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특집/ 아, 삼비산(3) - 삼비산 칼럼 모음
김선욱기자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07.02.19  22:36:38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삼비산아,삼비산아

안양면 신촌리 동북 쪽의 삼비산(664.2m)이 보성의 일림산으로 둔갑, 장흥산악인들이 국립지리원에 진정서 제출을 준비하는 한편 군민 서명작업을 벌리는 등 '삼비산 되찾기 운동'에 적극 나서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삼비산이 보성의 일림산(日林山)으로 둔갑된 일이 밝혀진 것은 지난 3월 2일 월간「사람과 산」김흥주기자 등 일행이 삼비산 취재차 장흥에 내려왔을 때, 이들 산행을 삼비산으로 안내한 장흥산악회원들에 의해서였다. 이날 산비산 산행에는 「사람과 산」의 구경모기자와 정정원 사진부기자, 그리고 장흥산악회에서는 이영돈부회장을 비롯 이희찬 전회장, 엄길섭·조규석씨 5명이었다.
이날 이들은 삼비산 정상에서 최근에 세워진 듯한 '일림산 66.2 보성군'이라는 자연석 표지석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보성군에서 삼비산 정상을 일림산 정상으로 만들고 이를 증거로 표지석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보성 사람들이 말하는 일림산은 삼비산 정상에서 동북쪽으로 이어진 능선을 따라 15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의 산봉리(제2봉)로 높이 626.8m 산정이다.
장흥군과 보성군의 경계는 삼비산 정상부를 지나고, 일림산은 보성군 회천면과 웅치면 접점지역에 위치한다. 실제로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한 5만분의 1지도에는 보성군 웅치면과 회천면 경계의 6.25.8봉을 일림산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국내 대부분의 지도들도 국립지리원의 이 지도를 기준으로 동일하게 표기하고 있다. 다만, 1/25,000 지도만 삼비산 정상부위인 664.2봉을 일림산으로 표기, 다소 혼동을 주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안양면 신촌리나 학송, 장수리에서는 옛부터 664.2봉을 삼비산, 샘비산으로 불려왔고 많은 장흥사람들도 장흥의 삼비산으로 알아왔던 것인데, 졸지에 보성군에서 엉뚱하게 이 산을 자기네 산인 일림산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같은 원인은 장흥군에서는 다른 명산들이 많은 장흥군에서는 삼비산 정도는 관심 밖으로 내쳐놓은 반면, 보성군에서는 수년 전부터 삼비산의 일림산화 운동을 펼치면서 2001년부터는 5월에 제1회 철쭉제를 이곳에서 개최하고, 이곳 산을 명산화하여 율포 녹차탕과 연계된 관광루트로 개발하기 위해 표지석도 없이 내팽개쳐져 있는 삼비산을 보성의 일림산으로 만들었고, 이곳 일대의 등산로를 정비하는 등 집중적인 투자를 해온 데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결과, 전남도내 거의 모든 홍보책자 등에 제암산이 '보성의 진산 제암산'으로 소개되고 있듯이 장흥군의 삼비산도 보성의 일림산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을 확인한 장흥산악회에서는 장흥의 삼비산을 되찾아야 한다는 방침으로 군민 서명운동작업에 들어간 한편 법적 절차를 통한 국립지리원 발간의 모든 지도에 664.2봉 삼비산 표기 진정서 보내가, 삼비산 정상에 표지석 세우기, 삼비산 홍보와 등산로 개설 등 일체의 '삼비산 되찾기 운동'을 범군민운동으로 펼친다는 방침이어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장흥군 안양면과 보성군 웅치면의 경계에 솟아있는 삼비산은 진달래의 명산으로 잘 알려진 백두대간의 영취산(여수시, 510m)에서 갈라진 호남정백이 남으로 달리다가 제암산, 사자산에 이어 동북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장수리 뒷산인 골치산(骨峙山)에 이어 신촌리 동북쪽으로 높이 솟은 664.2봉의 산이다. 이 산은 장흥 관내 산 중에서 제암산(778m), 천관산(723.1m), 사자산(666m) 다음으로 높은 산으로 이 산이 감싸안고 있는 장수, 학송, 신촌,수문, 율산, 사촌등 9개 부락의 역사와 그 지역민들의 정서와 아주 인연이 깊은 산이다.
