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당초 627m봉 일림산을 664m봉으로 옮겨 등산로 개발
장흥 "본래 이름 삼비산을 찾아주고 싶을 뿐"

등산객이 ‘일림산’ 정상 남쪽 8부능선 쯤으로 굴러 떨어졌다. 한동안 실신해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그는 몸을 움직일 수 없어 긴급하게 119에 구조를 요청했다. 일림산 정상에 있는 착륙장을 활용할 수 있어 119구조대는 헬기를 타고 출동했다. 그러나 등산객은 보이지 않는다. 남쪽 뿐만 아니라 북쪽까지 수색해 봤지만 등산객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가상으로 설정해본 상황이다. 등산객이 일림산 위치를 잘못 알았거나, 헬기가 일림산이 아닌 곳에 착륙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둘 다 아니다. 등산객도 구조대 헬기 조종사도 일림산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다만 그들이 알고 있는 ‘일림산’이 달랐을 뿐이다. 등산객은 보성군이 개설한 등산로 이정표대로 정상에 올랐고, 구조대는 국립지리원이 간행한 ‘공식’지도를 안내 삼아 일림산 정상으로 접근했다. 지도상의 표기와 현장의 이정표가 달랐던 것이다.

▲2001년 보성군이 세운 일림산 664.2m 표지석(왼쪽)과 최근 장흥군 안양면 주민들이 표지석을 넘어 뜨리고 세운 삼비산 푯말.

보성군 웅치면 용추계곡 주차장. 일림산 등반로를 알리는 대형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주변 산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안내도에는 ‘일림산 664m 2km 40분’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지도를 폈다. 1/2만5000·1/5만·행정·군용 지도 모두 펼쳐봤지만 일림산의 높이는 664m가 아니라 627m(정확히 말하면 626.8m)이다. 위치도 다르다. 주차장 안내도를 자세히 살펴보니 627m 봉우리 하나가 이름없이 표시되어 있다. 거기가 일림산이다. 실제로 보성군 관광홍보책자에 보면 627m 고지가 일림산으로 표시되어 있다. 서로 다른 두개의 봉우리를 하나의 산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셈이다.

“문화관광은 과거를 근거로 해서 새로 생성시킨 부분이 많다. 회령(지금의 보성군 회천면) 북쪽에 일림산이 있다는 옛문헌이 있는데 627m봉우리를 정확히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국립지리원이 지도상에 표기할 때 그런 것뿐이다. 그래서 보성군이 다향제와 일림산 철쭉제를 연계시키면서 회령북쪽 산의 흐름 중 가장 높은 봉우리인 664m를 기점으로 일림산 등반로를 개설했다.”


▲군용지도를 비롯한 공식 지도는 627m 봉우리를 일림산으로 표기하고 있고, 664m 봉우리는 이름이 없다. 산악잡지 등의 지도는 일림산 627m, 삼비산 664m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

보성군 관관진흥계 이영춘씨의 말이다. 그러나 이씨의 이 같은 발언은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조선의 홍길동을 장성의 홍길동으로 만들어 버려도 ‘적당히’통하는 관광사업과는 차원이 다른, 국가에서 엄정하게 관리하는 ‘지도’의 도면은 쉽게 바꿀 수 없다는 주장이다. 전남대 이정록 교수(지리학과)는 “이 경우는 전국지명위원회의 승인을 얻어야 하는 전남도(광역지자체) 사업인데 그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것이 우선적인 잘못”이라고 말하고 “지명위원회에 요청한다 해도 산의 이름을 바꾸는 문제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편 고문서가 ‘회령북쪽’이라고 지시한 산에는 664m 봉우리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인근 장흥지역 사람들의 주장이다. 사실 확인을 위해 보성군 웅치면·회천면, 장흥군 안양면 일대 도로를 주행하며 ‘회령북쪽 산’의 의미를 추적해보았다. 웅치면·회천면 쪽에서는 664m 봉우리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산의 이름이라는 것이 현지 원주민들의 시계(視界)에 들어온 산에 붙여지고 그것이 나중에 국가기관의 조사에 의해 지도상으로 반영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회령북쪽 산’은 정확히 627m 봉우리의 산을 의미한 것으로 해석된다. 보성군 회천면 전일리 토박이인 정한용(54)씨에게 물으니 지도상의 일림산을 정확히 가르켰다.


