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면 상금리 백수장 별묘ㆍ해남 옥천 송산리 옥산서실 등 유명 

▲기봉 백광홍
▲옥봉 백광훈

가을에 만나는 전남의 마을은 장흥 안양면 기산리다, 이곳에서 분가하여 큰 마을을 이룬 장흥 용산면 상금리와 해남 옥천면 송산리도 수원백씨들의 자작일촌이어서 함께 취재했다. 이들 마을은 모두 수원백씨 집성촌이다. 장흥에 백씨들이 많이 살고 있어 장흥 백씨라고도 하지만 모두 수원백씨에서 비롯되었다.
사자산 아래 안양면 기산(岐山)리는 기행가사 문학의 창시자로 ‘관서별곡’을 지은 백광홍 (1522~1556년)을 비롯한 조선 시대 '일문 사문장‘(一門 四文章)’ 을 배출한 명문가의 고향이다.
네 문장가는 백광홍과 친동생 백광안(白光顔), 백광훈(白光勳), 그리고 종제(從弟) 백광성(白光城)을 일컫는다. 특히 친동생 옥봉 백광훈은 ‘옥봉집’에 500여 수가 넘는 시 등을 지어 남겼는데 조선 중기 10대 시인 가운데 한사람이다.
기산리는 장흥읍에서 안양면 방향으로 가다가 기산 사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된다. 사거리에서 100여m 지나 동계마을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마을 입구에 기양사(岐陽祠)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여기서 300여m를 들어가면 마을이 있다. 기산 마을에는 신잠이 유배와서 후학들을 기른 봉명재 서당 표지석과 기봉의 생가가 있고 그 종가에 명종이 하사했다는 선시십권(風雅翼 풍아익, 국가문화재 보물 제1664호)이 보관되어 있다.

▲기양사

●기산 팔문장 등 13위 배향 기양사
기양사는 불복신(不服臣)으로 알려진 정신재 백장(白莊) 선생을 주벽으로 13현(顯)의 위패를 좌우로 봉안했다. 원래 기산 八文章인 남계(南溪) 김 윤, 서곡(書谷) 임 분, 죽곡(竹谷) 임 회, 기봉(岐峯) 백광홍, 동계(東溪) 백광성, 풍잠(風岑) 백광안, 옥봉(玉峯) 백광훈, 지천(芷川) 김공희 등 8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지역의 유림과 후손들이 1808년(순조 8년)에 창건했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매안하였다. 1901년에 복설하면서 정신재(靜愼齋) 백 장을 비롯하여 정해군(貞海君) 백수장, 사주당(思周堂) 백문린, 석담(石潭) 백한남, 술고당(述古堂) 백민수 등 5位를 추배하여 13위를 향사해오고 있다.
기양사는 1972년(壬子) 3칸의 사우로 중건되었으며 2년 뒤 내삼문인 동광문(東光門)을 복원하면서 백채덕, 백여인의 의연비를 세웠다. 제향은 매년 음력 9월 상정일(上丁日) 유림 주관으로 봉행한다. 기양사는 1999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07호로 지정되었다. 액호는 국무총리 김종필(金鍾泌 1926~2018)이 썼으며 사당 좌측에는 1901년 기양사가 복설(復設)되면서 세운 단비가 있다.

▲기양사에서 배향하는 13위 비석

기양강당은 1958년 장흥읍 월평에 거주한 백우인(1895~1966)의 사랑채를 뜯어 옮겨 온 것이다. 이후 1999년 기양사 정화 문화사업 지원과 문중의 힘으로 5칸 강당을 신축했다. 강당의 편액은 서예가 송곡(松谷) 안규동(安圭東, 1907~1987) 선생이 썼다.
기양강당 입구에는 정해군 백수장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이 신도비는 원래 안양면 당암리 청송마을 뒤에 있었는데 6.25 전후 일부 훼손되었던 것을 근자에 현 위치로 옮겨 세웠다. 비문은 1900년 면암 최익현(1833~1906)이 지었으며 이듬해인 1901년 백수장의 14대손 중인(重寅)의 글씨와 13대손 영직(永直)의 전각, 도유사 기옥(基玉), 유사 유인(由寅)이라 세겼다. 백수장의 신도비는 장흥읍~회진 간 23번 국도변에도 같은 기록의 오석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는 17세손 백종기가 근서하였으며, 청송마을 뒤에 있던 비가 훼손된 후 1956년에 다시 세웠다.

▲기양사 입구 정해군 신도비

기양사는 대지 2,000여평에 사당 3칸 1동, 강당 5칸 1동, 내삼문(東光門), 외문, 직사 1동, 기타 부속건물 2동과 신도비 1기,의연비 등 비석 5기, 표지석 4기, 안내판 1점, 주차장 등으로 조성되어 있다. 기양사 복원사업은 허경만 전남지사 시절 백광준장흥신문대표 등이 앞장서고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완성했다.