상제(上帝)의 비(妃) 셋이 모여 놀았다는 설화에서 그 이름을 따 온 '삼비산(三妃山)은 일명, 하늘의 황비가 내려왔다고 해서 '천비산(天妃山)', 일년 내내 마르지 않는 샘물(정상부 폭포)에서 황비가 놀았다고 해서 '샘비산', 또는 '천비산(泉妃山), 수많은 날을 신비한 안개로 뒤덮인다고 해서 '현무산(玄霧山)'으로 불려 오기도 했지만, 지금은 삼비산으로 통일되어 불려지고 있는, 장흥군의 지리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산이다. 산 정상부의 완만한 능선에는 무려 18만여 평의 구릉능선이 펼쳐지고, 이 능선에는 가을이면 온통 억새밭으로, 4월말이면 철쭉 화원으로 변해 그 일대가 가경(佳景)을 이룬 데다, 삼비산 능선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득량만의 풍경이 또 하나의 일품의 절경이어서 해가 거듭될수록 경산도 등 외지에서 삼비산을 찾는 등산객이 늘고 있는 추세이다.
특히 이 산은 어느 등산 코스에서든 정상을 등정하고 용곡리로 하산하게 되면, 바로 질펀히 트인 득량 앞 바다를 만나고, 그 바닷가에서 메케한 바다내음을 들이쉬며 키조개·새조개·바자락·고막 등 생선회에 소주 한두 잔 걸칠 수 있는 맛을 즐길 수 있어 최근 들어 전국각지에 조금씩 알려져 경상도 등지에서도 봄이나 가을이며 단체 등산객들이 줄을 잇고 있는 실정이다.
장흥산악회 이영돈씨(장흥읍 건산리. 46)는 "삼비산을 되찾기 위해서는 지역민들이국립지리원 등에 진정부터 해야 하는 등 누구보다 지역민들이나 지역 사회단체들이 주도적으로 나서야 하는데, 지역민들이 전혀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고 말하고 지역 이기주의로 보일 수 있지 않느냐는 기자에 질문에"이는 본래 장수, 신촌, 수락마을 사람들의 산으로 그 지역민들의 선조 때부터 그들의 정서, 삶의 흔적이 묻어온 산이기에 그들의 삼비산으로 되돌려 주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니냐"면서 장흥군과 안양면 등 행정당국에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흥타임스.2002.4.27>

삼비산에 살어리랏다

1960년대 농촌에서 연중 가장 바빴던 때는 보리수학과 모내기가 이어지는 무렵이었을 것이다. 절기로는, 농사일이 끊이지 않고 연이어져 일 멈추는 것을 잊는다 해서 '망종(忘終)'이라 했다는 그 절기였을 것이다. 이 무렵이면 보리 베어 타작하랴, 논 갈고 써래질하고 모심으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불 때던 부지깽이도 거든다," "별보고 나가 별보고 들어온다"는 말도 바로 이때를 두고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이때는 사람도 사람이었지만, 소들도 혹사당하던 때였다. 당시는 소 한 마리가 귀중한 재산인지라 거의 집집마다 한 마리 씩 키웠었다. 그런데 이 무렵이면 쇠죽거리가 여간 귀하지 않았다. 잘게 썰어 말린 볏짚과 고구마줄기로 섞어 만든 여물도 거의 동이 나 날마다 '생풀(生草)'로 쇠죽을 써야 했지만, 그마저도 모내기가 한창인 들판에서 생풀 구하기는 하늘에 별 따기나 다름없었다. 논두렁을 다듬느라, 무논 밑거름으로 쓰일 잡초 한 포기라도 아쉬웠던 그 무렵, 논들로 즐비한 들녘 논두렁에는 거의 풀 한 포기 남아나질 못했다. 이 무렵에 나이 어린 사내들의 할 일이란 게 지게에 망태 서너 개 지게에 짊어지거나 바지게를 짊어진 채 오전 일찍 삼비산을 오르는 형들을 따라 나서는 일이었다.
