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하나 돌 하나라도 훼손하면
내 아름다운 자손이 아니다"

글-이정우

탐진강변 정자문화

담양이 죽림고을이고, 순창이 고추장 마을이듯 장흥은 그 자신에 대한 수식어로 '문림의향'을 채택하고 있다. 문림의향, 어떠한 논리와 근거로 이 말이 시작되었는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외지의 언론들도 이미 수년전부터 장흥에 문림의향이라는 고색창연한 수식어를 다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장흥군 내부의 여러 목소리들도 문림의향을 외쳐대는 데 너나없고, 주저함이 없다. 이런저런 행사에 의례적으로 들어있는 기관·단체장들의 축사에서부터 군의 홍보물, 공식적인 성격을 띤 기록물에 이르기까지 '문림의향'의 행렬은 그칠 줄 모른다.

文과 義는, 그것의 실체가 명징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역사적·정신적 개념이다. 文의 경우 각종 문헌과 숱한 작품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오감을 통해서 느끼는 '물건'이 아니고 결국은 뇌활동이라는 거름종이를 거쳐서 음미·평가되는 정신적 자산이다.

義도 마찬가지. 임·병란 때 장흥인들의 호국활동이 어느 지방에서보다 활발하게 전개된 일이 역사문헌에 엄밀히 기록되어 있고, 갑오년의 마지막 전투가 장흥읍 석대들에서 벌어졌다는 점에 대해 누구도 의심하지 않지만, 이 역시 손에 잡히거나 눈에 보이는 물질적 실체가 아니다.

그래서 문학과 역사의 뒤안에는 언제나 비, 탑, 또는 祠와 같은 실체적 조형물이 뒤따르게 된다. 항일투사 김재계 선생 송덕비, 기양사, 동학농민혁명기념탑, 한승원 문학비…! 그렇게라도 하면 추상적인 그 정신과 의지들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세월이 지나고 세대가 바뀌면 혹여 잊혀질까봐… 참으로 애절한 몸부림이 아닐 수 없다.

문림의향 증거는 탐진강변 정자

문림의향을 증거하는, 말하자면 그 혼과 채취를 느낄 수 있는 구조물은 무엇일까. 우리가, 장흥사람들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말=문림의향'이 있다면, 분명 '실체=문림의향'이 있을 터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있다." 탐진강 구비구비에 자리잡고 있는, 강길을 걷거나 혹은 자동차로 드라이브를 하다가 저절로 탄성이 나오는 절경·비경이면 어김없이 세워져 있는 영귀정 용호정 경호정 부춘정 동백정 창랑정 독취정 사인정 등이 바로 그 실체이다.

이상구 前장흥문화원장은 "학자나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는 집이며, 이들의 활동장소로서 학문을 연마하는 강학소, 무술을 익히는 사장 등"으로 누정의 쓰임새를 진단했고, 전남대 사학과 이상식 교수는 특히 전남지방의 누정에 대해 "정치적 변혁과 불의에 반항해 정의와 충절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이곳에 은둔하면서 그들의 분노를 삭이고 한을 달래는 장소로 활용"했다고 강조했다.

과연 담양의 소쇄원은 기묘사화의 한을 달래기 위해 조광조의 제자 양산보가 지었고, 을사사화와 관련하여서는 식영정에 몸을 숨긴 임억령, 면앙정의 주인공인 송순이 있고, 그 제자인 정철의 환벽당과 송강정이 유명하다.

이러한 연유로 예의 누정 인근은 가사문학권, 정치적 반항아들의 집회소라 하여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고 있는 실정이며, 오히려 무분별한 개발을 염려할 정도로 전남도와 담양군은 유지보수 및 홍보에 큰 힘을 쓰고 있는 형편이다.

장흥의 누정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세조의 찬탈에 분노하여 장흥에 은거한 김린은 동백정을 지었고, 같은 이유로 김필은 사인정을 지었으며, 다산보다 20여년 선배인 위백규는 장천재에서 당대의 시국을 통렬하게 비판한 「만언봉사」를 탈고하였고, 기봉과 옥봉 형제는 부춘정 등지를 출입하며 천하일품의 가사문학을 토해내 명실공히 '장흥가단'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누정을 오가면서 서로간의 교류와 사문의 저술로 가사문학의 발달을 가져왔고, 또한 그들의 고고한 선비정신과 개혁성향은 그들의 후손이나 제자들은 물론 주위의 깊은 영향을 줘 이곳을 문림과 의향으로 가꾸어 나가게 했다.

장흥지역 정자 문화 의향 기틀

이처럼 문림의향의 실체적 증거로써 누정을 제시하는 것은 억지일까. 기왓장 몇 조가리로 조선의 홍길동을 장성의 홍길동으로 도둑질하는 판국에, 탐진강 줄기를 따라 멋들어지게 지어진 여덟 채의 정자와 강성서원(유치), 장천재(관산) 등을 엮어 “이래서 장흥이 문림의향이다”고 주장하는 것은 맹랑한 짓일까.
담양의 가사문학권처럼 탐진강변 정자문화권을 트래킹 코스로 개발한다는 기획안을 내 놓는다면 “한번 해보자”는 장흥의 지도층은 몇이나 될까. 말끝마다, 자리마다 ‘문림의향’이고 보면 그리 비관적이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실은 비관적이다. 유치 단산 마을과 마주하고 있는 영귀정은 수몰 이후 갈데가 없는 처지이고, 백림소와 행원리를 굽어보고 있는 창랑정은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아 창호지도 없는 문짝은 막 떨어져 나가려 하고 있고, 상량문이나 亭記는 온데간데 없으며, 끊어진 전기배선, 깨진 유리병과 플라스틱이 뒹구는 가운데 ‘제일강산’이란 현판만이 힘겹게 매달려 있는 처참한 풍경이다. 더군다나 관리사라는 곳에는 근본을 알 수 없는 광인(狂人)이 거처하고 있으니, 그나마 틈틈이 사람의 발길마저 끊긴 지 오래다.

석대들과 독실포가 내려다 보이고, 거기서 두시 방향으로 아지랭이처럼 장흥읍이 한눈에 들어오는 독취정은 지붕을 빼곤 아예 폐허가 돼버렸다. 무너져 내리고 뜯겨 기능을 상실해버린 마루와 구들에는 야생염소의 배설물만 가득하고 사방엔 밀월을 즐기고 간 청춘남녀들의 낙서들로 어지럽다. 이래도 되는 건지, 이러고도 우리가 문림의향을 입에 담을 자격이 있는건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는 절망적인 풍경이다.

취재를 끝내고 나서, 유난히 차가웠던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독실포를 건널 때 영귀정 상량문의 글귀 한구절이 기자의 가슴에 바람보다 차가운 비수가 되어 박혔다.

“옛 사람 思亭 지은 마음을 따랐으니 꽃 하나 돌 하나라도 훼손하면 내 아름다운 자손이 아니다.”

<전라도닷컴 2000-12-15 >

전 장흥신문기자

전 전라도닷컴 기자

전 시민일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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