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충무공 이순신을 처음 접한지는 대략 20년 쯤 된다. 20년전 서울에 있을 때 『난중일기(亂中日記)』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을 사서 3달만에 독파를 했는데 대략 맛만 본 것이다. 그러다가 14년전부터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했는데,10년전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고 『난중일기』부터 『임진장초(壬辰壯草)』까지 사전을 만들어서 분석을 했다. 아마도 이순신에 관한 인물과 지명 등의 자료를 사전(辭典)을 완성한 사람은 필자가 대한민국에서 처음인 것 같다.
장흥(長興)이란 단어는 난중일기에 9회 기록이 있고, 장계문에는 5회 이상 기록이 있으며, ‘장흥부사(長興府使)’로 기록된 것은 『난중일기』에 9회가 있다. ‘회령포’란 지명은 난중일기에 3회 기록이 있고, 회령포만호는 3명이 등장한다. 또한 장흥출신 인물이 『난중일기』와 『임진장초』에 기록된 것은 20여명이나 된다. 장흥에서 가장 시급한 것이 이 자료들을 정리해서 자료집을 내고 군지에도 싣고 전남도지에도 실으면 좋겠다.

장흥 회령포는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이 원균이 지휘한 칠천량해전에서 패전하자 12척을 도피시켜 은닉, 보존한 장소이고, 다시 통제사로 재기용된 이순신이 회령포진성에서 군사들을 규합하고 군수물자를 수습해서 ‘명량(鳴梁)’으로 간 역사적인 장소이다.
그런데 일부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보성의병 60명만이 회령포에 온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말하고 글을 쓰는 것은 이순신을 혼자 노젓고, 혼자 포를 쏘고, 혼자 활을 쏘며 혼자 싸운, 팔다리가 수만개 달린 ‘괴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보성 의병 60명이 판옥선 12척을 어떻게 운용할 수 있는가? 보성사람들이 팔다리가 몇 개식 달린 괴물은 아니지 않는가?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鳴梁海戰)에 가기 전에 전함 12척을 숨기고 작전을 짰던 곳이 보성이니, 장흥이니 하는 얘기가 있지만 장흥 회령포가 맞다. ‘군영구미’와 ‘백사정’도 장흥이 맞다.
그래서 장흥 회령포에 온 사람들을 연구하고 새기는 것도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연구가 선행되어야 명량해전 참전자를 새길 수 있다고 본다. 선유도와 목포 고하도에 왔던 사람들 즉 마지막 통제영인 완도 고금도에 왔던 사람들을 또한 새길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두달 동안 치러진 순천왜교성 전투와 그 마지막 날 벌어진 노량해전 참전자를 알 수 있다고 본다. 이렇게 필자는 혼자서 수년간 인물연구를 진행했다.

난중일기와 장계문에 기록된 인물연구가 호남의 임진란 전쟁사, 의병과 관군의 인물연구의 기초자료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회진포진성에는 이들을 기리는 이름 하나 없고 군청이나 문화원에서 발간한 자료집 한 권이 없으니 실로 통탄할 일이다 .필자는 회진포에 왔던 사람 100명 이상의 실명을 찾아놓았고, 명량과 노량해전 참전자도 확인해놓았다. 그러나 전남도청과 장흥, 진도와 해남군청, 여수와 순천시에 알려주어도 도무지 관심이 없다. 그리고 나주에 건립되는 광주전남의병역사관도 제대로 준비가 안되어 오류가 많은 시설물이 들어설 것이라고 염려하는 것이다.

장흥지역에서 혹자들은 “몇백명 뿐이겠습니까?우리 장흥 사람들 수만명이 이순신을 지원하고 함께했지요!”라고 말씀들을 하는데 , 그러면 보성 사람들은 “10만의 보성 사람들이 이순신을 지원했다”라고 말할 터인데 초등학생들 ‘때기따먹기’가 아니라면 근거자료를 내놔야한다. ‘우리문중에서 몇 명’이라고 하면 ‘다른 문중에서는 수십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래 자료는 ‘회령포에 왔던 사람들‘ 중에 극히 일부를 자료로서 예시한 것이다. 예시된 일부의 ’정씨’ 자료 중에 순천출신 경주 정씨 옥계(玉溪) 정승복(鄭承復)의 아들인 정사준 장군을 정점으로 여러 사람이 이순신과 함께하는 주요가문이다. 정사준(鄭思竣)?정사횡(鄭思?)?정사립(鄭思立) 3형제가 이순신과 함께 하며, 연일 정씨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조카이며 정소(鄭沼)의 아들인 妹夫 정상명(鄭翔溟)까지 4남매가 함께한다. 난중일기에 기록이 있는 조카 정빈(鄭 )과 아들 정선(鄭?)까지 6명이나 등장한다. 의병에 참가한 장조카 정돈(鄭惇)은 화순출신 전라우의병장 최경회(崔慶會)의 사위이며, 정빈은 남원성전투에서 전몰한 조방장(助幇將) 경주 김씨 김경로(金敬老)의 생질서이다. 최경회와 김경로를 포함하여 혼맥으로 얽힌 사람들을 조사해보니, 손자대에 까지 난중일기에 등장하는(기록이 있는) 사람이 20명이나 된다.
그런데 임진란과 정유재란 역사연구가들과 단체들, 이순신연구자들이 난중일기와 장계문 등의 등장인물에 관한 연구는 거의 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정유재란이 끝나고 200년 뒤에 만들었으며 오류가 많은 호남절의록과 호남삼강록 또는 승평지 등만을 들먹이고 있는데 이는 호남의 역사를 호남사람 스스로가 왜곡하고 묻어버리는 결과가 된다. 단적인 예로 정원명 형제와 조방장인 강진의 배경남,화순의 정응운은 호남절의록에 없다.2015년 전남도에서 발주하고 순천대학교팀이 용역을 맡은 ‘이순신문화자원총조사’에서도 다 빠졌다.
 
회령포 역사관에 이름과 본관, 고향과 관직, 행력, 그리고 '서로간의 관계' 까지 새긴다면 각 문중과 후손들이 자녀들과 손자들까지 대동하고 자손 대대로 찾아볼 전적지가 될 것이다. 그리고 원근의 유치원생과 초등학생, 중학생들이 관련기록을 탁본해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이 얼마나 가슴 뛰는 장면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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