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벗삼은 ‘문화의 산물’

김석중/소설가

그 강의 흐름은 적요하고 소박합니다. 50㎞정도의 유역이라면 그다지 큰 강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그럼에도 대지의 젖줄임은 확연합니다. 소소한 서정의 형용들은 바로 이 땅의 얼굴이며 마음이기도 합니다. 인류의 문명이 강을 모태로 해서 형성되었듯이 이 강물 또한 이 지역 사람들의 삶의 원천입니다.

사람들의 삶이 만들어 내는 문명과 문화의 편린들이 함께 하고 있고, 그것들은 세상속의 아름다움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정자(亭子) 또한 선인들이 창조하던 다양한 문화의 산물입니다.

그 강에는 끝없는 이야기들을 담은 정자들이 전설과 학문과 예술과 역사의 이야기를 담고있습니다.

부춘정(富春亭)은 그 정자(亭子)중의 소슬한 한 채입니다. 이 소슬한 정자를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미지가 그려졌을까요. 그래서 드디어는 풍광 좋은 산녘에 자리를 잡았을까요. 가히 짐작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소나무 한 그루, 철따라 잊지 않고 꽃을 피우는 잡목의 숲, 강물과 산 그림자의 조화 -.


이렇듯이 형상화된 경관도 모자란 듯 추상의 이미지를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부춘정에서 감상할 수 있는 빼어난 여덟모양의 경치라는 제하(題下)의 글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① 여름밤 부춘정 어두운 강물에 일렁이는 태공(太公)들의 등불

② 강 건너 들녘에서 가축을 먹이는 목동들의 풀피리소리

③ 강가의 모래사장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해오라기

④ 멀리보이는 기역산 봉우리의 가을 단풍

⑤ 수인산의 절깐에서 들려오는 저녁 범종소리

⑥ 비온 뒤의 사자바위 쪽으로 흘러가는 흰구름

⑦ 정자 뒷곁의 바람바위와 부딪치는 작은 물줄기

⑧ 겨울날의 눈덮힌 부춘정 추녀의 백선(雪線)

한문으로 표기한 부춘정팔경(富春亭八景)을 우리 글로 섬세하게 옮기기란 쉽지 않습니다. 대략적으로 꿰어 모은 여덟 경치를 곰곰이 읽어보면 그것은 우리 산하의 어느 곳에서나 맞닥뜨릴 수 있는 서정들입니다. 소박하고 정겨우면서도 티 나지 않은 아기자기한 이 땅의 퍼즐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선인들은 강 건너 들녘에서 소를 먹이는 아이의 풀피리 소리를 흘려 보내지 않은 것입니다.

눈으로 덮힌 기와지붕의 추녀를 백선(雪線)으로 묘사한 것은 가히 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부춘정도 탐진강을 조망하는 울울한 송림(松林)의 언덕에서 또 다른 팔경(八景)을 연출해 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계절을 따라 문득 부춘정을 찾아가노라면 낯익지 않은 경관이 그리운 듯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탐진강은 장흥 강진지역을 적시며 흐르는 물줄기입니다. 이 지역을 고향으로 인연 닿은 사람들이라면 유년의 추억속에서 탐진강을 결코 지울 수 없을 것입니다. 여름이면 하동(河童)이 되어 햇볕과 구름의 행간에서 한 마리 물고기가 되어 유영했구요. 계절마다 다른 행복했던 체험을 언제든지 회상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탐진강의 강안(江岸)에는 유달리 많은 정자문화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역사 속의 학자나 시인묵객들이 그들만의 학습과 교류와 명상의 장소를 정자로 짓기도 했습니다. 강학소와 무술을 연마하는 처소로 삼기도 했구요.

