어가다 대변을 보았는데 그것이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또 지금 동백정이 서있는 부근을 한새(황새)고개라고 부르며 한새형국이라 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큰 인물이 날 자리라 하여 혈을 잘랐는데 자른 자리에서 피가 흘렀더라 한다. 범의 형국 때문인지 마을이 드세었는데, 예전에는 이 마을을 지나 장흥 장에 가던 사람들이 함부로 지나다니지를 못할 정도였으며, 뭔가 상납을 하고 나서야 지날 수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많이 살 때는 120여 호에 이르렀다가 점점 줄어들어 지금은 62호가 살고 있다. 다른 농촌마을과 마찬가지로 현재 마을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은 많지 않으며, 그래서 농사 역시 기계의 의존도가 높은 벼농사 중심이다.

본 마을에 대한 현장 조사는 두 번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한번은 1991년 대보름 때인 2월 28일부터 29일까지, 그리고 두 번째는 2002년 역시 대보름 때인 2월 25일부터 26일 사이였다. 이 마을의 당산제는 1990년도 남도문화재 민속경연대회에 장흥군 대표로 출전하여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특히 살아있는 닭의 목을 자르는 절차가 있어 인상적이었다. 또한 순수한 유교식 제차로 진행되고 있어서 이런 점들을 보다 생동감 있게 확인하고자 하여 1991년 처음 현장조사를 하게 되었다.

1991년도 조사에서는,3) 우리 조사단 일행이 마을에 도착한 것은 오후 8시가 넘어서였다. 마을회관에 들어서자 마을어른들이 모여 계시다가 반갑게 맞아주었으며, 면담조사에 충실히 응해주었다. 면담조사를 하는 도중에 마을에 보관되어 있는 문적을 꺼내 보여주었다. 대동계, 별신제, 금고 등에 관련된 문적들로 숙종조 이래 현재까지 별신제와 대동계에 관한 일련의 사항들을 적어놓고 있는 것들이었다.

우리는 문적을 확인하고 또 촬영도 하면서 별신제 준비에서부터 모시는 과정까지를 우선 면담조사를 통해서 파악을 하였다. 그리고 밤 10시 30분부터는 호계변 제장으로 자리를 옮겨서 현장참여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제사가 다 끝나고 나서 새벽에 광주로 돌아왔다.

2002년도 조사에서는,4) 국립민속박물관의 직원들이 함께 참여하였다. 역시 마을회관에서 면담조사를 하게 되었는데, 1991년에는 호계에 연한 제방 밑에 협소한 마을회관이 있었으나 몇년 전 현대식 건물로 마을회관을 새로 지었다. 일행은 역시 마을회관에서 면담조사를 실시하였다. 10년이 지난 뒤였으나 변한 것은 거의 없이 별신제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두 번에 걸친 면담조사와 현장조사의 상황이 담긴 녹음을 채록하면서도 역시 크게 바뀌지 않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5)

Ⅲ. 別神祭의 實際와 口傳

1. 祭場의 구성과 祭神의 성격

호계리는 매년 대보름에 마을제사를 모셔 왔는데 두 곳에 제장이 있다. 한 곳은 별신제를 모시는 제장이고, 다른 한 곳은 당산제를 모시는 곳이다.

마을 북쪽을 따라 넓은 제방이 쌓였으며, 제방 너머 호계가 흐른다. 그 호계는 깊지 않는 내로 주변에 자갈밭이 넓다. 별신제는 그곳 자갈밭 위 일정한 자리를 잡아 모신다. 물론 자갈밭이라고는 하지만 특별히 일정한 자리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매년 총회를 하고 나서 장소를 물색한다. 그러나 가령 마을 아래쪽(서쪽)에 유고가 있으면 호계 위쪽으로 자리를 잡고, 반대로 마을 위쪽(동쪽)에 궂은 일이 있으면 아래쪽으로 옮긴다고 한다. 평소 상여가 나갈 때도 이곳 별신제를 모시는 곳을 피하기 위해 길이 멀더라도 마을 앞쪽 길을 택해 돌아나간다.

이곳 자갈밭에서 모시는 제사를 별신제라고 하는데, 마을사람들은 天祭라고도 부른다. 전해지는 문적들에서는 천제라는 말을 찾을 수 없지만, 마을사람들은 하느님에게 제사를 모시는 것으로 간주하며, 그래서 천제라는 말을 오히려 많이 쓰고 있다. 하늘에 제사를 하기 때문에 마을에서 가장 깨끗한 곳을 고르다 보니까 냇가에서 제사를 모시는 것이라 한다. 매년 여름철에 큰물이 지면 바닥 청소가 되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그곳을 가장 깨끗한 곳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물이 가지고 있는 정화력이 무의식적 지식으로 관용되고 있는 예로 보인다.

별신제에서 모시는 신은 모두 3位로서 天․地․人을 신격으로 하여 모신다고 한다. 메와 탕은 제상에 올리지 않지만, 떡이나 술은 모두 3의 숫자를 맞춰 올린다. 자갈밭 일정한 곳에 제터를 잡으면, 음력 정월 14일 오전에 생대나무를 세우고 주변에 금줄은 친다. 대나무는 28개를 세우며 제관들이 들어오도록 한 곳만 남기고 둥그런 형태로 대나무를 세워 빙둘러 금줄을 친다. 금줄은 왼새끼를 쓰며 한지를 잘라 사이사이에 끼운다. 대나무 28개는 하늘의 28宿을 뜻한다고 한다.

