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논단-박형상 변호사의‘진서대장군’ 논지에 대한 반론 /계사 위성호

2007년 8월 1일 장흥신문 논단에 박형상님
의 글 ‘왜 진서대장군 인가-試論’ 을 접하고 필자의 뜻을 다시 밝힌다.


관산 방촌고개 노변의 동편 속칭 미륵장승(女)과 서편의 서대장군은 1274년 제1차 일본정벌, 제2차 일본정벌 때 여원(麗元)연합군이던 고려 수군들이 고려수군의 발진지를 수호하기위하여 세웠다는 설, 또는 회주고을의 형국이 서쪽이 약하니 서문을 견고하게 하려고 부처의 힘을 빌린 숭불사상에서 세웠다는 설(1982년 간행된 <고줄고을 장흥>의 기사 내용)이 있다. 이에 대해 필자는 <장흥문화> 제27호(2005년간)에서, 비록 죽청(竹靑)에서 천관산의 목재로 전함을 제작함은 사실이나 여원연합군과 고려수군이 죽청에서 출진(出陣)한 바 없으니 발진지 수호차원에서 진서대장군장승을 세운 것은 더욱 아니므로 고려수군과 진서대장군은 전혀 무관하다, 그러므로 진서대장군을 세운 시기는 고려조 1349(충정왕 원년)~1388(우왕말년)까지의 약 40년 사이에 회주산성을 쌓았고, 그 성 쌓으면서 장승도 함께 세워진 것이라고 추정 기사를 기록한 바 있다.
이 시점에서 짚을 사안이 하나 있다. 박형상님은 필자가 ‘1966년 장흥지(병오지)’에 회주석문 석인기록을 부정한 것으로 오해한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필자의 가슴에 제일 와닿은 고증기록이라서 문화지 P.67에 상세히 다루었다. 즉 ‘회주석문(懷州石門) 고유문루(古有門樓) 지유양석인(只有兩石人)’이란 말에서, 얼마나 석장생이 마음깊이 새겨졌으면 회주 성문(城門)이 아니고 회주석문(懷州石門)이라며 ‘돌(石)’을 들먹여 글을 썼을까? 라고 썼다. 그러나 그 석인(石人)을 세운 지 무려 600년 후의 병오지의 기록을 갖고 필자가 너무 예민한 반응은 아닐 런지? 라고 제삼자의 비평을 미리 예방차원에서 썼던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가 고증자료의 첫째로 꼽은 것이 병오지다.
이제 진서(鎭西)에 관하여 이야기 하자, 진서의 사전(辭典)적 이야기는 박형상님과 같고, 같이 할 수 없는 진서의 주체, 진서의 진의, 진서의 명명(命名) 과정에 관하여는 필자와 생각의 차가 많아 여기에 밝힌다.
박형상님의 논리는 “1274년경은 ‘이른바 동정(東征:일본정벌)케치프레이즈시대’였으며, 이차동정 때는 고려정부 자체가 정동행성(行省)체제이었고, 고려왕은 정동행성의 부서장격에 불과했다. 결국은 서쪽의 고려땅은 동쪽의 일본땅 정벌을 위한 주력군의 본영인 셈이다. 그러므로 진서(鎭西)와 동정(東征)이 수레의 두 바퀴처럼 맞물렸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진서대장군, 석장승은 지리산쪽 목제를 변산쪽으로 수송하던 중간 길목 정도, 즉 대량의 목재와 군마를 집결, 수송시킴에 있어 그 집결지, 계표, 이정표 표시로 사람들이 바삐 오고 가는 길목에 혹 진서대장군 표지판이 필요했을 것이며, 외지에서 내려온 몽고 병들이나 개성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진서대장군 권위에 의지하는 현지표지판이 더 절실했을 법하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방촌 고개의 진서대장군은 고려수군이 세웠다는 의견인 것이다
