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말, 국정을 좌지우지했던 서태후가 복원한 세문화유산 이화원

곳곳에 서태후 ‘절대권위’흔적 남겨 - 지금 중국인 절대사랑 받아


천단에서 이화원(颐和园)으로 옮긴다.

가이드는 이화원으로 가는 도중, 끊임없이 이화원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는다.

서태후의 여름별장으로 유명한 이화원은 피서산장-졸정원-유원과 함께 꼽히는 중국의 4대 정원으로 피서산장과 함께 청나라 왕실전용 정원이었다,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서태후가 산책을 즐겼던 중국 정원 중에서 가장 긴 728m의 장랑이 있다, 항주 서호를 보고 감동받았던 서태후가 서호를 모방해서 만든 곤명호昆明湖)가 있다, 곤명호를 만들기 위해 판 흙으로 쌓은 거산 만수산이 있다, 이화원은 1860년 제2차 아편전쟁이 일어났을 때 영불英佛 연합군에 의해 거의 파괴되었던 것을 서태후가 해군의 군함 건조비 3천만량을 유용해 재건하였다, 이로 인해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지게 됐다, 서태후는 곤명호 버드나무 새싹이 날 때부터 잎이 질 때까지 이화원에 머무르며 정무를 살필 정도로 이화원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다는 등등이 가이드가 읊은 내용들이다.

가이드의 개략적인 설명을 귓가에 흘려듣는 동안 내내 서태후라는 여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언제인가 읽었던 펄벅의 <연인 서태후>를 통해 새롭게 이해했던 서태후의 일생도 생각한다.

◀서태후의 초상화
펄벅은 이 소설에서 청조 말기에 한편에서는 ‘악녀의 화신’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시대의 등불’로 모순된 평판을 누려온 '꽃과 칼날의 여인'이었던 서태후의 일생을 추적했다. 그리고 역사적 서술에서 배제돼 온 서태후의 사랑과 인간적인 면모 등을 과감히파고들어 전인적 인간으로서 서태후의 새로운 얼굴을 그녀의 독특하고 유연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이를테면 펄벅은, 서태후가 자금성으로 들어오기 전 정혼자였던 황실 경비대장 영록에 대해 이루지 못한 사랑도 그리고 또 영록에 대한 연모를 숨긴 채 혹독한 권력의 실권자로 부상해야 했던 권력 지향의 여인으로서 고독했던 삶도 동시에 그리고 있다.

또, 당시 혁명론자나 근대화를 갈구하던 사람들은 서태후를 격렬하게 증오했지만, 농부들이나 소읍에 사는 사람들은 서태후를 경외했다든지, 하는 내용을 통해서 중국 역사에서 악의 형상으로 묘사됐던 서태후를 가장 인간적이고 여성다운 표본으로서 부활시키고 있다.

펄벅의 소설 속에서 서태후는 이처럼 한 여성으로 부활하고 있지만, 과연 실제적으로 서태후가 그런 여성이었을까. 펄벅처럼, 그리고 지금의 그녀에게 사랑을 베풀고 있는 중국인들처럼 인간적인 풍모로서 서태후를 볼 수 있지만, 역사 속에서의 그녀는 여전히 악의 화신에 다름 아니다, 서태후가 복원한 이화원이 좋은 본보기다.

펄벅의 소설 <연인 서태후>

서태후는 외세의 침입으로 환란을 겪던 시기인 청조 말 함풍제의 후궁으로 간택돼 자금성으로 입성, 동치제를 낳는다. 함풍제 사후 동치제가 6살에 즉위하자 공친황과 공모, 쿠데타로 반대파를 일소하고 모후로서 동태후(황후)와 함께 섭정한다.

동치제가 죽자(1875년) 누이동생의 아들을 옹립, 광서제로 즉위시켜 계속 섭정했다. 광서제가 계속된 섭정에 반발해 입헌파 캉유웨이에 접근, 입헌군주제의 전환을 꾀하자(1898년) 보수파 관료를 부추겨 쿠데타를 감행, 광서제를 유폐하는 무술정변을 일으킨다.