또 제장 주변에는 제관들이 머물면서 그날 사용할 축문을 베껴 쓰도록 하기 위하여 차일을 가설한다. 차일은 금줄 밖에 치는데 삼면은 막고 앞쪽만 트인 채로 하여 제관들이 앉아 있을 정도의 높이이다. 차일 옆에는 당일 오전에 역시 장작을 준비해 둔다. 제사를 모시기 위해 제관과 풍물패들이 제장에 도착하면 장작더미에 불을 지핀다. 전에 호계리와 함께 인근 장동마을과 만수마을이 합동으로 별신제를 모셨다. 그러나 1914년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용계면이 부산면과 장동면으로 분면되었으며, 그로 인해 같이 용계면에 속했던 세 마을 중 내를 사이에 두고 호계리는 부산면, 장동과 만수는 장동면에 속하게 되었다. 이렇게 분면이 되고 나자 행정구역이 다르고 또 여러 가지 일에서 서로 달라졌기 때문에 차츰 장동면에 속하게 된 두 개 마을에서는 참석을 꺼리게 되었고 결국에 가서는 그들 마을 사람들은 별신제에 참례를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호계리만 단독으로 별신제를 모시고 있다. 세 개 마을이 합동으로 별신제를 모실 때는 대개 산지기를 하는 사람들이 나무를 한짐 씩 해왔더라고 한다. 마을에 전하는 󰡔제관록󰡕에는 나무를 지고 올 사람들의 명단도 “炬”란에 기록되어 있다. 이날 상당히 많은 나무가 쌓이게 되는데, 별신제를 모시면서 불을 지피고 남는 나무는 별신제 준비에 가장 수고가 많은 제물을 장만하는 장찬이 가져갔다고 한다.

별신제를 마치고 나서 지내던 당산제는 마을이 생기면서 심었다고 전하는 국도변 귀목나무 3주가 섰던 곳에서 모셔졌다. 그러나 당산제는 30여년 전에 없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이들 나무 마저 모두 고사하여 없어졌다. 마지막 남았던 나무마저 1997년 태풍에 쓰러졌다. 마을에서 당산제를 폐지한 후로도 인근에 살던 한 여노인이 매년 대보름에는 개인적으로 제상을 당산나무 앞에 차려 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마저도 나무가 없어지자 하지 않았다고 한다. 별신제를 모시기는 3백년 전 부터요, 당산제는 1백년 전부터 모시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당산제를 모시게 된 내력과 관련해서 전하는 말들이 있다. 예전부터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있으려면 귀목나무가 벌이 나는 소리를 내면서 울었다고 한다. 이런 일은 여러 차례 있었다고 전해져 왔는데, 그로 인해 마을에서는 당산제를 모시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 몇 년 전부턴가 마을 입구 국도에서 교통사고가 많이 나서 별신제를 지내고 나서 당산제를 모시던 곳에 술을 한잔 씩 붓고 풍물을 올렸으나 효험이 없는 것 같아 작년부터는 이것도 폐지했다고 한다.

당산할아버지나 당산할머니와 같은 관념은 없다. 그냥 당산이라고 하며, 별신제를 모시고 나면 따로 당산제를 모시기 위해 장만해 둔 제물을 가지고 와서 역시 같은 제관들이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그러나 별신제는 엄숙히 홀기에 적힌 절차에 따라 모시는 것과는 달리 당산제는 간단히 제물을 갖추고 초헌관만 잔을 올리고 절을 하며 당산굿을 치고 마쳤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당산제를 별신제의 부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 중요성도 별신제에 비해 낮게 평가하고 있다.

2. 준비 절차와 내용

매년 음력 초이래 날이면 마을 회의가 마을회관에서 열린다. 한 가정에서 한 사람씩 참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날 회의는 별신제를 모실 사람들을 뽑기 위한 것으로 마을 이장이 주관한다. 마을에 내려오는 󰡔별신제향제관망정(別神祭享祭官望定)󰡕에는 제사를 모실 사람들의 역할을 구분하여 적고 있는데, 아래와 같이 당연직인 반장을 제외하고 대개 21명 정도가 이날 선정된다.

초헌관(初獻官) - (1명)
아헌관(亞獻官) - (1명)
종헌관(終獻官) - (1명)
집례(執禮) - 홀기를 읽는 사람 (1명)
축(祝) - 축을 쓰고 읊는 사람 (1명)
장찬(掌饌) - 음식 준비 (1명)
전사(典祀) - 제물(祭物)을 진설하는 사람 (1명)
사존(司尊) - 제주(祭酒) 담당 (1명)
봉로(奉爐) - 향로를 담당하는 사람 (1명)
봉향(奉香) - 향불을 피우는 사람 (1명)
봉작(奉爵) - 술잔을 받들어 헌관에게 주는 사람 (1명)
전작(奠爵) - 헌관의 잔을 받들어 올리는 사람 (1명)
찬인(贊引) - 제관을 인도해 주는 사람 (2명)
장생(掌牲) -닭을 죽여 피를 뿌리는 사람 (1명)6)
포진(脯陳) - 제물을 옮기는 사람 (6명)
거(炬) - 제장에 불을 피우고 횃불을 드는 사람 (각 반장)


망정에는 선정된 제관별로 그 이름을 적고 “회유문”이라 하여 여기 뽑힌 사람들은 별신제를 위해 일해줄 것을 당부하고 있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이들을 선정할 때는 특별히 생기복덕을 보지는 않지만, 집안에 유고가 없는 깨끗한 사람만을 뽑는다. 상복을 입고 있는 가정과 아기를 낳은 가정을 가장 큰 부정이 있는 집으로 생각하며, 정월 들어 개고기를 먹은 사람이나 역시 정월에 집안에 기르던 가축이 죽은 사람도 제외된다. 특히 제물을 장만하는 장찬의 경우는 가장 깨끗해야 할 사람으로 생각하며, 그래서 가능하면 혼자 사는 여노인을 가장 선호하고, 젊은 사람의 경우는 피한다. 이날 뽑힌 사람들은 궂은 곳이라고 생각되는 곳은 일체 가지 않는다. 예를 들면 초상이 난 집이나 산고가 든 집은 절대 가린다. 혹시 마을에 초상이 나더라도 별신제는 모시지만, 별신제를 모실 사람은 초상집에 가지 않으며, 초상집에 다녀온 사람은 별신제에 참례하지 않는다. 뽑힌 사람들에게는 글로 써서 각각 통문을 돌린다. 풍물을 칠 사람은 따로 뽑지 않고 유고가 없는 사람들이 참여하여 굿을 친다.