사실상 협의(狹義)의 근시안적 견해로는, 마치 동정(東征)에 진서(鎭西)가 수레의 두 바퀴로서 안성맞춤의 그 시대에 걸맞게 대입(對入,代入)되는 어휘(語彙)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큰 실수의 허점(虛點)이 있다. 진서(鎭西)를 광의(廣義)적, 원시안적으로 한 번 짚고 살펴보자. 즉 장생(長生,長?)의 본래의 목적이 크게는 이정표, 산천성곽(城郭) 허실(虛失의 비보(裨補), 축귀(逐鬼), 재액(災厄), 홍역 두창 등의 예방이라고 볼 때, 천하대장군, 지하 여장군, 백두대장군, 한라여장군, 자주(自主) 동국수호대장군, 민주(民主)동국수호여장군, 동방축귀(逐鬼)대장군, 상원주(上元周)장군, 하원당(下元唐)장군, 방어(防禦)대장군 등 표지나 비보, 액막이를 의미하는 장승들이 수없이 많다,
그런데 옛날 중국황제[동진(東晋317~420),송(宋420~478,),제(齊479~502),양(梁502~557)]들이 우리나라 왕에게 봉했던 이름이 진동(鎭東)대장군, 정동(征東)대장군이다. 413년 동진(東晋)의 안제(安帝)가 고구려 장수왕께 정동(征東)장군을, 416년에는 백제 진지왕에게 진동(鎭東)장군을 봉했던 그 까닭이야 그 역사적 진실은 알 수 없다. 다만, 중화천자대국(中華天子大國)이라는 자존에서 동방 소국왕에게 정동(征東)이나 진동(鎭東)을 봉하여, 중국인 자신들 쪽에서는 정동(征東)도 되고, 진동(鎭東도 되고, 고구려나 백제왕 쪽에서도 동쪽나라를 점유해 지배하고 있는 장군(왕)으로 해석되어 이 명호들을 주고받은 왕들의 생각은 각각 달리 해석되면서도 별로 꺼리낌 없이 받아드릴 수 있음직 했을 것 같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나 박형상님의 진서(鎭西)에 데한 시각은 필자로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몽고 원나라의 힘에 못이겨 동정(東征;일본정벌)에 참여한 고려나 고려수군 스스로가 적국 일본을 동쪽의 주국(主國)으로 위상을 정립해두고 고려국을 그들의 서쪽나라 제 삼국으로 격하전락(格下轉落)시켜 진서(鎭西)라고 자칭 비하했어야 할 까닭이 도대체 무엇이라 설명할 것이며, 그 진서(鎭西)에서 무었을 어떻게 하자는 진서(鎭西)였을 것인가!
고려 스스로가 자기 나라를 자칭 일본 서쪽의 나라 진서(鎭西)라고 비하명명(卑下命名)까지 해가면서, 그 진서(鎭西)로 기껏 도로 표지석(標識石)이나 삼고, 출진지도 아닌 곳에 출진지 수호를 위하여 진서대장군이라고 각자(刻字)해서, 더더욱 전함제작지 죽청(竹靑)도 아니고 또한 그때는 회주산성도 없었는데 그 엉뚱하게도 방촌 고개에다 세웠단 말일까? 여기서도 천관산에서 죽청(竹靑)으로 목재운반의 도로 표지판이었을까 ? 반드시 해명 되어야 할 사안이 나닐 수 없다.
그때 고려 수군으로서 어느 뜻에서이던 표지석이 필요했다면, 엉뚱한 진서(鎭西)가 아니라, 가칭(假稱) 고려진수대장군(高麗鎭守大將軍)정도라도 각자(刻字)해 표지석(標識石)으로 세웠어야 당당한 고려 주권국의 수군(水軍)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죽청(竹靑) 을 출진지로 보았다면, 더더욱 고려진수대장군이라고 표지(標識)해야 출진지수호(守護)와 직결된 어휘도 되기 때문이다
또한 박형상님은 서쪽에서 건너왔다는 마마, 두창이 꼭 장흥과 남원지방에만 창궐한 것도 아닌데 왜 유독 장흥과 남원 두 곳에만 진서대장군이겠는가? 라고 반문하고 있다.
그 주장에도 동감이 된다. 그러나 독감(毒感)의 유행이나 (조류독감의 예) 홍역 등이 일시에 전국적 현상느오 일어나는 것은 흔치않는 현상임은 우리들은 체험으로 잘 알고 있다. 어느 곳에 괴질(怪疾)이 들어왔다면 옛날에도 예방책으로 먼저 그 고장의 출입 금지부터 했으니 장비(裝備) 시설, 예방약품은 지금에 비길 바가 아닐지언정 그때에도 최선을 다하여 괴질확산을 막았을 것이다.
