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곡 선생에 대한 오해 한 가지


반곡 정경달(盤谷 丁景達,1542∼1662). 장흥군 장동면 반산리에서 태생으로 벼슬이 통정대부에 이르렀던 장흥출신 위인이다. 임진란이 시작될 즈음 경상도 선산군수로 봉직하며 군사를 모아 경북 금오산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던 의병장으로 후에는 이충무공 휘하에서 많은 왜구와 싸웠고, <난중일기>를 남겼다.

육전의 <남중일기>로 불려지는 반곡의 <난중일기> 에 대해 다산 정약용은, 실록으로서 가치가 커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이나 백사 이항복의 <임진록>보다 낫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올해로 반곡선생 서거 406주년이 된다. 그리고 임진란이 일어난 지 445년째이다.

최근 들어 이순신에 대한 조명운동이 활발해지고 이순신 일대기에 대한 책들이 많이 발행되고 있다. 그리고 이순신의 수하들을 소개하는 장면에는 필히 반곡 정경달에에 대한 기록도 뒤따른다.

그런데 일부 책자에서는 반곡 선생에 대한 기록이 잘못되고 있어 아쉽기 그지없다.

<내게는 아직도 배가 열두 척이 있습니다>(김종대/북포스/2004.6.15 간), <중학생이 보는 난중일기>(성낙수외/신원문화사/2002.7.30 간), <충무공 이순신 전집 1>(최두환주역/우석출판사/1999.04.28 간), <칼의 노래1,2>(김훈/생각의나무/2003.12.08간) 등의 책에서 한결같이 장흥출신의 반곡을 ‘영광사람’으로 잘못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반곡의 본관이 '영광'이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빚어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학자들이나 유명 작가들이 본관과 출신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역사를 기술했다는 데서 매우 실망스럽다.


■소설 ‘칼의 노래’의 오류


특히, 사서류와 달리 소설로 각색해‘동인 문학상(2001년)’의 수상작이 되고 베스트셀러가 된 <칼의 노래>에서 반곡선생과 관련된 기록은 더욱 실망적이다. 작가 김훈은 이 소설을 이순신과 관련된 기록 등 기존의 드러난 궤적을 다큐멘터리식으로 복원하여 현실성을 부여하며 한 권의 소설로 작품화 했다.

이 소설 부록의‘인물지’에서 작가는 정경달에 대해 “정경달- 영광사람이다. 젊어서 문과에 급제했다.…1595년 이순신은 임금에게 요청하여 정경달을 자신의 종사관으로 맞아들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정경달을‘영광사람’이라고 오기한 것은 큰 잘못이다. 이뿐이 아니다.

실제 소설에서는 종사관으로 정경달이라는 이름 대신 ‘김수철'이 등장한다. 1권 '바람 속 무싹' '내 안의 죽음'에 나온 ‘종사관 김수철’의 행적이 문관 출신으로 김성일 막하에서 금오산에서 이긴 일, 이순신 장군이 하옥 될 때 서울까지 와서 임금을 대면하며 탄원한 일 등 ‘이순신 종사관 정경달’과 일치, 정경달을 김수철이라는 인물로 내세웠음을 알게 해준다.

물론 소설이므로, 이름 정도야 허명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해도, 정경달을 대신한 사람으로 김수철을 등장시켰다면, 조금은 실제 인물과 닮아야 하는데, 전혀 다르다.

즉 소설에서 반곡을 대신한 종사관 김수철에 대해 “…김수철은 곡성의 문관이었는데 임진년에는 의병장 김성일 막하에 들어가 금오산에서 이겼다. 예민하고 담대한 청년이었다. 문광이 반듯하고 행동이 민첩했다…”고 기록, 실제 인물인 정경달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반곡은 이순신보다 나이가 두 살 많았고(이순신은 당시 50세, 반곡은 52세), 문관으로 이순신에 비해 결코 지위가 낮지 않았다. 물론 이순신을 만난 뒤 수하의 한 사람으로 적극적으로 협조하지만, <칼의 노래>에서처럼‘청년 종사관’은 아니었던 것이다.