마을 사람들은 제관으로 선정되는 것을 대체로 꺼린다고 한다. 춥고 귀찮을 뿐만 아니라 혹시 제사를 잘못 모셔서 개인적으로나 집안이 해를 볼까 싶어서이다. 실제로 별신제를 모시고 나서 머리가 아프고 해서 단독으로 새로 제물을 장만하여 별신제를 모신 사람도 있다고 한다. 비록 좋지 않은 일이 있더라도 마을에서 다시 날을 받아 별신제를 모시는 예는 없다고 한다. 다만 해를 본 사람이 스스로 알아서 다시 제사를 모신다. 마을회의에서 한번 뽑히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거절하지 않는 것이 통례다.

별신제를 모시기 전부터 제사에 참여할 모든 사람들이 조심하며, 비린 것을 먹지 않는다. 특히 장찬의 경우는 대문에 금줄을 걸고 문간에 황토를 파다가 한 삽 씩 듬성듬성 뿌려놓는다. 금줄을 꼴 때도 깨끗한 가정의 짚을 가져다 꼰다. 대문에 금줄이 걸리면 비록 가까운 친척이라고 하더라도 방문을 꺼리며, 다른 사람과의 왕래를 삼가한다. 또 매일 찬물로 목욕을 해야 하며, 특히 소변을 보면 그때마다 손을 씻고 대변을 보면 목욕을 해야 한다. 목욕을 새로 하는 것이 번거로워 장찬을 맡은 사람은 제사가 끝나도록은 식사량을 크게 줄인다고 한다. 다른 제관들 역시 제사 며칠 전부터는 찬물로 목욕을 한다. 그러나 찬물로 목욕을 하는 것은 예전의 일이며, 요즈음은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또 대중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제사에 참례할 사람들이 정해지고 나서 초열흘 경에 당샘을 팠다. 물론 요즈음은 집집마다 수돗물을 쓰기 때문에 따로 당샘을 파지 않지만, 예전에는 마을 사람들이 쓰는 우물물은 여러 사람이 쓰기 때문에 부정을 탈 수도 있어 따로 샘을 팠다. 별신제를 모실 냇가 자갈밭 깨끗한 곳을 골라 조금만 파면 물이 나온다. 주변에는 금줄을 쳐서 다른 사람의 출입을 막고 단지 제물을 장만하는 장찬만이 그 물을 사용토록 한다. 장찬은 당샘물을 처음 길어다 祭酒부터 앉힌다. 그리고 매일 목욕을 할 때는 이 물을 길어다 쓴다.

이 마을은 500평 정도의 祭畓이 있다. 예전에 대동계에서 매구를 쳐서 모은 돈으로 제답을 장만했다고 전해온다. 마을에서는 논을 맡기고 매년 쌀 한가마니 반의 곡수를 받는다. 이것을 팔아 제비를 장만한다. 시골 장날은 양력으로 잡혀 있기 때문에 대보름에 가장 가까운 장날을 골라 장흥읍장에서 제물을 사온다. 요즈음은 자동차로 다니지만, 예전에는 지게를 지고 이장과 장찬이 장을 보러갔다고 한다. 장을 보러가기 전에 목욕을 깨끗이 하며, 가능하면 다른 사람보다 일찍 물건을 사기 위해 이른 시간에 장에 간다. 사는 물건은 많지 않지만 物目記를 적어간다. 대추, 밤, 꽂감 등 삼실과와 제석자리와 시루, 제기, 소내장, 그리고 한지 등이다. 지금은 제석자리, 시루, 제기 등은 매년 새로 사지 않고 따로 마을회관에 보관해두었다가 매년 사용한다. 살 때 값을 깎지 않는다. 장을 보아오면 제물은 장찬집에 보관한다.

정월 열나흩날이 되면 아침부터 마을 사람들이 별신제 준비에 들어간다. 대나무를 베어오고 금줄을 꼬고 하여 별신제를 모실 곳에 제장을 만들고, 주변에 차일로 幕次를 치며, 또 밤에 장작불을 피우기 위해 뗄감을 준비한다. 예전에는 이날 당산나무에도 금줄을 걸었으나 지금은 당산나무가 없어 하지 않는다. 또 예전에는 마을 입구에 금줄을 걸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하지 않는다. 금줄이 둘러진 제장의 북쪽 끝에 흐리상을 만든다. 흐리상은 소나무로 다리를 하고 대나무를 얽어 상판을 만든 것으로서 제사를 모실 때 제상으로 사용된다.

