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서가 지나고 9월로 접어드니 조석으로 찬바람이 불어오고 귀뚜라미와 여치등 풀벌레가 슬피 울어 가을임을 느끼게 한다.

오늘은 장흥읍성을 등산하기로 약속되었지만 등산거리가 너무 가까우므로 집에서부터 걸어보고 싶었다. 읍중심지까지 4.5킬로미터인 이 길은 학창시절에 6년동안 통학을 하였던 길이며 그후 수개년 간을 자전거로 통근하였던 길이므로 그동안 걸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수리봉을 등지고 마을 앞길을 따라 가벼운 발길을 옮기니 바로 눈앞에 부산평야가 펼쳐지고 들 역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벼 이파리는 바람에 나부끼고 벼 이삭은 누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집에서 출발한지 20여분 만에 부산다리에 도착하여 친구를 만났다. 우리는 차들이 지나다니는 아스팔트길을 피해 탐진강변의 강 뚝 길을 걷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30여년 만에 걸어 본 이길, 강줄기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눈길이 멈춰 응시되는 곳이 있었다. 청소년 시절에 그 곳을 지나면서 직접 보았거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었던 그 곳에 관한 이야기가 잊혀질 듯 잡혀져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과거와 현재의 현상이 교차되기도 하였다.

나는 이 길을 걸으면서 내 고향 장흥의 젖 줄기인 유서 깊은 이 탐진강 물이 어제도 오늘도 흐르고 있고 또 영원토록 장흥의 역사와 함께 흐를 것임을 보고 느껴 보기도 하였다.

친구와 나는 강 뚝 길을 다라 옛 추억을 더듬으며 장흥읍 연산리(구 신흥리)앞을 거쳐 장흥교(구 동교다리)와 읍사무소 앞을 경유하여 오늘의 목적지인 장흥읍성을 돌아왔던 것이다.

나는 오늘 이순을 넘긴지 7년인 이 시점에서 감회와 유서가 깊은 이 탐진강변을 걸어 본 후 황홀함에 젖어 있다가 이 감회를 그냥 넘겨 버릴 수가 없어 정확하지도 않고 상세하지도 않지만 보고 듣고 느낀 소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 하늘은 옅은 구름이 끼어 있어 햇빛이 내려 쪼이지는 않았지만 여름날씨처럼 무더웠다.

부산다리에서 장흥읍 연산리쪽으로 뚝 길을 따라 터벅 터벅 걸어 장흥평야의 원천수인 보(洑)를 거쳐 부산면 내안리와 장흥읍 연산리 경계지점에 위치한 ‘비모퉁이’의 강 유역에서 시선이 멈췄다. 그 옛날 이맘때면 이 강변의 둔치에서는 누런 황소가 풀을 뜯었고 인근 마을에서 온 하동들이 천렵을 하고 고동(다슬기)를 잡으며 놀았었으나 그 서정어린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그 곳에는 물 버드나무와 갖가지 잡초만 무성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이곳은 1950년대 초 전쟁이 치열했던 그 시기에 휴가를 온 군인들이 휴대한 M1소총을 쏘거나 TNT를 던져 물고리를 잡았던 곳이다. 그럴 때마다 수많은 은어 떼들이 죽어 물위로 떠 올랐고 우리는 맨 몸으로 그 강물에 뛰어들어 은어를 잡아 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 은어는 왜 이곳에서 보이지 않은가! 수질이 나빠 그러는지, 어로가 나빠 그러는 지, 그렇게도 유명했던 은어가 보이질 않는다.

발길을 옮겨 조금 더 내려가니 연산리로 들어가는 다리가 나온다. 그 옛날이 부근에는 물레방앗간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노두(징검다리)가 있었는데 지금 그 물레방아와 노두는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봄 겨울 구분 없이 이 마을 사람들은 그 물레방아로 방아를 찧었고 조심스레 그 노두를 건너다녔었는데...



탐진강을 가로 질러 밟고 다니는 낭만적인 이 같은 징검다리가 현재까지 이 탐진강에 하나라도 남아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구비 쳐 흘러가는 강줄기 따라 왼쪽으로 돌아가니 호수처럼 넓디넓은 박림쏘가 눈앞에 펼쳐지고 검푸른 물결이 잔잔히 흐르고 있으며 물 가운데에는 마름풀이 군데군데 떠올라 덥혀있다.