무엇보다 정자를 통하여 학문이 향상되고 예지의 혜안이 열리고 엄정한 기강이 논의되는 도의의 산실이기도 했습니다. 이 정자들이 그 시대에서 계층을 막론한 사람들에게서 어떤 쓰임새로 활용되었는지는 세밀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충효와 학문과 예술과 철학의 도장으로 기여했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무엇보다 정자는 수많은 이야기와 함께 합니다. 오늘의 시대에서 그 정자들이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버릴 수 없는 교훈과 덕목으로 우리와 동행하고 있습니다. 조선초기를 살았던 사인 김필은 절의의 선비였습니다.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보위에 오르자 그 불의함을 용납 할 수 없기에 벼슬과 지인들을 뒤로하고 낙향하였습니다. 그리고 탐진강의 하류 기암이 선경이고 시야가 아득히 아름다운 산언덕에 정자를 지었습니다. 그 정자가 사인정(舍人亭)이니 유유한 탐진의 흐름을 조망하며 세상사는 접어두고 후학들을 가르치며 은거한 곳입니다.

경호정(鏡湖亭)은 부산면 기동마을 옆, 탐진의 상류에 위치합니다. 굽이굽이 흐르던 강물이 문득 소(沼)가 되어 고즈넉한 호수같이 머물다가 다시 흘러가는 유역의 언덕을 자리잡았습니다. 경호정에서 내려다보는 수면은 거울같이 맑고 고요합니다. 원경(遠景)이 유난히 아름답기에 경호정에 오르면 누구든 시인이고 싶어질 정도입니다.

18세기 초엽, 강의 상류마을에 만고의 효자가 살았습니다. 효자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장례 지내고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묘를 했습니다. 아버지의 묘지는 강 건너 산녘이거니와 비가 내려 수량이 불어나면 성묘를 갈 수가 없었습니다. 비에 젖는 아버지의 묘소를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효자의 가슴은 한없이 슬펐습니다. 효자는 묘소가 건너다 보이는 산기슭에 거적을 치고 앉아서 아버지를 추모했습니다. 효자의 아들은 아버지의 깊이 모를 효심을 위해 거적을 걷어내고 초정(草亭)을 지어드렸습니다. 초정은 곧 효행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효자도 죽고 그 아들도 죽었으나 초정을 매개로 삼은 후손들의 효심은 사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초정은 증축하고 다듬어서 번듯한 정자가 되었습니다. 탐진강 상류의 부산면 용반마을 뒤편은 기암의 절벽과 짙은 낙엽송의 숲이 강물과 어울린 절경입니다. 그 기암의 절벽에 터를 잡은 효심의 초정이 지금 용호정(龍湖亭)입니다. 용호정은 용소(龍沼)의 깊은 물길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여름의 피서지로 효행의 학습장소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 한 정자를 물가 벼랑 위에 세우니
어버이 묘소에 성묘 드리고 돌아오네
꾀꼬리, 해오라기, 노랑흰빛 조화롭고
버들잎과 꽃송이는 청홍으로 어울리네(하략)

초정을 지은 효손(孝孫) 최규문(崔奎文)의 시(原韻)이거니와 효심만 출중한 것이 아니라 뛰어난 예술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탐진강을 주유하면 처처에서 저 팔경(八景)에 버금가는 이 땅의 절경들을 만날 수 있거니와, 더불어 시선을 바로 하면 운치 있는 정자와 조우하게 됩니다. 장흥댐의 산언덕에는 수몰을 피해 이전된 영귀정(詠歸亭)이 새로운 명소로 색칠되어 가고 있습니다.

동백정(冬栢亭)은 장동면의 장항마을 옆, 울창한 송림속에서 흐르는 강물을 음유하거니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별신제(別神祭)의 행소이기도 합니다.

창랑정(滄浪亭)은 장흥읍성(長興邑城)의 사적을 지키듯 박림소(朴林沼)의 기슭에서 창연한 서정을 지키고 있구요. 흥덕정(興德亭)과 수녕정(遂寧亭)은 장흥읍 남산공원(南山公園)의 조형으로 그림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탐진강이 장흥의 영역을 스쳐 포구로 내려가는 하구에서 독취정(獨醉亭)이 지키고 있습니다.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탐진의 강물이 곧 이 땅의 민심이듯, 그 민심과 함께 하는 정자의 역사들은 탐진강의 서정과 더불어 오늘도 끝없는 이야기들을 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대한일보.2005년 04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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