■정약용과 정수칠, 그리고 정경달


정조가 죽은 1801년, 당시 그의 나이 40이었을 때 다산 정약용은 정적들에 의해 사지에 몰렸지만 겨우 목숨을 건져 18년간의 긴 유배생활에 들어간다.

강진에서 유배동안 다산은 자신의 운명에 결코 좌절하지 않고 시대의 아픔을 학문적 업적으로 승화시켰 경학과 경세학 등 여러 방면의 학문연구에 힘써서 500권이 넘는 책을 저술하게 된다. 특히 다산초당에서의 후반기 유배생활 10년은 어찌보면, 유배살이라기보다는 은자로서의 여유와 넉넉함이 가득했던 삶이자 우뚝솟은 학문적 대업을 성취한 생의 절정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유배생활동안 다산은 다산초당을 중심으로 많은 시문을 남겼지만, 바로 이웃고을인 장흥에 대해서나 그리고 장흥사람들에 대해 어록을 남기는 일은 별로 없다. 바로 앞선 시대에, 이웃고을인 장흥에서 살았던 실학자 존재 위백규에 대해서도 일언반구 없었다.

존재 위백규(1727-1798)는 다산(1762-1836)보다 35년 앞선 사람이다. 존재 역시 실학의 전성시대에 이재 황윤석(이齋 黃胤錫. 1729~1791), 규남 하백원(圭南 河百源. 1781-1844)과 함께 ‘호남 실학의 3걸’로 불리어지며,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 -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1527-1572) - 손재 박광일(遜齋 朴光一. 1655~1723)의 뒤를 이은 인물로 지목될 만큼 학문적 명성이 높았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존재 선생에 대해 몇 마디 하고도 남았을 법한데도 단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다만, 장흥사람 중에 유일하게 반곡 정경달에 대한 글을 남겼을 뿐이다. 그는 ‘반곡 정공의 난중일기에 제함[題盤谷丁公亂中日記]’이라는 글을 통해, 반곡의 <난중일기>는 실록의 중요성으로 인해 국정일기나 다름없는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이나 백사 이항복의 <임진록> 못지않게, 아니 그것들보다 더 중요하다면서 그 가치를 서애나 백사의 저박물에 견주어 높게 평가한 것이다.


■다산의 반곡의 난중일기에 대한 평가


다산이 반곡의 <난중일기>를 대한 것은 정수칠로부터였다.

반산(盤山) 정수칠(丁修七.자 乃則)은 반곡의 후손으로, 반곡으로부터 200여년 후대의 사람이다. 그는 당대 장흥(지금의 장동면 반산리)에서 살았고, 당시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다산 정약용(1762~1836)과 교분이 있었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된 지 15년이 지난 1816년, 정수칠은 그의 재종제 수항(修恒)과 반곡의 <난중일기> 구본과 신본을 가지고 찾아가 <난중일기>를 산정(算定)해줄 것을 부탁했고, 다산은 기꺼히 그 일을 승락했다고 한다.

실제로 지난 1985년 발간된 국역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도 ‘반산(盤山) 정수칠(丁修七)에게 주는 말’ ‘또 정수칠에게 주는 말’ ‘반산 정수칠에게 보냄’ 등의 글이 나온다.

여기서 ‘반산(盤山) 정수칠(丁修七)에게 주는 말’(다산시문집 제17권/증언贈言)과 ‘또 정수칠에게 주는 말’(다산시문집 제17권/증언贈言)은 선비로서 지켜야 할 도리, 학문의 길, 선비로서 읽어야 할 도서들을 알려주는 형태의 글, 즉 학문의 대가인 다산이 후학인 시골선비 정수칠에게 친절하게 가르치고 교훈을 주는 내용으로, 다산의 사상이 잘 드러나 있는 글로 곧잘 인용되기도 한다.