이규경(李圭景 1788~?)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아동칙두신왈호귀마마우칭객지영남칭서신(我東則痘神曰胡鬼??又稱客至嶺南稱西神)”이란 글에서 천연두(天然痘)를 두신, 호귀 마마, 일부영남 지방에서 서신(西神)이라 불렀으니, 영남의 서쪽이 전라도 남원이며 장흥일 것이다.
위에서 중국의 황제들이 우리나라 왕들께 정동, 진동을 봉함과 마찬가지로, 역으로 중국황제를 진서대장군으로 호칭(봉)하여 그의 권위로 서신을 막아보자는 뜻으로 영남서쪽 남원운봉과 장흥에 세움은 너무 당연하지 않을까. 즉 우리나라를 동쪽 주국(主國)으로, 중국을 제삼국서쪽으로의 진서(鎭西)로 여겼음이 순리이며 사실이 아니겠는가? 현대 세균설(細菌說) 이전에는 괴질의 근원이 두신(痘神)서신(西神)임에랴.
필자는 방촌고개에 세운 진서대장군의 제일의(第一義)는 회주산성 서문(西門)의 허실비보(虛失裨補)로 보며, 마마의 액막이는 제이의(第二義)로 본 것이다. 박형상님의 전북 부안에 현존하는 진서면(鎭西面)은 1963년 산내면(山內面)의 진서 출장소였던 곳을 1983년 면으로 승격시킨 곳이니, 진서라는 지명이 비단 그 곳뿐이랴. 그러나 동쪽 일본을 주국(主國)으로 삼고 자칭 우리나라를 진서(鎭西)로 규정한 데서 나온 지명 호칭은 아니기를 바랄뿐이다.
또한 조선시대 평안도 평양에 두었던 진서위(鎭西衛)라는 토관(土官)의 서반직소(西班職所)를 두었다. 이는 조선의 서쪽에 있는 관아(官衙)의 뜻이다.
끝으로 백광홍(1522~1556) 선생님의 칠언절구 이야기를 하고 마무리하자.
“고성잔첩반등라(古城殘堞半藤蘿)옛 성남은 성가퀴 반 너머 덤불인데/오차여민유기가(烏次餘民有幾家)오차에 남은 백성 몇 집이나 되려는지/산악불붕강해활(山岳不崩江海闊)산악은 그대로요 강과바다 드넓은데/장생아욕문선아(長生我欲問仙娥)장생비결 선녀에게 물어보려 한다네”
백광홍 선생의 칠언절구를 감상하게 되어 매우 반갑다.
박형상님의 제4행의 해석이 “장생의 사연을 저 달(선아)에게 물어보려 한다네.” 가슴에 와 닿은 해석이다. 다시 말해서 필자 또한 저 달에게 장생네가 어느 때부터 이곳에 서 있느냐? 즉1274~1281년경이냐? 아니면 1349~1388년경이냐? 고 묻고 싶다.
그런데 거듭 밝히거니와 필자는 방촌 장승은 1349~1388년간에 회주산성 축성과 함께 세워졌음을 굳게 믿는다. 그러므로 장흥문화 제27호 기사의 그 초심(初心)에는 변함이 없다. 칠언절구 장생이 수명이 아닌 장생(장승)으로 보았으니, 사족(蛇足)을 붙인다면 烏次(757 이전)때부터 서 있었다면, 절구 제2행과 맞아떨어져 더더욱 많은 것들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
야은(冶隱) 길재(吉再1353~1419) 선생의 고시조 즉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도라 드니/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데없다/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의 고시조가 연상되는 칠언절구이다.
평소에 장흥에 관한 옥고를 많이 기고하신 박형상님을 좋아하게 되었다. 장흥사랑의 글을 제일 많이 쓰신 분으로 내 뇌리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진서대장군 관계 시론(試論)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게 해 주었다. 감사드리고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필자소신을 밝혔다. 기탄(忌憚)없는 질정(叱正)과 장흥사랑의 건필을 바란다.<2007.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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