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정/한학자

[지난 호에 이어]

갈명(碣銘)하기를,

西竺之敎流東瀛 인도의 종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自東而南南土傾 우리나라에서 남으로 가니 남토가 귀복했다.
恒星夜發隨雨零 항성은 밤이면 빛나 비 따라 쏟아지니
雨零點點散光晶 비 따라 쏟아지면 하나하나 광채를 발산한다.
大千世界昭厥靈 대천세계에 그 영험함 밝게 드러나니
逍遙開士法門楨 소요당 보살은 법문의 기둥이라.
宴坐南嶽不下庭 지리산에서 조용히 참선하며 뜰에 내려오지도 않았으니
蠅附蟻慕誰使令 파리가 붙고 개미가 달려드니 누가 그렇게 시켰더냐.
點鐵琢璞寶乃成 쇳덩이 다루고 옥을 쪼아 보배를 만들듯이
惠爾瞽聾視而聽 은혜 베풀어 눈멀고 귀먹은 너희들 보고 듣게 했구나.
臘月晦日超化城 섣달 그믐날 열반에 드시니
彈指萬劫了死生 짧은 순간에 만겁의 생사를 마쳤구나.
有大弟子後事營 훌륭한 제자들이 뒷일을 경영하여
攻珉鑱辭垂千齡 옥돌 다듬어 끌로 새긴 글 영원토록 전해
藤葛無絶昧者明 등덩굴은 부러지지 않고 어리석은 자도 밝힐지어다.

注)
不肯三宿桑下 - 《후한서(後漢書)》 卷30 양해열전(襄楷列傳)에 “불법(佛法)을 닦는 승려가 뽕나무 아래에서 사흘 밤을 계속 묵지 않는 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애착이 생길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니, 이는 그야말로 정진(精進)의 극치라고 할 것이다.〔浮屠不三宿桑下 不欲久生恩愛 精之至〕”라는 말이 나온다.

역자 注)
위 비문은 소요당 문집에는 실려 있지 않고 領議政 白軒 李景奭이 쓴 글만이 남아 있다.

◇李敏求(선조22년1589~현종11년1670) 향년 82
본관은 전주. 字는 자시(子時), 號는 동주(東州). 아버지는 국사책에 실학자로 분류되는 지봉 이수광이다.
21세 때 己酉 增廣試에 [進士] 壯元하고 24세 때(광해군4년1612) 壬子 增廣試 甲科 1[壯元]位(1/33)를 했다. 진사시와 대과에 장원한 보기 드문 수재였으나 벼슬길에서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부제학·대사성·도승지·예조참판 등을 지냈고 문장에 뛰어나 사부(詞賦)에도 능했다.
평생 쓴 책이 4,000권이 되었으나 병화에 거의 타버렸다고 한다. 저서로는 ⟦동주집(東州集)⟧등 다수가 있다.

❍소요당 태능 법사 시문
-소요 태능(1562~1649)

⦁聞鴈有感 기러기 울음소리를 듣고 감회가 일다.

梧桐一葉暗知秋 오동 한 잎으로 은연중 가을알고
鴈帶西風過小樓 서녘 바람에 기러기 떼 작은 누대 지난다.
病客不堪鄕思苦 병자 고통스런 향수 감당 못하니
夜窓明月送閑愁 밤 창가 밝은 달로 부질없는 시름 삭인다.

⦁贈別圓上人 원철 상인에게 시를 지어주고 헤어지다.

塞外逢君如舊識 변새 밖서 그대 만나자 옛날 알던 이 같아
只緣同是漢南人 다만 인연 함께하다보니 한강 남쪽 사람이라.
欲知別后相思處 이별 후 생각난 곳 알고자했더니
明月空山有杜鵑 텅 빈산 밝은 달 아래 두견새 울고 있다네.

注)
원철법사圓徹法師 - 天冠山 名僧 圓徹大師( ? ~ 1607 ? )이다. 法號는 청련(靑蓮)이고 항상 옥계동천(玉溪洞天) 선암(仙庵)에 살았다. 다수의 신화와 전설이 전하는 高僧으로 문집이나 행장은 남아있지 않다. 天冠山 仙庵은 正堂이 五間, 東 別室이 五間, 앞 누각 벽허루(碧虛樓)도 五間의 규모를 갖춘 대가람에 버금가는 사격(寺格)을 갖춘 암자였지만 영조35년(己卯1759)에 훼손되었다.
⟪대둔사지략기(大芚寺志畧記)⟫에 ‶自新羅末迄于我朝初事蹟無文可考明萬曆三十一年宣祖大王三十六年癸卯靑蓮圓徹祖師兵亂後更建
신라 말부터 조선조 초 사적에 이르기까지는 상고할 만한 문헌이 없고  명나라 만력31년 선조대왕36년(계묘1603)에 청련 원철조사가 병란 후에 다시 대둔사를 중건했다.″ 라는 기록이 있어 이때까지도 활동했음을 알 수가 있고
또 ‶만력35년(선조40년丁未1607) 겨울에 靑蓮 圓徹祖師는 海南縣 大芚寺에서 大芚寺 大會를 열었다.″고 ⟪海運禪師傳 海運敬悅1580~1646⟫에도 나타난다.
원철대사의 사리탑 청련당(靑蓮堂) 부도(浮屠)는 天冠山 仙庵 西臺에 있었다.