장찬은 별신제를 모실 제물을 장만한다. 우선 제주를 세 병 준비한다. 윗국물을 뜨면 청주가 되는데, 이를 각각 세 개의 병에 나누어 담는다. 예전 당산제를 모실 때는 제주 네 병을 준비했다. 제주를 뜨고 나서 술을 걸러 그날 밤과 다음날 총회 때 먹을 막걸리를 준비해 둔다. 이 마을에서는 메나 탕은 준비하지 않지만, 매년 떡은 장만한다. 특히 시루에 백설기를 쪄서 제상에 올리며, 장찬이 손으로 직접 가래떡을 만든다. 제기 세 개에 올릴 정도의 양을 만든다. 장찬은 제물을 다룰 때는 불결하지 않도록 반드시 수건으로 입을 막는다. 또 나락, 보리, 콩, 팥, 목화씨 등 5가지의 씨앗을 따로 제기에 담는다. 무도 하나 준비한다. 그리고 장닭의 다리와 날개를 묶어 제장에서 희생으로 쓰도록 준비한다. 예전에는 돼지 한 마리를 사서 제장에서 그 목을 잘랐다고 하는데, 경비가 많이 들어 닭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살아 있는 장닭을 제상 밑에 두었다가 제사가 끝나면 목을 잘라 그 주변에 뿌리고 머리는 땅에 묻는다. 피는 악마를 쫓기 때문에 목을 잘라 피를 뿌리는 것이라 한다. 다음날 살코기는 죽을 쑤어 마을사람들이 나누어 먹는다. 돼지를 희생으로 사용했던 때는 보름날 낮에 줄다리기를 하고 매구를 치면서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제사를 모실 사람을 뽑을 때 장생을 따로 뽑는데, 그 역할을 닭의 목을 자르는 것이다. 요즈음은 아무도 그 일을 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4년전부터는 따로 뽑지를 않고 있다. 제사에 참례했던 사람들 중에 아무나 자른다. 그러나 이 일도 잘 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요즈음 여간 곤란을 겪는 일 중의 하나다.

제사상에 올릴 것은 아니지만, 장에서 사온 소내장을 손질하여 국을 끓인다. 제사를 모시는 사람들과 풍물패들이 제사를 모시기 전에 준비할 때나 제사를 끝내고 나서 술안주를 하기 위한 것이다.

각기 가정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제사를 모실 사람들은 마을회관에 모인다. 풍물을 칠 사람들은 농악기를 이때 손보기도 한다. 이때 특별히 하는 것은 없으며, 제사를 모실 시간까지 함께 모여 잡담을 나눈다. 밤 열시 경이 되면 제관들은 제복으로 갈아입으면서 제장으로 향할 준비를 하고, 풍물을 칠 사람들 역시 풍물 복장을 하고 대기한다. 본래 이 마을은 마포로 제복을 만들었으며, 그 색깔도 검은 색이었다. 그러나 남도문화제에 참가하면서 옷색깔도 바꾸고, 화학섬유로 대신했다. 파란색 5벌과 하얀색 10여벌이 준비되어 있다. 파란색 옷은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집례, 축관이 입고, 하얀색 옷은 다른 제관들이 입는다.

3. 별신제의 진행

2002년 현장조사의 상황을 실시간대별로 그 진행 과정을 기술한다.

○ 22시 30분

마을회관에서 풍물패들이 풍물을 울리기 시작했으며, 마당에 모여 조금 풍물을 치다가 제장으로 향했다. 이들을 뒤따라 제관들 역시 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 22시 35분

풍물패와 제관들이 제장에 도착했다. 이미 그곳에는 장작불이 피워져 있었다. 장작불 주변에서 풍물패들은 돌면서 계속해서 풍물을 쳤다.

○ 22시 45분

제관 3명이 차일 안으로 들어가 촛불과 후래쉬를 밝히고 축문을 쓰기 시작했다.

먹을 갈아 붓으로 축문을 썼으며, 조명이 어두워 글을 쓰는데 애를 먹는 모습이었다. 축문은 아래와 같다.7)

歲次干支 後學某 敢昭告于

別神之神 二氣迭旋 三陽宣和 天地交泰 舍生品彙 造化之迹 有鬼有神 盛矣其德 佑我烝民 丁斧寅釰 駕風鞭霆 驅厲逐魔 廓淸四方 視聽吾人 誕降吉祥 有誠必格 有禱必應 時維孟春 萬和方暢 日吉辰良 齊沐告誠 俯伏就位 星斗定中 牲肥尊潔 三酌禮成 神旣醉飽 百靈俱享 錫我白福 惟日不足 家無疾疫 野登麥菽 焚香拜祝 靜息淸明 用伸處告 神其

尙 饗

○ 22시 55분

풍물을 치던 사람들이 일렬로 도열하여 제장 쪽을 향해 섰다. 상쇠가 앞에 나서서 “초경 아뢰오.” 하고 한번 소리치자 풍물패가 일제히 복창을 했으며, 다시 “이경 아뢰오.” 하고 두 번 소리를 치자 역시 풍물패가 복창을 했다. 예전에는 초경부터 5경까지 따로 했으나 지금은 1․2경, 3․4경, 그리고 5경 등 세 번으로 축소하여 아뢴다고 한다. 초경은 한번, 2경은 두 번, 그런 식으로 하여 5경은 다섯 번을 아뢰는 형식으로 한다.

○ 23시 24분

3․4경을 아뢰었다. 3경은 세 번, 4경은 네 번을 각각 아뢰었다.

○ 23시 32분

5경을 아뢰었다.

5경을 아뢰고 나서 풍물패가 앞을 서고 제관들이 뒤따르면서 장찬집으로 제물을 가지러 갔다.

○ 23시 40분

장찬집에 도착하여 신궤라고 부르는 나무로 짠 들것에 제물을 옮겨 실었다.8) 장찬은 수건으로 입을 막고 있었으며, 마루에 준비해 놓았던 제물을 신궤에 옮겨 실을 수 있도록 마루끝으로 날랐다. 1991년도의 조사에서는 <그림 5>가 보여주는 것처럼 모든 제물을 한지로 싸고, 그 위에 붓글씨로 그 이름을 적어놓았는데, 2002년도에는 이것이 약화되어 제기에 바로 제물을 담아 놓은 것이 차이를 보였다.

