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잘 살아 보자고 무작정 상경했을 때가 벌써 5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요즘 유행되는 노래 보릿고개를 탈피하고자, 이 가게 저 가게 이 공장 저 공장을 옮겨 다니며 배꾸리를 채웠던 그 시절, 그때는 노동법도 인권도 모두가 캄캄한 세상이 아니었던가 생각해 본다.

나는 내가 가진 능력이 분명히 있는데 하루에 대여섯 시간 자고 일해야 되나 어리지만 고민에 고민을 하다가 야간에 일하고 주간에 쉬는 “술집” 홀에서 일하기로 했다. 저녁 6시경부터 23시까지 일하고(당시엔 통행금지가 있어 대부분 23시까지만 영업을 했음) 낮에는 쉬기 때문에 학원에 다녔다. 그러기를 2~3년 그 일도 여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술장사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 수 있었다. 취객들의 저녁마다 싸우는, 어떻게 보면 꼭 전쟁터 같은 느낌마저도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이 17~8세에 술과 담배를 벗 삼을 수밖에 없는 일상생활이 아니던가. 건강은 몰라보게 야위어가고 서울 생활이 마치 지옥과 같이만 느껴졌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건강을 찾고자 경기도에 있는 사찰로 수양의 길을 떠났다. 달 밝은 밤에 휘영청 떠있는 달을 보며 향수에 젖었고 새벽에 목탁소리 염불소리는 어찌 보면 내 구곡간장을 찢는 듯 들리기도 했다. 여기서,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 손을 잡고 신흥사 절에 다녔을 때 들었던 목탁·염불 소리이기에..... 그럴 때면 더 가슴을 파고드는 아픔, 11세에 어머니 잃고 15세에 아버지 잃고 소히 말하는 조실부모(早失父母)의 아픔이 목탁과 염불에 실려 내 귓가를 후벼 파는 것에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겨우 졸업하자 조실부모하고 감독없는 선수 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그 고통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어려운 길을 걸을 수밖에 없으니 난감할 수밖에.....

고향에 내려가고 싶었으나 실패한 사람이 어떻게 고향에 가나 한편으론 자존심도 상하고 그러다가 건강에 관한 책을 읽게 되었다. 그 책 내용에는 내 몸이 병들고 아프면 고향으로 내려가 고향의 반경 4km내에 있는 채소 등을 섭취하라는 내용이 있어 자존심이고 뭐고를 떠나 고향으로 달려갔다. 친구들 대부분은 결혼을 하고 후배들도 결혼하여 사는데 나는 형수님의 밥을 먹고 내 병 치료에 여념이 없으니 스스로도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몇 번이고 묘한 생각도 수 십 번 했지만 어렸을 적부터 보아왔던 아름다운 강 탐진강ㆍ제암산ㆍ사자산ㆍ억불산을 보면서 다시금 용기를 얻고 좋다고 하는 약초 등을 직접 찾아다니며 채취하고 탐진강에서 고기도 잡아(탐진강 고기는 친구 후배들이 잡아주었음) 다려서 복용하기 시작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고사성어를 생각하며 내 나름 최선에 최선을 다했다. 건강을 찾아 하늘이 나에게 준 나의 능력을 조금이나마 발휘하여 나보다 어려운 사람에게 재능기부를 하자는 생각들이 나의 뇌리를 요동친다. 

이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잘 이루어져 나의 건강은 생기를 얻는 것을 분명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자칫 건강에 자만할 것 같아 마무리 차원에서 용산면에 있는 작은 사찰(寺刹)로 가서 2년 정도 내 스스로 각본을 짜서 건강을 찾기 시작했다. 부용산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공부도 하고 승려같은 하루하루를 보냈다. 

지금의 우리 장흥군 슬로건이 ‘맑은 물 푸른 숲’인데, 그 맑은 물과 푸른 숲의 도움으로 하루가 다르게 예전의 건강상태로 돌아옴에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고향의 모든 사물들, 자연에게 감사했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다. 만약 내가 고향으로 오지 않았다면 오늘날 내가 있었을까 하고, 그러면서 나를 다시 재생할 수 있게 해 준 고향을 위해 열심히 살자고 다짐을 했다. 그러나 몇 년의 공간이 녹록치 않았다. 30세가 된 내 나이, 가진 것도 없고 모든 것이 제로에서부터 시작하려니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80년대 그때 30세면 노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모두 잊고 일과 공부에 나를 맡겼고 결과는 어느 통신회사에 근무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 맞선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동안에는 거들 떠 보지도 않았던 나의 인생이 이제야 빛을 보나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에 젖노라니 쓴 웃음도 나고 세상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무정함도 맛보면서, 삶의 끈을 단단히 조여갔다.