박림쏘는 내가 청소년 시절에 희비가 엇갈린 곳이기도 하다.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에 우리 친구들은 이따금 이곳 박림쏘에 와서 수영을 하고 놀았었고 때로는 전교생이 이 곳에서 수영대회를 하기도 하였다. 그 어느날 수영대회를 할 때에 2년 선배인 최영창 형이 수영도중 다리에 쥐(마비증상)가 내려 힘들어했던 모습이 기억나며 그 후 1970년경에는 나의 친구 안인수군이 박대유군과 수영을 하다가 익사하여 우리를 슬프게 한 일도 있었다.

박림소 좌편에는 행원리 잣두마을이 고요히 자리 잡고 있다.

이 마을은 그 옛날 무시(무우)가 유명한 곳이다. 이 곳 토질이 물빠짐이 잘 되는 사질양토이기 때문에 무우가 다량 재배되어 장흥군내에는 물론 인근 중소도시까지 출하되었기 때문에 ‘잣두무시’가 명성을 날리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무우 밭은 논이나 집터를 바뀌어 옛 정취를 찾아볼 수가 없다.

또한 이곳 잣두에는 장흥중, 고등학교의 전신인 ‘장흥공립농잠실수학교’가 1930년도에 설립되어 장흥중, 고등학교로 개설(1946)되어 지금의 장흥중학교 자리로 이전될 때(1949)까지 자리 잡고 있었던 곳이다. 지금 이 잣두마을 앞에는 장흥실업고등학교가 들어서 있고 그 전면에는 4차선의 아스팔트 길이 신설되었으며 그 옆 탐진강 기슭에는 늪지대가 있어 물풀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다.

이 늪지대는 그 생태를 조사하여 보존할 가치가 있을 경우에 영구 보존 해보는 것도 바림직하다고 생각된다. 이 늪지대 아래에는 고무보가 설치되어 있어 탐진강물을 동교다리(지금 장흥교)에서나 그 주변에는 바라 볼 때에 넓은 호수처럼 잔잔하게 보여 더욱 이채롭다.

이 고무보는 튜브형식의 고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평상시에는 자동적으로 고무튜브에 공기가 주입되어 강물이 적당량으로 고이게 하는 보의 역할을 하게 되고 홍수 때면 자동적으로 공기가 빠져 큰물이 저절로 흘러가게 하는 장치를 설치한 것으로 그 수명은 30년 정도라고 한다.

이 고무보 아래지점의 고수부지에는 이 웰빙시대에 걸 맞는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강변에는 산책도로와 농구장등 문화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그 언덕 위와 큰 도로변에는 후박나무와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으며 그 사이 사이에 백일홍과 무궁화가 활짝 피어 있어 시민들의 정신적 육체적 문화적인 건강을 누리게 하고 있다. 또한 그 도로변에는 고려 충숙왕때(1363)문익점선생이 원나라에서 붓 대롱 속에 감추어 가지고 왔다는 목화가 만발하고 그 열매인 다래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 그 옛날 우리가 어렸을 때에 다래를 따 먹고 추석이나 설날 명절에 새 무명배 옷을 선물 받아 입었던 추억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이 아름다눈 공원을 지나가니 동교다리가 다가온다. 이 곳엔 다 달았을 때 동행한 친구는 옛 일을 기억해 낸다. 우리가 중학교를 다닐 때에 학교 정문의 언덕길을 중, 고등학교의 전교생이 흙이나 돌을 운반하여 쌓아 만들었다느 얘기다. 그 때 우리 학생들은 다리 위아래의 천변에 깔려 있는 자갈을 들것(가마니 양쪽에 대를 끼워 그 위에 물건을 담아 두 사람이 양손으로 들고 짐을 운반하는 것, 일명 당가라고 불렸음)이나 책보자기에 담아 시간있는 대로 학교정문까지 날리는 고된 작업을 하였었다. 지금 같으면 포크레인이나 트럭을 이용하여 공사를 할텐데 그 시대에는 이런 중장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다리가 지금은 장흥교로 개명되었지만 그 옛날에는 장흥도심의 탐진강을 가로 지르는 유일한 교량으로 우리군민들의 무수한 애환이 깃든 곳이다. 목포 부산간을 잇는 국도2호선이기도 한 이 다리는 그 옛날 화통을 뒤에 단목탄버스가 지나 다녔었고 장흥장날에 쌀가마니를 실은 소 달구지가 지나 다녔으며 우리 마을 아주머니들이 계란과 채소를 머리에 엊고 시장에 다녔던 다리이다.

그러나 이 다리와 그 주변에서는 6.25한국전쟁전후에 애통하고 치욕스런 일들도 많이 일어나기도 했다.

