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날 조용한 부춘정에 들어

빗속에 부춘정을 찾았다. 비는 그치다 말다, 를 반복하고, 그새 이삭이 팬 벼논에는 부지런한 농부가 '똘(논안에 배수가 잘 되도록 만드는 도랑)'을 치기 위해 바쁘다. 불어난 강물로 인해 부춘정이 있는 부춘 마을은 바다 가운데의 섬인 것만 같다.

대개의 문화재는 가까이에서 보아야 진가를 알 수 있지만, 탐진강변의 정자들은 물을 사이에 두고 보아야 맛이 난다. 강 건너에 있는 부춘정을 바라본다. 비의 빗금이 또렷하여 정자의 모습은 흑백사진 속 추억의 모습 같다. 금이 많이 간 필름. 그러나 부춘정은 오래 되었더라도 빛이 바랜 사진은 아니다. 옛날인 듯 선명히 떠오르는 고향 친구. 그 얼굴이 부춘정의 변함없는 모습이다.



정자의 이름은 부춘정이 아니라, 청영정(淸穎亭)이었다. 맨 처음 정자를 지은 문희개의 호를 따서 그렇게 한 것이다. 문희개(文希凱.1550-1610)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는 선조 때 사마시에 올랐고 임진왜란 때는 계부(季父) 풍암공(楓菴公) 위세(緯世)를 도와 의병을 일으켜 많은 적을 섬멸하였다. 그리고 그 전공(戰功)으로 고창현감에 제수 되었는데 곧이어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왜적이 침범해 성(城)을 포위하자 문공은 아들 익명(益明).익화(益華) 등과 함께 싸우다 적의 칼에 맞아 심한 부상을 당했으나, 굴하지 않고 분전하여 마침내 적을 물리치고 성을 사수했다.

부춘정의 창건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문공(文公)이 벼슬에서 은퇴한 1598년(선조31) 이후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나중에 이 정자를 사들인 청풍김씨들이 부춘정(富春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봄에 부춘정을 찾으면 후회하지 않는다. 벚꽃 만발한 정자 주변은 온통 꽃천지라서, 작은 술잔 하나를 들고 있어도 금세 잔 위에 꽃이 핀다. 그래서 부춘정은 봄에 찾아야 제 맛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기도 하지만, 부춘정을 즐겨 찾는 이들은, 눈 많이 내린 겨울날 즐겨 찾는다. 겨울 부춘정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눈 오는 날이면 부춘정이 그리워 몸살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자연과 어우러진 정자의 아름다움이 계절을 탓하랴. 비 오는 날 찾은 부춘정이나, 여름 가을의 부춘정도 색다른 묘미를 보여준다. 정자 앞 강 안에는 조선의 명필 옥봉 백광훈(1537-1582)이 썼다는 용호(龍虎)라는 글씨가 물과 함께 흘러가고 있다. 옥봉은 문희개의 인품에 감동하여 '비 개인 맑은 강에 강물은 잔잔한데 강가 짙은 꽃 속에서 푸른 물로 목욕하네'라는 내용의 시를 짓기도 했다.



이쯤에서 정자의 건립연대에 대한 의문 하나가 든다. 대개의 사람들은 부춘정의 창건 년대를 1598년 이후로 보고 있는데, 그것은 문희개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왔을 때 이 정자를 지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자의 창건 년대를 1598년 이후로 보았을 때 옥봉과의 연관성에 문제가 생긴다. 옥봉이 분명 부춘정과 직접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옥봉은 1582년에 운명하였으므로 죽은 옥봉이 정자 앞 바위에 글씨를 썼다고 보아야 하는데,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렇다고 정자가 없는 마을 앞 바위 앞에 옥봉이 글씨를 썼다는 주장도 궁색할 수밖에 없다. 조선 최고의 명필이 교류가 있는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 앞이라고는 하나, 쉽게 붓을 들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바위에 새겨진 '용호(龍虎)'는 문희개의 호이다.

용호 문희개는 선조 병자년에 사마시에 올랐는데, 사마시는 진사시와 같은 말이다. 그리고 선조가 즉위한 후 유일한 병자년은 서기 1576년이므로, 용호 문희개는 1576년에 진사가 된 후 낙향한 것으로 보인다. 정자는 이 무렵에 지어졌을 것 같다. 진사가 되어 고향으로 내려온 용호와 옥봉이 교류를 맺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진사가 된 용호 문희개(龍虎 文希凱)가 벼슬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당시의 정국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용호의 막내 숙부인 풍암공(楓菴公) 위세(緯世)는 尹孝頁의 외손이었기 때문이 일찍이 외숙부인 귤정 윤구에게 수학한 뒤 미암 유희춘(1513-1577)과 퇴계 이황(1501-1570)에게 수학하였다. 풍암공은 1567(명종22)년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길에 나가기보다는 오직 학문연구에 전심을 다했다. 사실 벼슬에 나가지 않았던 이유는 당시의 조정이 서인들의 손아귀에 있었기 때문이다.