삼비산은 여느 산과 달리 꼭지점인 삼비산을 정점으로 하여 반원형으로 등성이를 길게 늘어뜨리면서 서쪽 장수리 쪽으로는 회룡봉(360m), 노적봉(390m)으로 이어지고 남동쪽으로 상제봉(620m), 투구봉(520m)으로 이어지고 그 두 줄기 산 밑 기슭은 분지형으로 드넓게 퍼져있고 그 분지를 가로질러 여기저기 계곡들이 형성돼 있었다.
모내기가 한창인 들에는 풀 한 포기 없어도 삼비산 기슭의 많은 골짜기에는 파릇파릇 돋아난 풀들이 무성했다. 우리는 바로 그 풀을 베러 낫도 두어 개 씩 챙기고 도시락까지 싸 담고 모내기철이 끝나도록 소꼴을 마련하기 위해 삼비산 계곡을 타곤 했던 것이다. 바람골, 물묵골, 바랑골, 부득골, 버퉁골, 지픈골, 뜩박골, 여시골, 강남골 등등 지금도 온갖 추억들이 오롯이 돋아나는 그 골짜기 골짜기들을 찾아다니며 소골을 베어 날랐다. 야트막한 골짜기에 풀들이 다 베어지면 삼비산 정상까지 타올랐고, 때로는 삼비산 너머 웅치 쪽의 골짜기를 타기도 했다. 그때가 불과 열 두어 살 때였다.
여름이면, 너나 할 것 없이 소꼴을 베러, 또는 소를 먹이로 삼비산 기슭으로 모여들었다. 할 일없이 친구 따라 삼비산으로 모여들기도 했다. 아이들이 늘 멱을 감던 삼비산 계곡 둥벙까지 땀을 질질 흘리며 숨차게 달려가 옷을 홀랑 벗고 물 속에 첨벙 뛰어들곤 했다. 한낮의 땡볕이 비실비실 기운을 잃을 때까지 우리는 산기슭에 소를 놓아놓고 계곡에서 가재를 잡기도 하고 낚시도 하고, 개울가 넓적한 바위에 낮잠을 자기도 하면서 놀았다. 산그늘이 개울까지 내려오면서 기온이 서늘해지면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개울을 벗어나 묘지근처 잔디밭으로 자리를 옮겨 말타기도 하고 공기놀이며 꼰놀이, 땅뺏기놀이도 하고 때로는 전쟁놀이도 하며 놀았다. 산그늘이 감남골 7,8부 능선까지 차 오르면 깊은 산으로 풀을 베러갔던 어른들이 풀짐을 메고 하나 둘 내려오고, 그때야 우리도 몸을 일으켜 소를 찾으러 어슬렁어슬러 산을 기어오르는 것이었다.
풀밭에서 어쩌다 잠에 빠져들면 어느새 둥둥둥, 울리는 풀꾼들의 북소리가 온 산을 울리며 우리를 잠에서 깨우곤 했다. 여나므 명 씩 짝을 지어 품앗이로 풀을 베는 풀꾼들이 줄지어 내려오면서 치는 북소리였다. 그 북소리는 삼비산 여기저기서 풀을 베거나 소먹이를 하던 모든 사람들에게 집으로 돌아갈 시간임을 알려주는 하나의 신호 같은 것이었다.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풀을 베는 동료들에게, '이제는 내려갈 시간이다'고 알려주는, 혹시 어느 골짜기에 홀로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동료 풀꾼들의 잠을 깨우는 북소리였다. 옛날 감남골에는 호랑이며 늑대가 많았다고 전해지는데, 풀꾼들의 북소리는 아마 그때부터 짐승들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는지도 몰랐다.
이처럼 한 여름 신촌마을 사람들의 오후의 일과는 마을에서 삼비산으로 옮겨가 있었다. 어른들은 그 곳에서 풀을 베고 나무도 하고 나물을 캐기도 했으며 아이들은 풀을 베거나 소를 놓아 먹였다. 유독 아이들은 여기서 오후 내내 멱을 감고 가재를 잡았으며 신나게 말타기를 하고 놀았다. 광주 등지에서 학교 다니던 형들도 방학 때 시골에 내려오면 일부러 멱을 감기 위해 삼비산을 찾았고, 가끔씩 방학에 시골을 방문한 도회지의 친척 애들도 삼비산에서 함께 어울려 놀았다. 삼비산의 여름은 어린아이들의 공화국이었던 것이다.
