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정/한학자

[지난 호에 이어]

⦁村中贈敏機師 시골 마을에서 민기 대사에게 주다.

鄕思支離不自由 지루한 고향생각 마음대로 되겠는가
客懷悽切入搔頭 처절한 객 회포에 시달리며 머리 긁적거린다.
村鷄何事頻催曉 무슨 일로 시골 닭은 자주 새벽 재촉하나
塞鴈知時遠報秋 시절 아는 변방 기러기 멀리서 가을 알린다.
金井風高桐葉落 우물가 거센 바람에 오동잎 떨어지고
碧空雲盡火星流 구름 없는 푸른 하늘에는 별똥별 흘러간다.
聯宵莫恠終無寐 날 샌 일 괴이타마라 끝내 잠들 수 없었으니
其奈明朝有別愁 내일 아침 이별 수심은 어떻게 견뎌내랴.
⟦雪巖雜著⟧

◇敏機師 - 보조국사 지눌의 선(禪)사상이 결집되어 한국철학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는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에 대해 설암 추붕(雪巖秋鵬) 선사가 과평(科評)을 붙인 사기(私記)(이하 ‵설암 추붕 사기′)가 설암 추붕의 불법을 전수받은 城谷堂 敏機大師에 의해 영조13년(1737) 출간되었다.

이 책에 대한 연구주석서로서 상봉 정원(霜峰淨源,1627~1709)의 ⟦절요사기분과(節要私記分科)⟧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아직은 행방을 알 수 없고 이번에 ‵설암 추붕 사기′가 공개되었다.
이 외에도 회암 정혜(晦庵定慧,1685~1741)의 ⟦법집별행록절요사기해(法集別行錄節要私記解)⟧와 연담 유일(蓮潭有一,1720~1799)의 ⟦법집별행록절요과목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科目幷入私記)⟧등의 주석서가 있다.
⟪금강신문. 2010년. 10월 08일⟫

⦁寄戒默師 계묵 선사께 부치다.

牛衣鶴杖住茅菴 우의 걸치고 학 의지하며 초암에 사는
物外閑蹤世豈諳 물외 승 한가한 생애 세상은 어떻게 알까.
三素雲中披道帙 삼색 구름 속에서 도가서적 펼쳐보고
九枝燈下誦迦譚 구지 등잔대 아래서 불교경전 암송한다.
龍池花雨禪襟爽 용지에 꽃비 내리자 선승 가슴 시원하고
鵠榻松風㝎夢酣 곡탑 솔바람소리는 입정 깊은 꿈에 빠져든다.
覊束且無仙慮分 속박 또한 선인이 염려할 분수는 아니야
遠瞻高躅不勝慚 멀리서 높은 풍모 쳐다보자 너무 부끄럽다.
⟦雪巖雜著⟧

◇戒默師 - 계묵 두타(戒黙頭陀). 천관산 명승이다.

注)
牛衣(우의) - 난마(亂麻)를 떠서 만든 옷. 남루한 옷.
물외 승(物外僧) - 외물(外物)의 구속을 벗어난 출세간의 승려.
九枝(구지) - 옛 등(燈)의 이름으로 등잔대 하나에 여러 개의 등불을 매단 등을 말한다.
迦譚(가담) - 가담은 석가의 본성인 Gautama의 음역으로 여기서는 불교를 가리킨다. 구담(瞿曇) 혹은 구담(俱譚)이라고도 한다.
高躅(고촉) - 고상한 자취. 높은 풍모.

⦁題大興寺天上人房
대흥사 천기 상인의 방에서 짓다.

閑占長春洞 한가로운 장춘동
忘機送歲時 설 보내다 기심 잊었다.
慈雲籠鴈塔 자운암은 안탑 감싸고
?水入龍池 정수암은 반궁으로 든다.
魯酒三盃斷 노주는 석 잔으로 끊자
胡麻一鉢隨 호마는 한 발우나 들여온다.
窓前冬栢樹 창 앞 동백나무
開落幾花枝 개화해 몇 가지에 졌나.
⟦雪巖禪師亂藁⟧

注)
魯酒 - 맛없는 술 박주.
胡麻 - 참깨로 지은 밥.

⦁題金華山澄光寺萬行大師枕溪堂
금화산 징광사 만행대사가 사는 침계당에서 짓다.

 
一杖來敲白玉扃 지팡이 하나로 신선 거쳐 찾으니
盤廻鳥道入蒼冥 험준한 산길 맴돌자 끝없는데 빠져든다.
何年萬行窺天秘 만행은 어느 해 하늘 비밀 엿 보았나
明月千秋占地靈 오랜 세월 밝은 달은 지령을 차지했도다.
顏壁僧形渾似鶴 절벽 위 대사 형상은 영락없는 학이고
散溪星彩亂如螢 시내 반짝이는 별 광채 반딧불 같이 어지럽다.
淸晨半捲踈簾看 맑은 새벽 성긴 발 반쯤 걷고 보니
遠近春山面面靑 멀고 가까운 봄 산은 얼굴마다 푸르구나.