⦁寄沈校理謫所 二首
심 교리 유배지에 부치다. 2수

人間成敗捴關天 인간 성패는 모두가 하늘의 소관이니
須把中心合自然 모름지기 중심을 잡고 자연과 합치하라.
聖代即今多雨露 태평성대인 지금에는 은택도 많으니
想應雞赦在當年 생각건대 응당 사면소식은 올해 있으리라.

그 두 번 째 시(二)

流落遐荒問幾春 먼 변방으로 유배 된지 몇 해냐 물으니
綵雲空望未歸人 돌아가지 못한 사람은 오색구름만 부질없이 바라본다.
世路如今登百尺 지금 같은 인생살이는 백척간두에 올랐으나
方知勝作一窮鱗 이제는 한 마리 곤궁한 물고기 신세보다 낫게 될 터임을 알겠다.

注)
綵雲(채운) - 임금이 있는 곳. 궁궐.

역자 注)
심 교리는 인조22년(1644) 장흥으로 유배 온 심동구沈東龜(1594~1660)이다.
인조19년(1641) 교리(校理)로 등용되고 서장관으로 심양(瀋陽)에 다녀와서는 인조22년 사간에 올랐다.
심기원(沈器遠)의 모역옥사에 친척으로 연루되고 나서 장흥으로 유배와 동문 밖 적소에서 아들 오탄梧灘 심유沈攸(1620~1688)와 품격 있는 장흥관련 시문을 대량 생산했다.
그 당시 소요당 대사와 교류가 있었던 것 같다.

⦁示辯少師 三
침굉 현변 소사에게 보여주다. 3

憐渠本色弄䖳手 가련타 그대 본색은 해파리 손 농락하니
動地驚天沒量材 경천동지하는 재능은 헤아리기가 어렵구나.
石火電光已入手 전광석화는 이미 손안에 들어왔으니
竿頭進步轉身來 백척간두 진보는 몸바꿈을 성취해야하리.

注)
少師 - 구족계를 받은 지 10년이 안 된 비구를 뜻한다. 스승이 제자를 지칭할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그 두 번 째 시(二)

早透二年同一春 일찍 두 해가 같은 봄이라는 문답을 뚫었으니
花開鐵樹更添新 철수가 개화하면 다시 새로움은 더하겠구나.
蕭然獨步三千外 쓸쓸하게 시간과 공간 밖을 홀로 걸어가니
喚作威音向上人 부처 뜻을 깨달은 향상인 위음 왕불로 불린다.

注)
花開鐵樹 - 열대식물이고 거의 꽃이 피지 않는 식물이어서 철수가 꽃을 피운다는 철수개화(鐵樹開花)는 보기가 쉽지 않은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현상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威音 - 당당한 왕의 위풍과 장엄한 음성으로 법화경을 설한다고 해서 위음왕불(威音王佛)이라고 한다. 과거 대겁인 장엄겁 이전 공겁(空劫)때의 부처님이다.

그 세 번 째 시(三)

南山鼈鼻一條蛇 남산에 한 마리 별비사가 있다니
多少叢林不柰何 다소간에 총림은 어찌할 수가 없구나.
凛凛威風張意氣 늠름한 위풍은 의기를 펼치고
非君誰是作仙陁 그대가 아니라면 누가 이 선타가 될 것인가.

注)
鼈鼻蛇(별비사) - 뱀의 일종. 자라와 같은 코끝을 한 뱀으로 독이 강해서 한 번 물리면 반드시 죽는다.
仙陁 - 불타선타루다(佛馱仙陁樓多)이다. 주로 사람이 말다툼하지 않도록 보호한다.

역자 注)
침굉 현변(1616~1684) 선사는 천관산 탑산사로 보광처우를 따라 출가해 13세 때 지리산 연곡사 소요당을 찾아뵙고 그의 문하에 들었다.
침굉은 다수의 상수제자(上首弟子)들을 배출하여 조선후기 소요당 선맥이 강진 만덕산 백련사를 기반으로 주요 문중으로 도약하는 토대를 마련했고 입적 후 시신을 들판에 버려 동물들에게 보시하라는 유계(遺戒)를 남겼을 만큼 철저하게 참선을 중시했다. 제자들은 유훈에 따라 다비하지 않는 대신 시신을 금화산 바위틈에 안치하고 봉했다고 한다.

▲천관사 장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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