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동서남북]80년대 ‘민중미술’을 아는가?
이코노믹21/2007년 11월 12일/김상일기자




최근 일간신문에 세인의 관심을 끄는 내용 중 하나가 김용철 변호사가 폭로한 대기업 비자금 로비설이다. 진실 여부를 떠나 한때 그들의 집단에서 녹을 먹으며 동료 검사들과 머리를 맞대고 정의를 외치던 그가 그들을 향해 손가락질 하고 있다. 과연 무엇 때문일까?

그리고 정의를 외치는 종교인들은 무엇 때문에 큰집 대문 앞을 서성이고 있는 것일까? 사회정의를 부르짖기만 하면 변절자든 누구든 쉽게 면죄부를 주려는 우리의 도덕과 가치관을 뒤돌아보게 한다. 작가에게 있어 그가 갖는 사회의식은 그대로 미의식으로 이어진다. 한 작가가 처한 삶의 의식 또한 그 시대의 산물로 대변되며 이는 작업의 중심을 이루기도 한다.

80년대 광주 항쟁으로 인해 친구와 형제들의 죽음을 목격한 뒤 독재정권에 저항하듯 숙명처럼 ‘민중미술’의 대열에 끼어든 박진화는 자기 그림의 시작을 80년대의 민중미술로부터라고 말한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은 ‘나는 이것이 좋다’가 아니라, ‘나는 이것일 수밖에 없다.’라고 받아들이는 듯하다. 그가 떠나온 곳은 남해바다가 보이는 전라남도 장흥이다.

붓에 담은 연민은 그림이 되어

지난 시절 그와 뜻을 같이하던 스승 故오윤의 날카로운 칼끝으로 아픔의 상처를 도려내듯 새겨진 판화나 저항하듯 온몸으로 흙을 빚어 그들의 아픔을 조각하던 후배 故구본주, 80년대 시대적 아픔을 대변하던 이들은 떠나가고 이제 박진화는 그의 무딘 붓끝으로 분단의 아픔을 풀어내며 ‘민중미술‘의 참 의미를 지켜가고 있다.

‘민중미술’을 외치던 대부분의 미술인들은 지금, 지난날을 망각하고 현 정권에서 나눠주는 솜사탕의 단맛에 빠져 있는 듯하다. 박진화는 얼마 전 민중의 원로 시인의 칠순 잔칫상을 뒤엎고 나온 적이 있다. 하나둘씩 떠나간 자리에 그는 망망대해에 홀로 남겨진 배처럼 절망감을 느낀다고 한다.

<추워>나 <절망>에서는 한때 아우성치고 울부짖던 이들이 이제 모두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울타리 같은 나무들은 일렬로 서있는데 모두 목이 잘려나간 듯 나무의 몸통만 남아있다. 그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 사람들은 울분과 울음을 멈추고 차가운 바람을 피하려 하지만 결국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추위와 두려움뿐이다.

박진화는 15년 전, 분단의 철조망을 옆에 둔 서해의 강화도에 둥지를 틀었다. 그곳에서 새로운 이념의 길을 찾아 나선 것이다. 이제 자신이 넘어야 할 산이 민족의 아픔인 분단이라 여긴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분단의 아픔을 예술인의 한사람으로서 홀로 지려는 듯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는 기색이 역력하다.

아직 못다 버린 비애의 울음을 저항의 무기로 삼아 분단의 철책선 주변을 서성이며 <철책에 걸린 도깨비>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오십 줄에 들어선 지금 ‘임진강의 아침’이나 ‘저녁의 임진강’을 소재로 철책이 허물어지는 그날을 기다리며 강을 판타스틱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그리고 민족 분단의 아픔을 붓만으로는 다 풀지 못한 듯 강화도 마니산의 첨성단을 자주 오르고 있다. 첨성단을 찾아 그들(철책에 걸린 도깨비)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있다.

“과연 내 붓끝에 무엇을 매달아야 하는가. 웃음인가 울음인가, 아니면 상생인가, 배반인가. 그는 다시 가장자리 그것도 맨가에 비스듬히 선다. 눈에 밟히는 것이 많아 정말 ‘눈’이 시리다.” 도전적이든 흥에 겨워하든, 아님 비애에 북받쳐 그리든, 남이 보아주든 말든 그는 그림에 취해 산다.

그는 자신의 그림으로 세상을 되돌릴 순 없기에 체념하듯 붓에 연민을 담아 그리고 있다. 다만 그림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슬픔과 아픔에 귀 기울이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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