의화단의 반제국주의 투쟁이 고조되자 이를 이용해 열강에 선전포고했지만 8개국 연합군의 침입을 받아 시안으로 피신했다. 청왕조의 권위실추와 함께 혁명, 입헌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서태후도 광서제가 죽은 지 하루만에 죽는다.

이처럼 이화원은 절대 권력을 누리고, 그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무모할 정도로 국정을 난도질한 악의 화신이나 다름없던 서태후의 흔적을 곳곳에 남기고 있다. 인공호수 곤명호가 대표적인 예이다.

날씨는 잔뜩 흐리고 안개마저 자욱하다. 기온조차 옷깃을 여미게 한다. 그렇지만, 이화원의 아름답고 화려한 조경과 건축술은 추위도 가시게 만든다.

이화원의 넓이는 290.8㏊로 북경시내 여러 공원 중 가장 넓다고 한다. 15년에 걸친 대공역 끝에 완성했다는, 전체 면적의 75%를 차지한다는 220㏊의 인공호수인 곤명호를 보고, 그리고 이곳에서 파낸 돌과 흙으로 그 옆에 자리한 인공산을 만들었다는 만수산을 보면서 생각되는 것은, 기계문명이 발달되지 않았던 그 시대에 더구나 국정이 혼란스럽고 민심은 극도로 피폐했었을 그 시대에, 과연 인간이 할 수 있었던 일이었는가를 새삼 곱씹어 본다.


이화원의 곤명호

이러니하게도, 절대권력의 뒤에는 때로 이처럼 아름다움이 피어나기도 한다. 공원 안 도처에 자리한 무려 3천여 칸에 달한다는 다양한 전각과 누각, 정자들에 담긴 뛰어난 건축미학, 그리고 호수와 숲과 나무와 정원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는 조경은 도저히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졌다고 믿겨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당대 최건축술과 조경미학으로 만들어낸 중국 고전원림의 최고봉이라 할만하다.

이화원 동궁문을 들어서니 청말 격변의 정세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수전仁壽殿이 나타난다. 서태후와 그녀가 옹립한 황제 광서제가 외국사신을 접견하며 정무를 살피던 곳이다. 인수전 문 앞에는 청동상의 봉황과 용이 앉아있다.

용은 황제를 봉황은 왕후를 상징한다. 해서 자금성에도 문 쪽에는 용을, 그 옆으로 봉황을 세워놓았다. 그런데 이곳 인수전 앞에는 그 위치가 뒤바꿔져 있다. 이곳을 찾는 관리나 사신들에게 ‘청국의 실권자는 황제가 아니라 나 서태후다’ 는 것을 은연중에 과시하려 했던 것으로 읽혀진다.


인수전 앞 청동상의 봉황과 용의 순서가 바꿔져 있다.

곤명호를 옆에 끼고 늘어서 있어 곤명호를 관조하며 거닐 수 있는, 728m의 장랑이 이어진다. 장랑 복도 천정에는 역사적 인물이나 서유기와 같은 민담, 산수화 등 총 1만 4000여 점의 채색화가 화려하게 그려져 있어 화랑(花廊)이라고도 부른다. 무엇이건 만드는 것마다 명품으로 만들려는, 세계최고의 것으로 만들려는 중국인의 자존과 그 의지가 잘 드러난 모습이다.


배운전 입구

배운전排雲殿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배운문 앞에서 몇 장 사진을 찍고 발길을 돌린다. ‘배운’이란 진나라 곽박의 유선시遊仙詩 중에서 ‘신선배운출 단견금은대 神仙排雲出 但見金銀臺’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목조 불전의 불향각佛香閣, 그리고 만수산으로도 갈 수 있을 터인데 이곳에서 그만 시간에 쫒겨 발길을 돌려야 한단다. 끝내 아쉬운 발길을 돌리고 만다. 이화원을 대충으로 둘러본다 해도 이틀이 소요된단다. 우리에게 관광시간은 불과 두어 시간 남짓. 패키지 여행은 이래서 때로 불편하기도 하다.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