대여섯 살 때부터 형들이나 할아버지를 따라 한 여름이면 소먹이로 삼비산 기슭을 기웃거렸던 우리들은 점차 나이 들면서 이렇게 삼비산 곳곳을 샅샅이 헤집고 다지곤 했던 것이다.
여름 내내 삼비산은 꿈 속에서도 우리들의 공화국이었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악몽도 삼비산에서였고, 삼비산 여기저기를 날아다니거나 누나들 멱감는 모습을 훔쳐보는 재미나는 꿈도 삼비산에서였다.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거나 성인이 된 이후 서울생활을 하면서 문득 꿈속에서 고향마을을 만나면 예외 없이 삼비산이 덩달아 나온곤 했다. 짚은골에서 삼비산 정상으로 오르는, 99구비 험로, 갈지 자(之)로 휘돌아 오르내리는 99계단 험한 산길을 타 내리는 희긋희긋한 풀꾼들의 모습도 보인다. 품앗이 풀꾼들이 열지어 둥둥 북치며 힘차게 내려오는 모습도, 삼비산 정상부 구릉의 질펀히 핀 참꽃 밭도 보인다. 그럴 때마다 풀꾼들의 북소리로 꿈에서 깨어나고, 그 북소리는 꿈을 깨인 뒤에도 어머니의 자장가처럼 고향의 소리되어 오래도록 귓가에 남곤 했다. 아아, 그 삼비산의 이름이 언제나 당당하게 찾아질려나
<장흥신문/제280호.2003.5.22>

삼비산의 명칭은 언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삼비산 이름 찾아주기 운동-군번영회, 지역민이 앞장서야
장흥군 안양면과 보성군 웅치면의 경계에 솟아있는 삼비산(664,2m)은 백두대간의 영취산(여수시, 510m)에서 갈라진 호남정맥이 서남쪽으로 달리다가 제암산, 사자산에 이어 동북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장수리 뒷산인 골치산(骨峙山)에 이어 신촌리 동북쪽으로 높이 솟은 장흥의 명산이다.
이 산은 장흥 관내 산 중에서 제암산(807m), 천관산(723.1m), 사자산(666m) 다음의 높은 산이다. 상제(上帝)의 비(妃) 셋이 모여 놀았다는 설화에서 그 이름을 따 온 삼비산(三妃山)은 일명, 하늘의 황비가 내려왔다고 해서 '천비산(天妃山)', 일년 내내 마르지 않는 샘물(정상부 폭포)에서 황비가 놀았다고 해서 '샘비산', 또는 '천비산(泉妃山), 수많은 날을 신비한 안개로 뒤덮인다고 해서 '현무산(玄霧山)'으로 불려 오기도 했지만, 지금은 삼비산으로 통일되어 불려지고 있다. 산 정상부의 완만한 능선에는 무려 18만여 평의 구릉능선이 펼쳐지고, 이 능선에는 가을이면 온통 억새밭으로, 4월 말이면 철쭉 화원으로 변해 그 일대가 가경(佳景)을 이룬 데다, 삼비산 능선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득량만의 풍경이 또 하나의 절경이어서 해가 거듭될수록 외지에서 삼비산을 찾는 등산객이 늘고 있는 추세이다.
이 산의 정상부는 삼비봉이고 그 줄기에 장수리 쪽으로는 회룡봉, 율산쪽으로는 한덕산, 신촌쪽으로는 투구봉, 수락쪽으로는 상제봉, 매봉산 등을 거느린다.
이러한 산줄기들이 감싸안고 있는 마을들이 이른바 장수, 학송, 신촌, 수락, 수문, 용곡, 율산, 덕산, 사촌 등 9개 마을이다. 그러므로 이들 마을과 주민들의 역사와 정서는 삼비산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당초부터 이 산줄기가 서북쪽으로 뻗어내리면서 장수리와 학송리를 낳았고, 다시 서남쪽으로 이어지면서 덕산마을과 율산리, 사촌리를 낳았으며, 동남쪽으로 뻗어내리면서 신촌리와 수락리 그리고 용곡리와 수문리를 탄생시켰으므로 이런 각별한 인연들은 당연한 일이리라.