○ 23시 45분

제장에 도착하였다. 돌아올 때도 역시 풍물패가 앞서서 굿을 치고, 신궤에 제물을 실은 제관들이 뒤를 따랐다. 도착하자 곧 바닥에 배석자리를 펴고 설상을 시작하였다.

○ 23시 50분

설상을 끝내고 제관들이 모두 금줄이 쳐진 밖으로 나가 서 있자, 홀기를 읽는 집례가 초헌관부터 차례로 호명을 하고, 호명된 사람은 금줄 안으로 들어와 차례로 섰다.

○ 23시 59분

호명을 모두 마치고, 집례가 부르는 홀기에 맞추어 초헌관부터 잔을 올리고 제사를 시작했다. 집례는 한문식의 홀기를 부르다가 제관들이 알아듣지 못하면 말로 설명도 하였다.

○ 0시 20분

사신배를 끝으로 제사를 마치고, 제상 다리 밑에 놓아두었던 닭의 모가지를 잘랐다. 처음에는 아무도 목을 자르려 하지 않았으며, 서로 미루었다. 결국 한 사람이 자원하여 목을 잘랐으나 한 번에 자르지를 못해 피가 사방으로 튀겼다. 자른 닭머리는 땅에 묻었다.

○ 0시 22분

모인 사람들이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의 순서로 하여 한지를 한 장씩 나누어 들고 소지를 올리면서 口祝을 하였다. 내용은 국태민안, 소원성취, 농사풍년 등을 비는 내용이었으며, 조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한지를 나누어주며 소지를 하도록 배려를 하였다. 실제로 축관이 소지를 하면서 구축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소지는 다름이 아닙니다.
첫짜에는 우리 가정이 평화롭고,
두짜로는 금년에 오곡이 풍년이 들어서 모든 것이 풍년이 든다는 것이고,
세짜는 국태민안한 기원입니다.
종이로 해서 소지해서 올립니다.”

○ 0시 30분

소지가 모두 끝나자 제상 위에 올렸던 제물을 조금씩 떼어내 7장의 백지에 싸서 자갈밭에 묻고 나서 음복을 시작하였다. 제상 위에 과일과 떡, 그리고 제주를 한잔씩 나누었으며, 제상 한쪽 다리 밑에 놓아두었던 무를 쪼개 무사태평할 거라면서 서도 조금씩 나누어 먹었다.

○ 0시 35분

철상을 끝내고 신궤에 제기와 남은 제물을 올려 싣고 역시 풍물패를 앞세우고 장찬집으로 향했다.

○ 0시 41분

풍물패와 제관 일행이 장찬집에 도착하여 제물을 내려놓고 한참동안 마당굿을 했다. 마당굿을 마치자 미리 장찬이 안방에 준비해둔 상에 앉아 술과 안주를 나누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가며 정담을 나누었다. 안주는 소내장으로 끓인 국과 나물이었다.

○ 1시 20분

장찬집에서 모두 철수하여 일부는 마을회관으로 가고 또 일부는 각 가정으로 돌아갔다.

매년 다소 시간상의 융통성은 있으며, 1시에서 2시경 사이에 제사를 마친다. 예전에는 보름 때면 눈이 쏟아지는 날도 많았고 또 날씨가 추워 제사를 지내고 나면 수염에 고드름이 어는 날도 많았다고 한다. 또 손자가 있는 할아버지들은 손자에게 좋다고 하여 예전에는 가래떡을 조금씩 가져왔으며, 지금의 제보자들이 기억하기로는 예전 어려서 할아버지가 가져 오실 가래떡을 먹기 위해 잠을 자지 않고 기다렸었더라고 한다.

4. 별신제의 결산

별신제를 모시고 나서 음력 정월 15일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결산을 한다. 이장이 별신제와 관련하여 수입과 지출에 대한 보고를 하고 마을 사람들 중 의문이나 의견이 있으면 이때 말한다. 장찬집에서 준비해온 안주와 음식을 놓고 마을 사람들이 술을 한잔씩 하면서 별신제와 관련된 이야기도 이때 나눈다.

본래는 대동계로 불리는 마을 총회를 별신제를 마치고 하였으나, 생활의 대부분이 양력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지금은 대동계를 양력 12월 25일에 한다. 대동계에서는 마을의 제반사를 논의하며 이장의 선출이나 품삯을 결정하는 등 중요 사안을 다룬다.

따라서 현재는 마을의 총회가 두 번 열리는 셈이다. 실제적인 里政과 관련된 회의는 연말에 열리고, 대보름날은 단지 별신제 관련 결산을 하는 것으로 끝낸다.

5. 영험담

별신제나 당산제와 관련되어 마을에는 구전으로 여러 가지 영험담이 전하고 있다. 이러한 영험담은 마을 사람들의 마음에 매우 큰 구속력을 가지며 또한 마을제사와 관련된 지식을 전승시키는 기능도 맡고 있다. 그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마을 사람으로서 아직 군대에 가서 죽은 사람이 없다고 한다. 이는 모두 별신제를 잘 모셔 왔기 때문에 그 덕택으로 별 사고가 없다고 믿고 있다.