▲664m 봉우리를 일림산이라고 표기한 보성군 웅치면 용추계곡 주차장 등산 안내도. 이 봉우리를 장흥군 쪽에서는 삼비산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산을 옮겨 버리는’ 보성군의 사업에 맨 처음 문제를 제기한 이영돈(46·장흥군농업기술센터)씨는 “재난구조, 군사작전, 산불예방 등의 차원에서 등산로는 정확히 공식지도에 근거해 안내되어야 한다”며 “실제로 율포(보성)와 수문(장흥) 인근의 득량만 해안선은 세번이나 간첩이 출몰했던 곳이다”고 강조했다. 헬기가 뜨거나 포를 발사하거나 수색을 할 때 ‘일림산’은 도대체 어느 일림산이냐는 질문이다.

▼보성군이 펴낸 관광안내책자에서는 일림산을 627m로 표기하고 있다. 위쪽 안내도 왼편 이름이 없는 627m 봉우리가 '진짜' 일림산이다.
이에 대해 보성군 관광진흥계 이영춘씨는 “봉우리 사이 거리가 짧아서 별 문제 없을 것으로 안다”고 짧게 대답했다. 이씨는 또한 “장흥군이 보성군에 그런 문제를 제기하는데, 함께 일림산이라고 표기하고 공유하면 좋지 않느냐”는 의견을 내 놓았다. 이씨는 산 표기의 중요성보다 지자체 간의 경쟁문제로 ‘일림산’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었다.


▲'실제 일림산' 정상 부군에 세워진 이정표.일림산에 서서 일림산이 1.7km 남았다는 이정표를 보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확인해본 결과 지도상의 일림산과 보성군이 일림산이라고 주장하는 664m 봉우리 사이의 거리는 1.7 km였다. 평지도 아닌 산 능선 1.7km를 과연 짧은 거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장흥군 쪽에서는 문제의 본질이 지자체간 경쟁이 아니라고 거듭 강조했다. 장흥군 공보과 엄길섭씨는 “일림산 철쭉제 구간에 일부 장흥땅이 포함되어 있지만 전혀 문제제기 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지리산으로 치면 노고단을 토끼봉이라고 해버리는 것과 같다. 우리는 산의 본래 이름을 찾아주고 싶을 뿐이다”고 주장했다.

보성군의 대표축제인 다향제는 지난해부터 일림산 철쭉제를 패키지로 묶었다. 이를 위해 2001년부터 보성군은 공공근로를 동원해 대대적인 일림산 등산로 개발에 나섰고, 관광안내 책자와 군 홍보 자료 등을 통해 일림산과 철쭉을 소개했다. 과연 등산로는 말끔하게 잘 정비되어 있었다. 두세갈래로 나눠진 길목마다 ‘일림산 ○○km’하는 식으로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정표는 모두 664m 봉우리를 기준으로 세워졌다.


▲회천면 주민이 가르키고 있는 일림산은 627m 봉우리였다.

664m 봉우리에 가면 일림산철쭉제 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일림산 664m’라고 표기해 놓은, 사람 키보다 약간 작은 화강암 표지석도 세워졌었는데 금년 6월 중순경 장흥군 안양면 주민들이 넘어뜨리고 ‘삼비산’이라는 푯말을 세웠다. 보성군측이 일림산이라고 ‘억지 표시’를 해 놓은 곳은 장흥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삼비산이라고 불렀던 곳이다.『장흥군 안양면지』 『장흥군지』를 비롯한 여러 간행물에도 삼비산(三妃山)이라는 표기를 쉽게 만날 수 있다. 다만 이 산은 국립지리원의 조사에서 빠져 공식적인 이름이 붙어있지 않았을 뿐이다.

축제의 ‘스케일’을 확보하기 위해 산의 이름을 바꾸는, 혹은 옛산을 버리고 새 산을 취하는 행위는 과연 정당한 것일까. 보성군의 적절한 답변이 요구된다.
<전라도닷컴 2003-06-26.이정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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