옛부터 이 산에서 이곳 주민들은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 불을 지필 땔감을 마련하기도 했으며, 한국 전란 이전까지만 해도 정상부근인 신촌리 북쪽 산기슭엔 늑대, 호랑이가 출몰하기도 했다. 지난 1989년 목포대학박물관에서 실시한 지표조사 자료인 「장흥군의 문화유적」과 그 이전 몇몇 고고학계의 자료에 따르면, 안양면 전체에 선사시대 유물인 고인돌이 총 31개군에 347여기가 조사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삼비산과 관련된 고인돌로는 장수리에 80여기, 신촌리에 26기, 수락리에 45기 등 총 150여기가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조사, 발표되었다.
삼비산 줄기에 터를 잡은 9개 마을주민들의 초등학교인 안양동초등학교 교가에도 삼비산은 등장된다. 안양동초교는 일제강점기인 1934년에 개교한 학교인데, 삼비산은 당시에 현무산으로 불려진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종상씨 작사·작곡인 이 교가 가사는 "명소(名所)라 아름다운 호남의 일단(一端) / 현무산(玄霧山:삼비산) 기슭에 옛 거룩한 자취 / 득량의 넓은 바다 우리의 기상 / 의리에 굳세자고 맹세한 우리 / 길이길이 빛내자 안양동초교".
이처럼 삼비산은 인근지 주민들과는 선사시대부터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동안 삼비산은 장흥군의 역사에서 관심 밖으로 내쳐져와 무명의 산으로 표기돼 왔다. 조선조 말 장흥읍지나 장흥 관련 어느 지리 역사서에서도 삼비산은 등장되지 않는다.
결국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1917년 년 최초로 '1분/1만5척' 축소판 보성 또는 장흥편 지도에서 626.8m 일림산은 분명하게 표기되지만 삼비산은 이름도 없는 664.2m 무명산으로 표기되기에 이르게 되고, 그 이후 수차 수정된 지도에서도 동일하게 무명산으로 표기되다 1996년판 1975년 수정본 1/25,000 율포 지도에서는 일림산으로 잘못 표기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와 반대로 삼비산보다 저봉인 626.8m인 일림산은 1917년 보성 지도에서 표기된 이후 계속 표기돼 오면서 1996년 판 1/25,000 율포지도에서는 위치를 삼비봉으로 옮겨 표기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보성군에서는 이 삼비봉 일대를 명산화·일림산화 운동을 추진, 2000년부터 공공근로를 투입하여 이곳 일대의 등산로를 일제히 정비한데 이어 2001년 5월 제1회 철쭉제 개최, 2001년 5월 11일 대리석 제단 조성, 2001년 9월 일림산 표지석 조성 등 대대적인 관광사업을 추진하여 율포 녹차탕과 연계된 관광루트로 개발해 왔던 것이다.
이제 국립지리원의 일림산 표기 수정으로 삼비봉은 다시 무명산으로 되돌아왔다. 여기에 삼비산 이름을 찾아주는 일은 장흥군민의 몫으로 남아졌다. 장흥군 지명위원회에서 삼비산 지명 표기를 심의, 의결하여 도지명위원회로 회부했지만, 도 지명위원회에서는 보성군과의 문제 때문에 보성군의 의견도 들어봐야 한다는 이유로 올 하반기에 다시 심의, 의결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기실 이 문제는 보성과는 하등 관련이 없다. 보성에서는 이 산에 대한 어떠한 지명도 없이 이산 부근의 산만을 일림산으로 불려왔고 일림산이라는 지명표기를 오래전부터 확보해 왔다.
그러나 장흥에서는 이 산에 대해 천비산, 현무산으로 이름으로 불려왔고 근년에 이르러 삼비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오고 있으므로 국립지리원에서 이 산에 대해 장흥군민이 원하는 삼비산으로 표기한다고 해도 이 문제는 보성과는 하등의 관련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장흥군민이 앞장서서 해결해야 한다. 최근 들어 부쩍 활동이 왕성해진 군번영회와 안양 지역민들이 주도해서 삼비산 이름을 찾아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664,2봉 산비산은 영원히 무명산으로 남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장흥신문 제276호/2003.4.4>

삼비산’지명찾기 해법, 간단하다
삼비산과 일린산이 이웃동네에서 살았다. 일림산은 호적에도 올라진 이름이고 삼비산은 그저 마을에서 불려지기만 했을 뿐 호적에는 집터자리만 등재되어 있을뿐 집 주인의 이름이 무명산로 돼 있었다.