원래는 별신제만 모시다가 훗날 당산제를 추가로 모시게 되었다. 어떤 제보자는 별신제는 3백년, 당산제는 1백년의 역사를 가졌다고도 한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당산제는 마을의 동쪽 입구 귀목나무가 서 있는 곳에서 모셨는데, 당산제를 모시게 된 배경이 마을에 구전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그 귀목나무들이 마치 벌이 나는 소리와 같은 소리를 내면서 밤중에 울었다는 것이다. 귀목나무가 울고나면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곤 하였다. 그래서 마을에서 협의를 하여 그 나무에 당산제를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제보자 중 한 분이 1943년의 일로 기억하고 있는 사실로서 당시 당산나무가 울자 마을의 한 노인이 무엇이라고 적은지는 모르지만 뭔가 글을 써서 붙이자 우는 소리를 그쳤다고 한다. 또 세 그루 중 1997년에 마지막 남은 귀목나무가 태풍에 의해 쓰러졌는데, 바로 인근에 있는 집쪽으로 넘어지지 않아서 전혀 피해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 집 주인은 마을에서 당산제를 폐지한 후에도 혼자서 당산나무에 메를 한 그릇씩 지어 매년 올렸다고 하며, 그로 해서 피해를 입지 않았을 것이라고 마을에서는 말이 전하고 있다. 당산나무가 쓰러진 후에 당산나무 안에서 흰 뱀 두 마리가 나와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전한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별신제 제물을 준비하다가 맛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런 후 그 사람은 몸에 열이나고 견딜 수가 없어서 개인적으로 따로 제물을 준비해서 별신제를 모시고 나자 그때서야 몸에 열이 식었다고 한다. 또 별신제를 잘못 모셔 이러한 피해를 보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경우 마을에서 새로 날을 받아 모시는 대신에 그 피해를 입은 본인이 제물을 장만하여 제사를 모신다고 한다.

예전에 별신제를 모신 사람이 그날 밤 부인과 동침을 했다. 아침에 인기척이 없어 시어머니가 방문을 열자 둘이 붙어서 아무리 용을 써도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래서 비가 올 때 소에게 씌우는 소어치(소두데)를 씌우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자 그때야 떨어졌다고 한다. 소어치를 씌워 굿을 했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하지 못할 짐승같은 짓을 하였다는 경고와 의미를 담은 구전인 셈이다.

예전에 닭을 희생으로 쓰기 전에는 산 돼지의 머리를 잘라 땅에 묻었는데, 어떤 배고픈 사람이 그것을 파다가 먹었다고 한다. 그 즉시로 그 사람은 천병에 걸리고 말았다고 한다. 또 희생을 할 돼지나 닭을 제상 밑에 별로 묶지도 않지만, 마치 죽은 것처럼 숨을 죽이고 엎드려 있다고 한다. 그것은 신이 엄해서 꼼짝못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제사가 끝나고 나면 제상에 올렸던 오곡을 그대로 놓아두는데 오래 되어서 새들이 침범하지 않는다고 한다. 별신제가 끝나면 제장을 만들기 위해 가설했던 대나무나 금줄, 그리고 호리상 역시 그대로 방치해 둔다. 다음에 홍수가 나서 없어질 때까지 그대로 두는 까닭은 만약 손을 댔다가 화를 입을까 보아서라 한다.

Ⅳ. 儀禮와 典籍의 검토

1. 유교식 의례의 전형

호계리의 별신제는 전형적으로 유교식 집례 절차를 따르고 있다. 祭官과 祭物, 祭次와 犧牲까지도 유교식 의례를 준용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특히 홀기에 따라 전반적으로 별신제가 집전되는데, 이 마을 외에도 예를 들면 담양군 금성면 원율리에 전하는 󰡔四禮雜錄󰡕이라는 책에도 역시 당산제 홀기가 기록되어 있지만,9) 현재 사용하고 있지 않는 것에 반해서, 이 마을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의 전승집적도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홀기에 의거하여 진행되는 별신제의 집례 절차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순 서 - 절차
序 立- 헌관과 제관들이 제위치에 임석하고 제상에각각배례
初獻禮- 초헌관이 손을 씻고 향을 피워올린 후 잔을 올리고 재배
讀 祝- 축관이 독축
亞獻禮- 아헌관이 손을 씻은 후 잔을 올리고 재배
終獻禮- 종헌관이 손을 씻은 후 잔을 올리고 재배
飮福禮- 초헌관이 나가 술잔을 받아 마시면 헌관 일동 재배
禮 畢- 축문을 태우고 헌관이 퇴장한 뒤 다른 제관일동재배

위 표는 간략히 그 진행절차를 요약한 것이지만, 그에 부수되는 일단의 내용들은 󰡔國朝五禮儀󰡕의 길례 절차와 거의 동일하다. 아래 홀기가 보여주는 것과 같이 무엇보다도 󰡔국조오례의󰡕와 이곳 별신제 제관명부에 나오는 제관의 명칭과 그들의 역할을 비교해보면 이러한 사실이 명확해진다. 晩守齋 李敏琦의10) 撰으로 되어 있는 이 마을 별신제 홀기는 다음과 같다.


虎溪大洞別神祭笏記

獻官及諸執事皆序立○執禮贊引贊唱先再拜無唱贊引引獻官以下俱就門外位○贊引引祝及諸執事入就拜位○再拜有唱詣盥洗位洗爵省事○贊引進初獻官之左白有司謹具請行事○獻官皆再拜有唱

行初獻禮○贊引引初獻官詣盥洗位拭訖引詣尊所西向立○引詣神位前北向跪○三上香○尊爵納幣○俯伏興○平身○進笏○引詣神位前北向跪

祝○取祝板東向跪讀祝○俯伏興平身○引降福位

行亞獻禮○贊引引亞獻官詣盥洗位拭訖○引詣尊所西向立引詣神位前北向跪奠爵○俯伏興○平身○引降復位

行終獻禮○贊引引亞獻官詣盥洗位拭訖○引詣尊所西向立引詣神位前北向跪奠爵○俯伏興○平身○引降復位○獻官皆再拜有唱

行飮福禮○贊引引初獻官詣飮福位西向跪受爵噿酒受胙降復位○祝○撤籩豆少移故處○獻官再拜有唱贊引初獻官之左白○禮畢○引詣望痤位焚祝○祝引降復位○贊引人三獻官以次而出○祝及諸執事皆再拜有唱執禮贊引贊唱○皆再拜無唱