●2004년 6월의 문화인물 백광홍의 고향
백광홍은 아버지 백세인(白世仁)과 어머니 광산 김씨(김광통의 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대유(大裕), 호는 기봉(岐峯)이다. 어려서 ‘봉명재(鳳鳴齋)’라는 서당에서 공부했다. 당시 봉명재에는 신숙주의 증손자인 신잠이 이곳에 유배되어 17년간 머물면서 많은 후학들을 길렀던 곳이다. 훗날 신잠이 태인 현감을 지낼 때 태인의 이항(李恒)에게 백광홍을 소개해 그의 문하에 들었다. 이후에는 김인후(金麟厚)ㆍ이이(李珥)ㆍ기대승(奇大升)ㆍ임억령(林億齡)ㆍ정철(鄭澈)ㆍ양응정(梁應鼎)ㆍ최경창(崔慶昌) 등 당대의 대문장가들과 교유하였다.
기봉은 벼슬보다 학문에 더 뜻을 두었으나 부모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28세 때인 1549년(명종 4년)에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고 31세 때인 1552년(명종 7년)의 식년문과 을과에 급제해 홍문관 정자로 임명되었다.
그가 더욱 유명해진 것은 1552년(명종 7년) 11월 임금께서 영남과 호남의 문신들에게 성균관에서 재주를 겨루게 하였는데 공이 ‘동지부(冬至賦)’라는 작품으로 장원을 차지한 때문이다. 그는 이 일로 명종에게서 선시십권(選詩十卷)을 받았다.
기봉은 34세 때인 1555년(명종 10년) 봄에 평안도평사 발령을 받았는데 그때 지은 「관서별곡(關西別曲)」이 관서지방의 절경과 생활상·자연풍물 등을 읊은 기행가사(紀行歌辭)이다. 정철이 지은 가사 「관동별곡」보다 25년이나 앞서 기행가사의 효시로 불린다. 가사문학은 은일가사(隱逸歌辭)→유배가사(流配歌辭)→기행가사(紀行歌辭)→내방가사(內房歌辭) 등으로 맥을 잇고 있는데 관서별곡은 조선조 이후 모든 기행문학의 모체로까지 전해진다.
기봉은 그러나 안타깝게도 관서별곡을 지은 이듬해인 1556년 가을에 병이 들어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음력 8월 전북 부안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35세였다. 스승인 일재 이항은 그의 부음을 듣고, “대유는 재주와 덕이 그 짝을 보기 드물었는데 능히 크게 펴지 못하니 애석하구나.”하고 애통해 했다고 전한다. 1808년(순조 8) 기양사(岐陽祠)에 배향되었으며 저서로 『기봉집』이 있다. 1987년 11월 전국가비동호인회에서 묘가 있는 전라남도 장흥군 부산면 호계리 운치(雲峙)에 가비(歌碑)를 세웠다.
2004년 6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된 바 있다.

관서 명승지에 왕명으로 보내실 제
행상을 다사리니 칼 하나 뿐이로다
연소문 내달아 모화고개 넘어드니
귀심(歸心)이 빠르거니 고향을 사념하랴.

관서별곡 8문단 가운데 첫 문단이다.
관서 명승지에 왕명을 받들어 임지로 떠나는 심정을 읊었다,
‘생양관 기슭에 버들조차 푸르렀다’로 시작하는 2문단은 벽제와임진강 천수원을 지나서 송경 황강 구현을 넘어 생양관까지의 노정이 묘사되었다.
마지막 제8문단은 “미구상달천문(未久上達天門)하리라”까지로 서쪽 변방을 살펴보고 돌아오니 마치 신선세계에서 놀다 온 것 같으나 어버이를 생각하면 눈물이 흐르고 임금이 그립다고 읊었다.
8단락 172구 1156자로 구성된 관서별곡의 일부다. 평안도평사의 벼슬을 제수받고, 관서지방을 향해 출발하는 것부터 부임지를 순시하기까지의 기행 노정을 운치 있게 그려냈다. 단순한 노정과 사실만을 기록한 게 아니라,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적 의의가 크다.
관서별곡은 정철의 「관동별곡」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는데 이는 문장의 구성과 표현, 어귀 배열 등이 유사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가사문학은 조선후기 서민층의 판소리 문학이 크게 발전하는 기폭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조선 중기 10대 시인 옥봉 백광훈
백씨 네 문장가 가운데 또 한사람인 옥봉(玉峰) 백광훈 1537~1582)은 최경창, 이달과 함께 많은 당풍(唐風)의 시를 많이 써서 삼당시인이라 불린다. 아버지는 부사과(副司果)를 지낸 세인(世仁)이며 「관서별곡」으로 유명한 백광홍의 동생이다.
옥봉은 다섯 살 때부터 글공부를 하였으며 여섯 살 때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 옥산초당을 찾아가 부위(정3품)를 지낸 학자 정응서(鄭應瑞)의 문하에 들어 시와 글씨를 배웠다. 훗날 정응서의 딸과 결혼했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처가인 옥천면 송산리에서 지냈다. 정응서는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녹도만호 정운(1543~1592 부산해전에서 전사) 장군의 백부이다.
백광훈은 여섯 살 때 고향 장흥으로 돌아가기 위해 글방을 나서면서 문득 시상이 떠올라 이렇게 썼다.

호재정만수(好在庭萬樹)  /화개우일래(花改又一來)
뜰에 가득찬 나무들아 잘 있거라
꽃피는 봄날이면 다시 찾아오겠노라

참으로 뛰어난 시재를 지녔던 옥봉은 이후 조선 중기의 문인 이후백, 박순, 노수신에게 배웠다. 28세인 1564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시와 서도(書道)를 즐겼다. 그는 36세인 1572년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노수신의 천거로 백의제 술관(白衣製述官)이 되었는데 시와 글씨로 사신을 감탄하게 해 명성을 얻었다. 이후 선릉참봉, 정릉(靖陵), 예빈시(禮賓寺), 소격서(昭格署)의 참봉을 지냈다.
옥봉의 시들은 순간적으로 포착된 삶의 한 국면을 관조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전원의 삶을 다룬 작품들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안정과 평화로 가득 찬 밝은 분위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정귀는 그의 문집 서(序)에서 “시대와 맞지 않아 생기는 무료ㆍ불평을 시로써 표출했다.”고 하면서 특히 절구(絶句)를 높이 평가했다.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 영화체(永和體)에 빼어났다.   /다음호에 계속
글 : 지형원<문화통 발행인>, 사진 : 임철진<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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