그런데 일림산이 나중에 삼비산의 집터가 좋고 돈벌이도 잘 된다며 제 집을 버려두고 마을 사람들 몰래 삼비산 집으로 쳐들어와 삼비산을 쫓아내고 일림산 이라는 문패도 턱 하니 내걸고 외지 사람들에게 제 집이라며 집구경도 시켜주고 집안팎을 더욱 화려하게 가꾸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법원의 한 서기가 잘못 실수로 한 번은 삼비산 집 주인을 일림산의 집으로 인정하는 문건를 만들어 주었다.
다른 토지 대장같은 데는 다 그 잘 나가는 집이 번지수만 새겨지고 이름이 없는 무명산 집으로 돼 있지만, 그 문건만큼은 일림산 집으로 표기돼 있는 것이었다. 해서 일림산은 그 문건을 근거로 제집이라며 더욱 우겨대기 시작한다. 나중에 마을 사람들이 법원에 이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한다. 법원에서는 원적을 조회해 본 결과 일림산이 제집이라며 살고있는 집은 당초 삼비산 집이었고, 일림산의 집은 딴 곳에 있었음을 확인하고 두 사람에게 그 사실을 통보해 준다.그런데도 일림산은 그 집이 제집이라며 법원의 통고에도 불복하고 강제 집행할 때까지 기다리겠다며 지금도 버티고 있는 것이다.

'삼비산' '일림산' 사이에 그 이름을 놓고 벌어지고 있는 장흥군과 보성군의 갈등이 최근 들어 '지자체간의 이름뺏기 싸움'이라는 식으로 중앙언론에까지 보도되면서 그 갈등이 쉬이 사그라들 전망이 보이지 않아 안타깝다. 또 일부 군민들 사이에서도 산 이름 하나 가지고 뭘 그러느냐며, 삼비산 이름 찾기를 제기해 온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그것 역시 안타까운 마음이다.
문제 해결은 간단하다. 또 산비산이라는 이름을 되찾아주겠다는 생각 역시 너무나 당연하고 상식적인 것이어서 이를 두고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레 이상하게 생각이 된다. 문제해결이 왜 간단한가. 요즘은 사소한 말다툼이라도 그 해결이 어려우면 법으로 곧잘 해결하듯이, 문제가 되고 있는 삼비산-일림산 지명표기 문제 역시 '정부의 지침'에 따르면 간단히 해결되기 때문이다. 당초 장흥군에서는 국립지리원에, 626.8 봉에 위치해야 할 일림산 표기가 '1/25,000 율포도엽'지도에서는 664.2봉 무명산이 일린산으로 둔갑되어 잘못 표기되었음을 확인하고 그 사실을 진정했고, 국립지리원에서는 '1/25,000 율포도엽' 지도를 잘못 제작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다음 제작분 '1/25,000 율포도엽'에서부터 664.2봉이 아닌 626.8m봉을 일림산으로 표기하겠다고 장흥군에 공문으로 통고해 왔다. 그때가 지난 2003년 0월 0일이었다. 국립지리원은 또 보성군 측에도 일림산은 664.2 봉이 아니라 626.8봉에 위치한 산이라는 사실을 통보했다. 그리고 분명히 1/25천 지도에 일림산= 664.2m은 잘못 표기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기에 이를 수정도록 조치할 계획이라고 부언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결국 보성군은 일림산을 제자리로 옮겨놓고 664.2m에 세워진 일림산 표지석도 철거해서 626.8으로 옮겨놓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장흥은 제암산에서 철쭉제를 여니, 보성에서 굳이 철쭉제를 삼비산 쪽에서 열어야 한다면 그냥 삼비산 철쭉제로 이름을 고쳐 열든지, 아니면 안양면청년회와 공동으로 '삼비산 철쭉제'를 개최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얼마든지 상생의 길도 있다는 것이다. 설마 그것마저 장흥군에서 거부하기까지 하겠는가.