이 마을에서는 현재 별신제를 위해 당연직인 반장을 제외하고 21명의 제관을 선정한다. 제사 규모의 차이로 인해서 조정되는 요소를 감안하고 본다면, 이곳 별신제를 위한 제관의 명칭은 물론 그 역할 또한 오례의에 나오는 제관과 동일하다. 한편 최근 제관 선정에서 빠진 예로서 贊唱과 掌牲이 있다. 찬창은 집례자가 홀기를 부르면 그것을 복창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다. 󰡔제관록󰡕에 1997년 이후로는 찬창과 장생이 보이지 않는다. 마을사람 수가 줄어들면서 제관의 수 역시 축소해가고 있는 현상이며, 또한 사람들이 산 닭의 목을 자르는 역할을 싫어하기 때문에 장생 역시 뽑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제관의 수와 역할은 다소 유동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오례의의 제관과 이곳 별신제의 제관은 거일 일치한다고 보겠다. 보다 분명한 것 중 하나는 별신제에서 贊引의 역할이다. 찬인은 제장에서 헌관을 인도하는 사람이다. 이는 명확히 유교식 제례형식을 따르고 있는 예로서 민간신앙의례나 불교의례 등에서는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잔대를 세 개 제상에 올리는데 이 역시 오례의 길례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잔대 세 개를 天․地․人을 뜻하는 것이라 하며, 거기에 맞추어 떡도 세 접시, 무도 세 접시를 놓고 있다. 그러나 이는 민간화하면서 재해석된 것일 뿐 사실은 초헌작, 아헌작, 종헌작이다. 그리고 실제로 각각 세 개의 잔이 초헌, 아헌, 종헌에 맞추어서 사용되고 있다.

그 외에도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소위 제관들이 머무를 수 있는 장막으로서 幕次를 제단의 서쪽에 가설하도록 하는데, 이 마을 별신제에서 역시 제장 서쪽에 막차를 마련하여 헌관과 축관이 머무르는 한편 축문을 베껴 쓰는 곳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 헌관들은 품계에 따라 재질을 달리하는 笏을 사용하게 되어 있는데, 이 마을 별신제에서 역시 나무로 깎아 만든 홀을 헌관들이 소지하고 제사를 모신다. 다른 마을들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祭場의 犧牲을 예로 들 수 있다. 지금을 닭을 사용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돼지를 사용했다고 하는 희생의례로서 이는 전형적으로 유교식 의례의 한 절차가 되어 있어 이곳 별신제가 유교식 제차, 특히 길례의 유례를 전거로 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예라 하겠다.


2. 전적과 마을사

마을에는 숙종 41년(1702)에 대동계를 만든 내력을 담은 󰡔대동창계(大洞刱契)󰡕라는 책으로부터 시작하여 지금도 매년 별신제를 모시고 나서 그해 선정되었던 제관과 결산 내역을 기록하는 문서가 결책되어 보관되어 있다. 또 예전 마을의 풍물을 마련할 때 부의를 했던 사람들의 명단과 그 내역을 기록한 책, 제관록, 그리고 홀기 등 문적이 전하고 있다. 그 현황은 아래와 같다.


1 肅宗四十一年乙未 大洞契案
2 第一 肅宗四十一年乙未 大洞刱契
3 第二
4 第三 虎溪村中執綱案
5 第四 壬辰二月初一日 大洞契村案
6 第五 戊午十二月日 虎溪里執綱案
7 第六 甲戌正月十五日 虎溪里執綱案
8 第七 乙未正月十五日 虎溪大洞案
9 第八 歲癸酉正月十五日 虎溪大洞中
10 第九 甲午正月十五日 虎溪大洞案
11 第十 甲子正月十五日 虎溪大洞案
12 戊戌年正月日 虎溪洞案
13 丙申春正月小望 虎溪洞案
14 庚寅正月初六日 虎溪洞中金鼓扶儀冊
15 戊午歲首旣望瞻書 祭官錄
16 虎溪大洞別神祭笏記

이들은 지금까지 300년의 역사를 두고 기록되어 온 것들로서 별신제 뿐만 아니라 마을사 전체를 조명해 줄 수 있는 사료로서 가치가 자못 크다하지 않을 수 없다. 매년 별신제를 모시고 나면 소위 대동계라는 마을총회를 열어 별신제의 결산은 물론 이정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들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 자료는 마을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역대 제관들의 이름을 적고 있는 󰡔제관록󰡕만 예로 들면 다음과 같은 연구가 가능할 것이다. 1965년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농촌인구가 감소한 해이다. 산업화에 따른 농촌인구의 이농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40여년간 지속되는 가운데 농촌인구의 고령화는 필연적으로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 마을 역시 이러한 과정을 겪어왔으며, 그런 점에서 사회적 변화가 별신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우리는 제관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1960년도부터 2000년도까지의 연도별 제관 연령의 평균치를 내보면, 이 마을의 고령화 추세에 대한 정확한 통계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과거의 통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언제까지 별신제가 전승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예측도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연령대의 상승곡선을 연장시켜보면 우리나라 농촌인구의 평균수명을 넘어서는 분기점이 바로 이곳 별신제의 자연적 전승이 마감되는 해로 가정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가정이기는 하지만, 이를 전혀 무의미한 통계학적 장난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화정책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여기서 얻어진 통계결과는 단지 호계리에만 한정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농촌사회에서 전통문화와 민속이 전승될 수 있는 상황을 예측하고, 그를 바탕으로 하여 문화정책을 세울 수 있는 하나의 지표제공도 가능한 연구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홀기 뒷면에 씌여져 있는 축문은 세 종류이다. 아래 <축문 1>은 이미 앞에서 제시했던 대보름 별신제에서 실제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축문 2>는 田祖之神에 대한 제향에서 쓰이는 것인데 오래 전에 없어진 것인지 이와 관련된 사항은 지금 알 수 없다. 이 둘은 최초 동계안을 만들었던 晩守齋 李敏琦의 찬이다. <축문 3>은 小柏 金基權의 찬이다.11) 이 내용은 <축문 1>과 거의 상당 부분 일치를 하면서도 추가된 내용이 있으며, 그것을 검토해 보면 여름에 마을 제사에서 사용된 축문임을 알겠고, 또한 특히 그 여름 제사는 蟲祭의 성격을 지녔던 것을 알 수 있다. 제보자들이 기억하고 있기로는 예전에는 특히 벼멸구가 성했을 때 이 여름 제사를 모셨다 한다. 일제시대 기름을 풀어 벼멸구를 방제하는 방법이 고안되고 나서는 충제를 모시는 일이 잦아들었다고 한다. 현재는 완전히 잊혀진 풍속이지만 이러한 기록물이 전함으로 해서 과거의 마을사와 민속문화를 재조명해볼 수 있는 것이다.