동인인 이황과 유희춘에게서 공부를 하였으니, 당연히 풍암공은 동인으로 분류 되었을 것이고, 그의 조카인 용호 문희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뜻을 품고 있더라도 뜻을 펴기 어려운 시기였던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시기를 기다리며 후학을 지도하고 풍류를 즐겼으리라. 가까이에는 시문과 글씨에 능한 옥봉이 있었으니 열 세 살의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어울렸을 것이다.

이런 것들을 종합하여 보았을 때 정자의 창건은 1598년 이후가 아니라, 1576년 무렵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장마에 불어난 물이 '용호(龍虎)'라는 글씨가 적힌 바위 언저리에 간지막(간지럼)을 먹인다. 물과 함께 흐르는 글씨는 금세라도 찰랑거리는 소리를 낼 것만 같다.



천천히 정자로 향한 계단을 오른다. 그런데 이 때쯤이면 나타나야 할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부춘정에 올 때마다 얼굴을 보여주던 사내 하나가 있다. 나이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이 마을에 사는 것만은 분명하다. 내가 '춘정맨'이라는 별칭을 지어준 그는, 순진하기 그지없고 부춘정에 온 사람들에게 관심이 유별나다.

어느 해 봄, 그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난다. 벚꽃이 흐드러진 봄날의 부춘정을 놓칠 수 없어서, 몇 사람이 함께 부춘정을 들른 날이었다. 차가 마을 앞 다리를 건너자, 한 사내가 달음질을 치며 차를 따라왔다. 룸미러에 보이는 그의 모습은 굼떠 보였다. 우연의 일치이겠거니 생각을 한 나는 차를 세우지 않고 곧장 정자 아래까지 차를 몰았다.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자, 이미 숨이 턱에 찬 그 사내가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경계심이 일었다. 그래서 그를 째려보면서 '왜요?' 하고 물었다. 함께였던 일행들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그러자 사내의 대답은 의외였다.

"어, 어-서(어디서) 왔어요?"
마치 일곱 살 난 어린 아이가 낯선 사람을 만나 신기하여 물어보는 그 눈빛이었다. 그제야 우리는 경계를 풀었다.

그는 우리가 정자를 둘러보는 동안, 쉬지 않고 말을 하였다. '쩌 교회 목사가 나를 오락하드니, 막 패불드랑께요.'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들이 구경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봄날 그렇게 만난 뒤로 그와의 인연은 이어졌다. 내가 부춘정에 갈 때마다 그는 어김없이 담박질로 뛰어와서 말을 걸었다. 어떨 때는 강가에 있는 소 옆에 서 있다가 뛰어 왔으며, 또 어떨 때는 말려둔 나락을 포대에 담는 것을 도와주다가도 뛰어왔다. 가을에도 뛰어왔고, 봄에도 뛰어왔다. 그런데 오늘은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계단 중간에 서서 뒤돌아본다. 지금쯤 뛰어올 법도 한데, 어디에도 그의 모습은 없다. 비가 온 탓에 집에 있으려니 생각을 한다. 부디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다.

맑은 날이면 매미 소리가 출렁거려서, 물 깊은 곳의 정자는 마치 배가 된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빗소리만 간간이 처마에서 떨어질 뿐, 찾는 이 많지 않는 부춘정은 조용하다. 뜰에는 괴석 몇 개가 있고, 정자 뒤편에는 문희개 선생이 선조 임금을 그리워하며 매일 북향재배 했다는 '망군대 비(望君臺碑)'가 서 있다.

부춘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평면구성은 측면2칸 정면 1칸은 대청마루이고, 정면 2칸 측면 1칸은 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온돌방 앞뒤로 마루가 정면 2칸 측면 반칸씩 깔려, 방은 마루가 3면을 둘러싼 형식이다. 한편 강이 보이는 쪽에는 반칸짜리 누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방으로 들어서니 문턱 하나로 분리된 방. 방은 둘이면서 하나이다. 바닥 빛깔이 좋다. 깔린 것은 흔한 장판이 아니라, 죽석(竹席)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는 호계(虎溪) 마을은 예부터 죽석으로 유명하였다. 호계죽석은 그 짜임새가 빈틈이 없어서 죽석 위에 물을 부어도 새지 않았다고 한다. 물을 부어도 새지 않는 그런 죽석 같은, 신실한 사람을 만나고 싶은 날이다.



# 찾아가는 길 : 1. 광주에서 동부순화도로를 타고 화순쪽으로 가는 29번 국도를 탄다. 화순, 능주를 지나면 이양이 나오는데, 이야에서 장흥쪽으로 가는 839번도로를 탄다. 이정표를 따라 장흥으로 가서, 장흥 읍내에서 광주로 향하는 23번 국도를 타고 가다보면 장흥 시내가 끝날 무렵에 다리 하나가 나온다. 다리를 지나서 천천히 가다보면 오른쪽에 부춘정을 가리키는 커다란 입석이 있다. 나주쪽에서 23번 국도를 타고 장흥 쪽으로 가는 길도 있는데, 탐진댐 공사로 인해 길이 물에 잠길 염려가 있으므로 권하고 싶지 않다.

#버스편 : 광주에서 장흥으로 가는 버스는 수시로 있다. 장흥 터미널에서 부산면 가는 군내버스를 타면 된다. 버스로도 충분히 다녀올 수 있다.

<장흥신문 2002-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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