그리고 일림산 표지석이 제자리로 옮겨가면, 장흥군이 지명위원회를 통해 지도상에서 무명산으로 나와있는 그곳을 삼비산으로 등재토록 하는 사안은 차후의 문제로 장흥군이 할 일인 것이다. 더구나 662.4m 삼비산은 토지대장에에 '장흥군 안양면 학송리 산 1-1'로 나와 있어 분명히 장흥의 땅이고 장흥의 산이므로 그 산이름을 골치산으로 하든 삼비산으로 하든 그대로 놔 두든 그것은 장흥군의 맘인 것이다.
1700m 간격으로 앉아있는 삼비산과 일림산, 664.2봉과 626.8봉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만든 최초의 1917년 판'1분/1만5척' 축소판 보성-장흥편 지도를 통해 공식적으로 이땅에 태어난다.
그러나 태어나면서 보성의 626.8봉은 일림산이라는 이름을 얻어 호적(지도)에 올리지만 장흥의 664.2봉은 이름을 얻지 못해 호적에는 이름없는 무명산으로 등재된다. 아마 옛 문헌을 근거로 해서 산이름을 정리했을 그 당시, 장흥읍지나 장흥관련 문헌에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무명산으로 등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장흥 사람들은 비록 호적에 올라있지는 않았지만 그 산 이름을 삼비산으로 불러 왔다.
그후 우리나라 국립지리정보원에서는 지도를 수차 수정, 인쇄하면서도 일본 총독부가 호적에 올렸던 그 기준을 적용해왔는데, 어쩌다 1996년판 1975년 수정본 1/25,000 율포 지도에서 그만 일림산을 무명산으로 위치를 옮겨 664.봉=일림산으로 잘못 표기하기에 이르렀고 (물론 다른 지도에서는 여전히 제대로 표기했다) 그후 장흥군의 진정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수정하겠다고 통고해 온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크게 문제 될 게 없다. 그런데도 이렇게 문제가 꼬이고 있는 것이 무엇 때문인가. 한쪽에서 표지석을 무너뜨리고, 그것을 또 고발하고, 제 2봉이 일림산이니 제1봉도 일림산이어야 한다는 억지 주장을 펴고 하는 것들이 남보기에 다 부끄러운 모습이다.
문제는 원칙으로 가고, 삼비산 이름도 찾아주면서 그리고 나서 함께 공생하는 방법을 모색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장흥신문 제314호/2004.5.20>


'삼비산' 이름찾기 전 장흥군민이 나서야
장흥군 안양면과 보성군 웅치면, 보성군 회천면 경계지점에 솟아있는 삼비산(667,5m)은 백두대간의 영취산(여수, 510m)에서 갈라진 호남정맥이 서남쪽으로 달리다가 제암산, 사자산에 이어 동남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장수리 뒷산인 골치산(骨峙山)에 이어 신촌리 동북쪽으로 높이 솟은 장흥의 명산이다.
삼비산은 장흥 관내에서 제암산(807m), 천관산(723.1m) 다음의 높은 산이다. 상제(上帝)의 비(妃) 셋이 모여 놀았다는 설화에서 그 이름을 따 온 삼비산(三妃山)은 일명, 하늘의 황비가 내려왔다고 해서 '천비산(天妃山)', 일년 내내 마르지 않는 샘물(정상부 폭포)에서 황비가 놀았다고 해서 '샘비산', 또는 '천비산(泉妃山), 수많은 날을 신비한 안개로 뒤덮인다고 해서 '현무산(玄霧山)'으로 불려 오기도 했지만, 지금은 삼비산으로 통일되어 불려지고 있다.(삼비산과 가장 가까운 마을인 신촌리에서는 지금도 '샘비'로 불려 오고 있다).
산 정상부의 완만한 능선에는 무려 18만여 평의 구릉능선이 펼쳐지고, 이 능선에는 가을이면 온통 억새밭으로, 4월 말이면 철쭉 화원으로 변해 그 일대가 가경(佳景)을 이룬 데다, 삼비산 능선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득량만의 풍경이 또 하나의 절경이어서 해가 거듭될수록 외지에서 삼비산을 찾는 등산객이 늘고 있는 추세이다.