그리고 기어이 결혼에 성공했다. 1986년 12월 28일! 나로서는 역사적인 날이 아닐 수 없었다. 드디어 나도 가정을 갖는다니 꿈만 같았다. 사글세 방에서 연탄불로 모든 난방을 해결했고 통신회사에 근무하면서도 10년을 전화도 없이 살았다. 그동안 아내의 고생은 어떻게 얘기하기도 미안할 정도였으니, 가끔은 내가 어렸을 때 노닐던 탐진강변을 억불산을 배회하면서 미래를 설계하며 아내와 함께 주먹을 불끈 쥐는 날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10년 동안 노력한 결과 곧 나의 집을 장만하는데 성공하였다.
고향인심은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여기저기서 값싼 사채 대출도 해준다. 지금도 고맙기 짝이 없다. 그리고 나는 내가 생각했던 재능기부를 10여년을 한다. 

여름ㆍ겨울방학을 활용하여 초등학생들에게 남녀비율 반반으로 20여명으로 정하여 한문교육을 했다. 물론 한자 교습서도 내가 직접 발행하고, 아이들하고 보내는 그 시간은 보람과 희망 자체였다. 휴일이면 아이들하고 억불산에서 탐진강에서 쓰레기도 줍고 이웃동네 경로잔치에 직접 찾아가 설거지도 하며 자연을 벗 삼은 교육, 인생교육도 쉼 없이 하며 나의 젊은 날을 보냈다. 
2016년 7월 9일에는 대한민국에 있는 우리 마을사람들 신흥(신흥의 옛 마을명은 연산) 사람들 다 모여서 우리가 어렸을 적 탐진강변에서 고기 잡아서 끓여 먹었던 매운탕에 막걸리 한 잔 하자며 전국에 있는 우리 마을 사람들에게 초봄부터 연락하며 분위기를 조성하여 드디어 7월 9일이 다가오는데 염치없는 태풍 네파텍은 우리 한반도를 정조준하고 있지 아니한가. 난감할 수밖에. 그러나 우리는 독려했다. 

장흥의 신흥 사람들의 흥을 네파텍도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라 하며 곳곳에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드디어 그 날 7월 9일 하늘은 활짝 게였고 전국에 있는 우리 신흥사람들은 인산인해였다. 
6~70년대 보다 잘 살아보자고 떠났던 때가 벌써 4~50여년 그때를 추억하며 모인 고향인들 마치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서나 볼듯한 장면들이 여기저기에서 감동의 물결이였다. 세대수 20여 가구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일이 벌어진 것 같다고 모두 이구동성으로 얘기한다. 1박2일이 이렇게 짧게 느껴진지도 처음인 것 같다. 

이 모든 것들이 고향의 덕분으로 생각하며 나는 살아간다. 가끔은 아주머니들이 결혼하는데 힘들지 않았느냐고, 더욱이 33살의 노총각이, 나는 주저없이 얘기한다. 지금의 내 처를 만나고자 33년을 참았다고 그런 얘기를 할 때마다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때로는 존경심이 들 정도로 고마운 아내다.
이런 모든 것들은 나의 고향 장흥을 찾고부터 그 열매를 얻을 수 있었으니 내 고향 장흥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수많은 신흥사람들이 심지어 90이 넘은 어르신들이 고향을 찾으며 하신 말씀이 우리가 죽으면 고향으로 올 수가 있을까? 4~50년만에 “고향에 와보니 너무 좋아.” 하시며 죽음을 얘기한다. 우리 장흥은 공원묘지가 있다. 그래서 그 어르신에게 훗날 다가올 일에 대하여 공원묘지를 추천하니 아들 딸까지도 찬성을 한다. 소원대로 공원묘지에 편히 모셔져 계신다.

“장흥(長興)” 길게 흥하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남겨둔 땅 장흥, 우리 고향이 이제 비로소 그 빛을 발휘하기 시작한다고 스스로 자위해 본다, 그리고 장흥인으로 신흥인으로 태어남이 얼마나 자랑스런지도 모른다. 우리 마을 뒤에는 연산峰이 우리를 안아주고 앞에는 장흥의 젓줄 탐진강이 유유히 흐르고 저 앞에는 억불산ㆍ사자산ㆍ제암산이 잘 어우러져 우리의 꿈을 희망을 키워주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나는 지금 이장(里長) 일을 보고 있다. 큰 동네이기에 일도 많다. 그러나 보람도 많이 느낀다. 50년이 훨씬 넘은 개구쟁이 소년일 때 장흥읍사무소는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70이 다 된 오늘날의 장흥읍사무소는 우리들의 일터로 변했다.

위와 같이 고향 장흥은 나에게 우리들에게 많은 혜택과 도움을 주었다. 성공을 주었다. 작은 왕궁(가정)을 주었다. 나는 도회지에 있는 친구들에게 지인들에게 이제는 지친 도시생활을 접하고 고향에 와서 마지막 단풍을 물들이자고 외친다.
만약 내가 고향으로 오지 않았다면……. 생각하면 아찔하다. 산에서 들에서 강가에서 유년 시절의 꿈들이 이제야 비로소 활짝 펴진 것 같다.
도회지에 사는 고향인 여러분 고향도 늙어갑니다. 더 늙기 전에 고향을 찾고 고향에서 마무리하는 지혜를 우리 모두 가져봅시다.
어머님 품속 같은 장흥 맑은 물 푸른 숲의 장흥 고향 장흥이 있어 즐겁습니다. 내 고향 장흥이여 영원하라        

▲장흥우드랜드편백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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