해방이후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어 ‘이데오로기’로 인한 좌,우익의 대립된 쓰라린 역사가 우리 장흥에도 몰아 닥쳐 크나큰 악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 당시에 이 동교다리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사건 중 이 필자가 보고 들었었던 사건과 그 외 그 부근에서 과거와 현재에 일어난 애환의 역사를 간략히 열거해 보고자 한다.

공산치하 때인 1950년 8월 어느날 강제로 징집된 의용군들이 집결지인 장흥중학교정으로 가기 위해 이 다리를 건너 갈 때에 연합군의 공군기인 젯트기(일명 호주기)가 갑자기 날아와 의용군을 향해 폭탄을 투하하는 바람에 다리 중간에 구멍이 뚫리고 그 구멍으로 의용군이 떨어져 강물에 빠지는 사건이 있었으며 그해 8월17일에는 우익으로 활동하다가 잡힌 사람들에 대한 ‘인민재판’이 읍사무소 앞 광장에서 있었는데 그중 10여명이 그 옆 탐진강변 수양버드나무 아래에서 총살을 당한 사건도 있었다. 이 잔인무도한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난 우리 마을의 김정길 아저씨가 지금 건강하게 생존하고 있어 그 역사적인 사건을 여실히 증명 해 주고 있다. 당시에 김정길씨는 경찰관으로 재직하던 중 본대를 따라 완도로 후퇴를 하지 못하고 산속에서 피신하다가 잡혀 장흥인민위원회(경찰서) 유치장에 구속되던 중 이날 재판을 받게 되었으나 어느 누구의 도움으로 살게 된 것이다.

이 뿐이랴 우리 장흥이 공산치하에서 수복된 후 그해 10월 어느날에는 아군 측이 좌익으로 활동하다가 잡힌 사람을 이 다리아래에서 사형을 집행한 사건도 있었다. 당시에 장흥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던 좌수 중 인민군 2명을 포함한 13명을 끌어내 화물차에 태워 동교다리 아래 하천변(지금의 고수부지 주차장)으로 끌고 내려가 다리위에서 주민들과 학생들이 내려다 보는 앞에서 총을 쏘아 사형을 집행하는 참혹한 일이 있었다. 이 때에 13명중 3명이 군민들의 진정에 따라 아슬아슬하게 극적으로 살아남게 되는 다행스런 일이 있기도 하였다.

이날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사형을 집행한 것은 수복 후의 치안을 위하여 선전의 한 방법으로 취한 행동이었다고 한다.

또 하나 생각나는 일이 있다. 필자가 아마 중학교를 다녔을 무렵으로 기억되는데 수복 후 휴전협정이 체결되기 전 남북전쟁이 매우 치열했을 때 우리 장흥에서도 수시로 장정들이 징접되어 출정하였다. 그때마다 읍사무소 앞에서 군민들의 환송식을 갖게 되었었고 이 행사에는 매회 학생들이 동원되었다. 행사가 끝나자마자 머리띠를 두른 장정들이 트럭에 타 전쟁터로 떠나게 되는데 그때 읍사무소 앞은 부모형제들의 눈물바다가 됐다. 그때 우리 학생들이 환송식에 참여하여 불렀던 노래구절이 생각나 여기에 옮겨본다. “겨레의 방패로 뽑힌 용사들/파도 친 깃발과 환호성 속에/포부도 당당히 나아가는/오늘은 남아의 보람 있는 날/가소서 싸움터로 정의의 싸움터로/...(이하생략)”


세월이 흘러 20여년 후인 1973년(?) 8월에 지금의 장흥교 아래 주차장 부근에 서커스 공연장을 설치하여 공연을 하는 기간이었다. 어느날 탐진강 상류에 갑작스런 폭우가 쏟아져내려 홍수가 공연장으로 범람할 때에 서커스 단원 한사람이 미처 피신을 못하고 홍수에 휩쓸려 그대로 떠내려가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이러한 사건들이 일어난 강변 언덕에는 수양버들과 벚나무가 줄 지어 서 있어 탐진강물과 함께 암울했던 역사의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2000년대로 접어들어 예양강(汭陽江=탐진강)물이 흐르고 있는 강변의 역사는 급변하고 있으며, 슬픔과 치욕의 역사가 깃들었던 그 강가는 평화와 사랑의 현장으로 탈바꿈되었다.

강변의 고수부지가 정지되어 각종 문화시설이 들어서 있어 “군민의 날 행사전야제”를 비롯한 각종행사가 그 곳에서 거행되고 있으며, 또한 그 인근에 생활체조와 린나인 스케이트, 배구, 농구, 축구장등이 들어서 있어 군민정서와 건강에 이바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강물 한 가운데에서는 크나 큰 분수가 하늘 높이 분출 용솟음 치고 있어 군민들의 기상을 드높이고 있다.