그러나‘반산(盤山) 정수칠(丁修七)에게 보냄’(다산시문집 제19권/서書)에는, 정수칠이 그의 선대 정경달(丁景達)의 문집과 가승(家乘)을 보내 서문을 부탁한 일이 있었고, 다산은 기꺼이 서문을 지어주었으며, 또 후일에 정수칠이 다시 임진왜란 당시 정경달의 의병관련 사실을 적은 기록을 다산에게 보내 글을 부탁하니, 이에 대해 다산이 답신을 보낸 내용이 구체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다산이 반곡 선생을 보는 시각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다산은 '반산 정수칠에게 보냄’이란 글 서두에서 “…덕문(德門-덕행이 있는 집안이라는 뜻으로, 남의 집안을 높여 부르는 말)의 선사(先事)에 대해서는 개연히 탄식하고 깊이 생각한 지가 오래였으므로 차마 끝내 침묵만을 지킬 수가 없어 몇 마디 말로써 어리석은 나의 소견을 피력하니…지난 임자년 겨울에 백승(伯昇) 족하가 명례방(明禮坊)으로 나를 찾아와서 선대부(先大夫) 홍문제학(弘文提學) 반곡공(盤谷公)의 유집(遺集) 두 권과 가승(家乘) 한 권을 보여 주시며 외람스럽게도 나에게 서문(序文)을 부탁하셨으므로 나는 참람함도 잊고 이미 서문을 지었습니다. 이 세 권의 책이 아직도 나의 집에 있는데 많은 풍상을 겪고도 다행히 별탈이 없습니다. 지금 백승이 이미 죽었으니 이 서적을 다시 찾아가실 듯하여 다산(茶山)으로 가지고 와서 고요한 밤에 읽어본 것이 여러 번이었습니다.…”라고 적어 반곡의 유집을 여러 번 숙독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나서 반곡 관련 책의 내용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 잘못된 기록들을 다섯가지로 나누어 조목조목 지적하고, 특히 선대를 높이고자 하는 의욕이 과잉되어 전후 사실을 확인하지도 않고 여기저기서 근거없이 가져다 붙인 내용들에 대해 꼼짝못할 논거를 들이대며 기록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산은, 이러한 선대에 대한 왜곡은 진정한 의미에서 선대를 위하는 일이 아니고, 도리어 후세로 하여금 선대의 사적을 의심하여 믿을 수 없게 만드는 일이라고 통박하고, 이어진 글에서‘정경달이 남긴 일기를 보면, 전후의 상황이 역록과 조금도 차이가 없고 한 점의 거짓이나 착오가 없는데, 후손들이 왜 이런 믿을 만한 기록은 외면하고 말도 안 되는 말을 취해 지극한 보배로 받드는 지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다산은 정경달의 <반곡일기(盤谷日記)>를 간행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후 다산이‘반곡 정공의 난중일기에 제함[題盤谷丁公亂中日記]’이라는 글을 따로 지어주기에 이른데 이는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었을 듯 싶다.


■‘반곡 정공의 난중일기에 제함(題盤谷丁公亂中日記)’


반곡 정경달((盤谷丁景達,1542∼1662)과 다산 장약용(1762~1836) 사이에는 220년이라는 세월이 가로놓여 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조금의 인연이 있다. 반곡은 장흥사람이었고 다산은 이웃 고을인 강진에서 18년 유배생활을 하던 후인이었다. 또 반곡의 후손들(장수칠, 정수항 등)과 교분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저런 연유로 다산은 <반곡일기>들을 수차 숙독하기도 했고, <반곡일기>의 가치를 크게 평가하는 글을 남기기도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반곡 정공의 난중일기에 제함(題盤谷丁公亂中日記])(다산시문집 제14권/제題)’이다.

이 글에서 다산은“정경달이 당시 낮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분수를 지켜, 하고싶은 말을 하지 못한 유분(幽憤)을 글에다 펼쳐 후세에 시행되기를 바라는 고심(苦心)을 적은 것이 이‘난중일기’라”고 지적하면서 이 자료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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