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상/본지 논설위원. 변호사

장흥군지(1990년)는 ‘1915년, 장흥읍 교회, 조하파 목사’라고 기록하고 있다. 1975년판 장흥향토지리지도 그렇게 되어있다. 반면에 안양, 회진, 대덕등은 서로 다르게 주장하고 있다.

안양면지(1998년)는‘1901년, 지천지역(지천교회), 맹현리 선교사설’을, 대덕읍지(1996년)는 ‘1905년, 도청지역(이낙서씨 회집), 도청교회설’을, 명덕향토사(1995년)는‘1906년, 명덕지역(구성숙씨 회집), 1910년, 명덕예배당설’을, 각각 제시하고 있다.

이런 논란에 관계없이, 이청준 선생님은‘사학의 역사와 긍지’라는 글에서‘남해안 마을 진목리에서 한 세기만에 34명의 목사가 배출되었다”고 말하며 '1906년, 진목교회’를 언급하셨다.(조선,2006,1,27,문화칼럼)

그렇다면 과연 우리 장흥 땅에 기독교가 최초 전래된 시기는 언제일까? (물론 '최초 전래시기'와 '최초 교회설립'에는 얼마간 시차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1900년경 초기의 주변 사정을 살펴보자.

1905년부터 천도교 명칭이 사용되었는데, 1906년에는 장흥읍 남외리에 ‘천도교 포교당’이 들어 섰다. 1907년에 ‘기독교 평양대부흥회’가 있었고, 1911년에는 ‘천주교 대구교구’가 탄생하였다.

한편, 기독교선교사(史)에 의하면, 호남지방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루트'에 따라‘인천,군산,목포,여수’를 잇는 도서지역 인근중심으로 그 선교가 이루어졌다. '나주,광주'등 내륙지역 선교도 있었으며,‘1896년, 나주 선교리’가 그 최초라 한다. 도서해안지역 선교로는 ‘1898년, 목포 양동교회’가 최초라 한다. 그 후 '1902년, 해남 우수영교회' '1912년, 순천 선교기지'로 연결된다. (천주교 경우,장흥은 1962년에야 '강진천주교회 장흥공소' 로 출발한다. 강진천주교회 공소는 1956년에, 보성천주교회 공소는 1939년에 시작되었다)

먼저, 안양면 지천교회쪽의‘맹현리 선교사’부터 알아보자.
'맹현리'라는 분은 미국 남장로교회 목포지역 선교부의 대표적 인물이었던,‘매칼리(McCallie, H, Douglas) 선교사’를 말한다.
그는 1907년에 내한하여, 1909년에 거문도 포교를 하였고, 전라도 도서지역선교에 관한 <1910년 보고서>를 남겼다한다.

그러니‘맹현리 선교사’가 안양 지천지역에 선교를 왔던 사정만큼은‘맹현리 선교사의 선교활동범위, 목포-여수간의 해양교통경로, 지천포(삼십포)와 거문도의 교역사정 등’을 보아 분명할 터이지만, 그렇다하여도‘이른바 1901년설’을 바로 취하기는 곤란하다.

앞서 말한 대로 그가 1907년에 내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901년 선교기록이 6,25때 소실되어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는 지천교회 측 설명에는 무언가 착오가 있다. 인근 보성해안지역엔 '득량면 오봉리 교회'가 1919년에 최초로 설립되고 있다.

다음, 대덕, 회진, 덕도쪽에 대해서 알아보자.
‘조선 예수교장로사기(史記)는‘1905년, 장흥 도청리’‘1906년, 장흥 진목리, 삭금리, 대리’라고 기록하고 있다.(한무규 교수 논문 재인용) 이런 내용은 이청준 선생님의 칼럼과도 맞아 떨어진다.

다른 한편으로, “장흥군 도청, 삭금에서 기독신앙을 받아들여 1904년에 완도 관산교회를 최초 설립하였다’라는 완도쪽 사정에 관한 기록이 있다. 위와 같은 제반사정에 비추어 필자 생각은 이러하다.

첫째,장흥지역 최초 교회로 ‘장흥군지의 1915년 장흥 읍교회설’,‘안양면지의 1901년 지천교회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둘째, 그들 관련된 교회들의 1차자료를 직접 확인해보지는 못했지만, 대덕,회진,명덕(덕도)쪽이 최초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예수교장로사기등에 우선 비추어보면, 최초전래 시점으로는 ‘1905년 도청지역’, 최초 교회를 기준하면 '1905년 도청교회' 또는 ‘1906년 진목교회,삭금교회’가 될 것 이다. (이들 교회의 설립연혁에 관한 전후사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회진, 대덕 등 장흥의 남해안지역도 아마‘미국 남장로회’의 ‘목포-여수(순천)간 포교정책’연장선에 맞닿았을 것이다.

셋째, 그때 당시의 장흥지역에 관한, '선교지 전단이나 원로교역자의 회고록, 기타 사료들'을 문헌기록적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수집할 필요가 있다.
넷째, 장차에는 관련당사자들의 참여, 토론, 공동조사 등에 터잡아, 장흥군지 등을 좀 더 신중하게 재정리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인접지역 강진, 보성 쪽과도 비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강진은 '1906년,강진 서산리교회' '1913년, 강진 읍교회'라고 한다.

(이 글에도 '직접적인 현장확인조사, 기독교사료등 1차문헌확인을 못한 점'에 그 한계가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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