이 산의 정상부는 삼비봉이고 그 줄기에 장수리 쪽으로는 회룡봉, 율산쪽으로는 한덕산, 신촌쪽으로는 투구봉, 수락쪽으로는 상제봉, 매봉산 등을 거느린다. 그리고 이 산줄기들이 품안에 거느리고 있는 마을들이 이른바 장수리, 학송리, 신촌리, 수락리, 수문리, 용곡리, 율산리, 덕산리, 사촌리 등 9개 마을이다. 그러므로 이들 마을과 주민들의 역사와 정서는 삼비산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오래전부터 이 삼비산 줄기가 서북쪽으로 뻗어내리면서 장수리와 학송리를 낳았고, 다시 서남쪽으로 이어지면서 덕산마을과 율산리, 사촌리를 낳았으며, 남쪽으로 뻗어내리면서 신촌리, 그라고 동남쪽으로 뻗치면서 수락리 그리고 용곡리와 수문리를 탄생시켰다. 옛부터 이 산에서 이곳 주민들은 나무를 베어 집을 짓고, 불을 지필 땔감을 마련하기도 했으며, 한국 전란 이전까지만 해도 정상부근인 신촌리 북쪽 산기슭엔 늑대, 호랑이가 출몰하기도 했다.
지난 1989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장흥군 최초의 지표조사 자료인 <장흥군의 문화유적>과 그 이전 몇몇 고고학계의 자료에 따르면, 안양면 전체에 선사시대 유물인 고인돌이 총 31개군에 347여기가 조사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삼비산과 관련된 고인돌로는 장수리에 80여기, 신촌리에 26기, 수락리에 45기 등 총 150여기가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조사, 발표되었다.
삼비산 줄기에 터를 잡은 9개 마을주민들의 초등학교인 안양동초등학교 교가에도 삼비산은 등장된다. 안양동초교는 일제강점기인 1934년에 개교한 학교인데, 삼비산은 당시에 현무산으로 불려진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종상씨 작사·작곡인 이 교가 가사는 "명소(名所)라 아름다운 호남의 일단(一端) / 현무산(玄霧山:삼비산) 기슭에 옛 거룩한 자취 / 득량의 넓은 바다 우리의 기상 / 의리에 굳세자고 맹세한 우리 / 길이길이 빛내자 안양동초교".
이처럼 삼비산은 인근지 주민들과는 선사시대부터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샘비산, 삼비산을 일림산으로 부르라 한다. 이는, 일제강점기때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이름 대신에 일본식 이름을 지어 쓰도록 강요했던 것이나 진배없는 일이다. 김씨는 가네야마(金山)로 이씨는 리노이에(李家)로 백씨는 시라카와(白川) 등으로 부르라 했던, 그리하여 우리의 민족혼과 역사를 말사하려 한 일본인들의 작태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장흥 일림산'으로 부르면 될 것 아니냐. 문패만 바꿔 단 것에 불과하지 않느냐,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일림산의 개명 이면에는 당초 보성산인 626.8m 일림산의 주봉의 이름으로서 일림산이므로, 행적구역으로는 장흥에 속하지만 역사적인 연고로 '보성산 일림산'이라는 그들의 주장과 의견에 동조하는 결과에 다름아니다.
일림산으로 고착되면 우리는 영원히 삼비산을 그들에게 빼앗기고, 삼비산 지역민들의 혼과 역사마져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이는 실로 장흥군민이 자존과 관련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왜 우리의 이름인 삼비산을 두고 보성이름인, 보성사람들이 원하는 이름으로 불리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것이 삼비산 이름찾기에 전 장흥군민이 나서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장흥신문 제383호/2006.8.2>

김선욱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여백
가장 많이 본 기사
여백
여백
여백
여백
톱기사
여백
중요기사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주)장흥신문  |  전남 장흥군 장흥읍 건산리 470-1  |  농협 657-01-073148(장흥신문)  |  문의전화 061-864-3721  |  청소년보호책임자 최정옥
Copyright © 2013 (주)장흥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