이 아름답고 서기어린 강가에는 장흥시장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시장은 일찍이 1867년부터 이 지역에 살았던 선조들이 곡물과 가축, 야채류, 해산물, 철물 그리고 일용잡화등의 물물교환과 매매가 이루어 졌었고, 일가친척 및 친지들의 만남의 장이 되어왔으며, 1961년에 “장흥시장”으로 개설되어 상품의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거래는 물론 중개자를 통한 거래도 이루어져 우리군민들의 몸과 마음이 함께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인구의 감소로 인해 시장의 규모가 작아지는 듯 하더니 지방자치시대와 ‘웰빙시대’를 맞아 지역의 발전을 위해 시장의 장옥(場屋)을 새롭게 단장하여 지난 7월 2일에 “토요주말시장”이 개장되었다. 이는 이 지역에 크나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 ‘하나의 시작’이며, 지역발전을 갈망하는 ‘군민의 모습‘이라고 본다. 이 토요주말시장이 개장되던 날 저녁에는 예양강변의 고수부지에 마련된 공연장에서 기념공연이 있었는데 남진, 장윤정, 현당등 유명가수들이 출연하여 군민과 향우, 관광객등 3만여명은 기쁨을 향유하기도 하였다. 그 후 8월 26일에는 이 고수부지 광장에서 “제5회 전국 한우인의 날” 행사가 개최되어 전국에서 모여든 한우인과 군민 수만명이 참관 열광하여 이날의 함성은 전국 방방곡곡에 메아리쳐 나갔었다.이 뿐만이 아니다.

‘5일시장’과 더불어 ‘토요 주말시장’으로 개장된 장흥장터는 매주 토요일마다 민속놀이와 함께 전통 토속상품을 비롯한 많은 상품이 매매되어 오 가는 이에게 옛 정취를 느끼게 하고 있으며, 7- 9월의 주말시장에는 원로가수가 매회 2-3명씩 초청되어 공연을 함으로서 장꾼들과 관광객들의 흥을 더욱 돋우기도 하였다. 또한 이 토요주말시장에는 수시로 서울, 부산, 인천등의 향우들이 방문하여 고향의 발전을 기원해 주고 고향의 향취를 가져가고 있으니 이와 같이 뜻 깊은일이이 또 어디 있으랴 !

이 곳 공연장과 전통음식점이 들어선 곳은 시장을 새로 정비하기 전에 우시장(牛市場)이 있었던 자리이며, 또한 이 인근의 장대(將臺)가 있었던 곳은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최후 격전지인 석대들 전투에서 5천여명의 농민군을 총지휘한 이방언장군과 그의 아들이 참형당한 자리이고 그 외의 수많은 농민군이 총살당하였던 곳 이기도하다.

이 불행했던 역사의 현장에 이 시대에 접어들어 장꾼과 관광객들을 위한 볼거리와 먹거리의 시장이 들어 선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며, 만감이 교차되기도 한다.

긴 세월 동안 슬픔과 기쁨이 공존한 예양강(탐진강) 물은 우리 장흥의 역사와 함께 오늘도 유유히 흐르고 있으며 내일도 모레도 영원히 흐를 것이다. 그리고 우리장흥이 새로운 역사로 발전되어 가게 할 것이다. 예양강 상류에는 한국전쟁의 쓰리고 서글픈 역사가 담긴 유치면에 최근 “장흥댐 탐진호”가 자리 잡아 그 주위에 새로운 문화와 역사가 창출되고 있고, 예양강 하류에는 강진군이 접해 있어 근간 일부 인사들 간에 “양군의 통합설”이 대두되기도 하며, 예양강 중심부에서는 장흥의 대표적인 축제가 될 “물의 축제설”이 부상하고 있으니 이 시대에 이 예양강을 공유하고 있는 군민과 출향인들은 고향 발전을 위한 좋은 일들이 계획대로 이루어 질 것을 기대해 봄과 동시에 우리 장흥군이 문자 그대로 “길이 흥하는 長興”이 되도록 한마음 한뜻으로 힘을 한데 모았으면 한다.

필자는 오늘 예양강에 얽힌 역사와 장흥의 미래를 보고 생각하면서 친구 위두환군과 함께 예양강가와 장흥읍성(長 寧 城)을 돌아보았다.

장원봉(壯元峯)에서 내려다 본 예양강에서는 서광이 솟아 오른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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