(二)
松蘿葱欝擁玄扃 솔 덩굴 풀 울창해 무덤을 가리고
巖峀叅差近紫冥 바위멧부리 들쭉날쭉 신선세계 가깝다.
絕澗磨銅傳海若 깊은 계곡 닦은 거울 해신에 전하고
寒鍾告法報山靈 차가한 종소리 법문 알려 산신령께 보고한다.
玆遊已擬生蓮佛 이번 유람은 청련불계인가 의심하니
浮世何殊腐草螢 무상한 세상은 두엄의 반딧불과 무에 다르랴.
遙望半空雲氣遏 먼 하늘 바라보자 떠도는 구름 끊기고
峽中無乃有秦靑 협곡에는 그 노래 잘한다는 진청도 없구나.
⟦雪巖禪師亂藁⟧

注)
秦靑 - 옛날 진청(秦靑)이 노래를 잘 불러 그 소리가 가는 구름을 멈추게 하였다 한다.

▲동리산 태안사

⦁泰安寺懷古寺是惠徹國師所創
태안사 회고 이 절집은 혜철국사가 창건했다.

南極千年國一園 남쪽 끝 천년 국의 한 동산
淡烟踈樹遠相分 뿌연 연기 성긴 나무 서로 멀리 나뉜다.
樓臺基砌何人識 누대 기초 섬돌 어떤 사람이 알아줄까
鐘梵風流祗自聞 범종소리 풍류 듣고부터 존경한다오.
龜背斷碑苔蝕字 거북 등 깨진 비석 글자 이끼에 가렸고
鶴邊遙峀月磨雲 학 곁에 보이는 먼 산은 달 연마한 구름이라.
不須懷古傷前事 옛날 일에 맘 상하면 회고할 필요 없으니
依舊靑山脫俗紛 분분한 속세 벗어나면 청산은 옛날 그대로다.
 ⟦雪巖禪師亂藁⟧

⦁三聖庵 삼성암

薄暮携僧到上方 해거름에 납자 이끌고 암자 도착하니
秋風蕭瑟石牕凉 가을바람 쓸쓸하게 불고 돌 창문은 서늘하다.
玉沙瑤草隨長谷 옥모래 고운 풀은 긴 골짜기 거느리고
紅樹靑山遶短墻 단풍나무 푸른 산은 낮은 담장을 둘러쌌다.
靜夜高談獅子吼 고요한 밤 고상한 말씀 사자후를 토하니
空壇細霧鵲爐香 안개비에도 덩그런 제단에 작로의 향 올렸다.
身淸骨冷渾如鐵 몸 맑고 뼛속 시려 무쇠와 다름없으니
月下呼兒閉竹房 달 아래 아이 불러 승방 문 닫으라고 한다.
 ⟦雪巖雜著⟧

注)
三聖庵 - 장흥부 가지산 정상 서편 7부 능선에 있던 삼성암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이곳에서 조선후기 불교계를 크게 중흥시키며 운수납자들을 끌어 모았던 연담 유일 대사가 거처하다 입적했다.

설암 추붕雪巖秋鵬(효종2년1651~숙종32년1706)
평안도 강동출신이다. 전라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대흥사(大興寺)가 배출한 13대종사(大宗師)이다. 화엄학에 조예가 깊었다. 선과 교에 능하여 ‵규봉종밀(圭峰宗密,780~841)이 다시 태어났다′라는 칭송을 받았다.
속성은 김씨(金氏). 부는 김응소(金應素). 모는 장씨(張氏). 법명은 추붕(秋鵬), 법호는 설암(雪巖).
제자 허정 법종(虛靜法宗) 등이 경종2년(1722)에 편집한 ⟦설암잡저(雪岩雜著)⟧ 3권 3책과 ⟦설암난고(雪岩亂藁)⟧ 2권 1책이 전해온다.
서울대 규장각에서는 필사본 문집 ⟦설암잡저⟧ · ⟦설암난고⟧를 소장하고 있다. 잡저는 여러 장르의 글들이 뒤섞여 있어 혼란스러우나 대체로 정서해서 알아보기는 쉽다. 설암은 천관산 불적에 여러 수의 시를 남기고 있는 걸로 보아 상당기간 支提山 洞天 自然山水에 몸을 맡긴 것 같다. 세수 56세에 입적했다.
서산대사(西山大師) → 편양(鞭羊) → 풍담(楓潭) → 도안(道安) → 추붕(秋鵬)으로 불법이 전승되는데 훌륭한 성문(聲聞)들을 上首弟子로 두어 雪巖門中을 창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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