<축문 1>

歲次干支 某官姓名 敢昭告于

別神之神 二氣迭旋 三陽宣和 天地交泰 舍生品彙 造化之迹 有鬼有神 盛矣其德 佑我烝民 丁斧寅釰 駕風鞭霆 驅厲逐魔 廓淸四方 視聽吾人 誕降吉祥 有誠必格 有禱必應 時維孟春 萬和方暢 日吉辰良 齊沐告誠 俯伏就位 星斗定中 牲肥尊潔 三酌禮成 神旣醉飽 百靈俱享 錫我白福 惟日不足 家無疾疫 野登麥菽 焚香拜祝 靜息淸明 用伸處告 神其

尙 饗

晩守齋 仁川 李敏琦 撰


<축문 2>

田祖之神 嗟我民事 非穀何食 夏月作苦 稻梁麥稷 金颷屆節 農旣告曰 雨雨果果 五徵乖錯 孽芽其間 非蟊非○ 着葉塗莖 如糠如粃 萃爛將盡 甌窶汙邢 四郊雷同 名以滅吳 細甚蚊蝱 害踰狼虎 農家有事 禱于田祖 豚蹄壺酒 齊人之禳 秉卑炎火 曾孫之祝 今以吉辰 擇淨爲壇 牲酒旣潔 齊沐且誠 所特雖狹 所欲卽奢 伏惟田祖之神 欽玆鑑玆 掃妖蟲投 諸溟渤禾 稼登熟歲 有大年

尙 饗

晩守齋 仁川 李敏琦 撰


<축문 3>

歲次干支 某官姓名 敢昭告于

別神之神 二氣迭旋 三陽宣和 天地交泰 舍生品彙 造化之迹 有鬼有神 盛矣其德 佑我烝民 丁斧寅釰 駕風鞭霆 驅厲逐魔 廓淸四方 視聽吾人 誕降吉祥 有誠必格 有禱必應 每歲元望 三里崇祀 民至于今 實賴是佑 于何今歲 怪氣致疹 閭里不淨 死亡間仍 恐或元望 祭禮不誠 衆心危懼 以仲夏晦 更擇良辰 齊沐告誠 俯伏就位 星斗定中 牲肥尊潔 三酌禮成 神旣醉飽 百靈俱享 錫我白福 惟日不足 家無疾疫 野登麥菽 焚香拜祝 靜息淸明 用伸處告 神其

尙 饗


Ⅴ. 결 론


호계리의 별신제는 그 명칭이 뜻하는 것처럼 일반적으로 광주․전남지역에서 볼 수 있는 민간신앙으로서의 당산제와는 크게 차이를 보인다. 경상도 및 강원도 일원의 별신제와도 성격을 전혀 달리하는 호계리 별신제는 관제의 형식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선 하나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제관, 제물, 제차 등 거의 모든 점에서 󰡔國朝五禮儀󰡕의 길례에서 볼 수 있는 관제의 형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관련 서적들은 그 역사를 조명해 주기도 하는데, 특히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관제가 민간화되는 하나의 양상을 찾는데 크게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된다.

호계리에는 별신제와 당산제가 병행되어 오다가 당산제는 이미 폐지되고 말았다. 당산제를 지탱하던 민간신앙적 지반은 이미 약화되어 흔적없이 사라졌지만, 민간신앙화된 별신제는 지금도 살아있는 마을문화의 하나로서 매년 수행되고 있는 것이다. 매년 대보름에 현장조사를 다니다 보면 편의주의에 의해 많은 마을들에서 당산제 수행부분이 축소, 약화, 생략되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마을의 별신제는 10여년의 시간을 두고 조사한 결과 거의 변함없는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으며, 숙종 때부터 기록하기 시작한 동계책이 지금까지도 별신제를 모시고 나서 매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왕성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이러한 기록 자료는 앞으로 연구 여하에 따라서는 이 마을에 대한 역사문화적 해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훨씬 확대된 형태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른 마을들에도 동계에 관한 자료는 많지만, 이 마을처럼 마을제사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예는 거의 없다는 점에서 희소성은 물론 그를 통한 일반화의 가능성, 즉 다른 지역 마을제사의 역사도 이를 통해 조명해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셈이다.

자연 상태에서 호계리의 별신제가 얼마나 더 지탱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120여호의 마을이 현재 64호로 줄어든 실태를 보거나 주민의 노령화 추세로 볼 때 그 전승의 최종시한이 임박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뜻에서 이러한 문화재에 대한 보존과 전승, 그리고 발전을 위한 문화정책적 차원의 관심이 앞으로 촉구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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