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정/한학자

[지난 호에 이어]

갈명(碣銘)에 이르기를,

閎哉靜師 크도다, 서산대사여
道淵材全도의 연원과 재능 겸전했다.
東來眼藏동으로 온 정법안장은
有的其傳확실하게 그 도를 전했구나.
鞭羊楓潭편양과 풍담으로부터
承以月渚월저도안에게 전승되었네.
代暢玄風불교를 세상에 펴니
蔚爲宗主위대한 본가가 되었도다.
嗣之者誰이어갈 자는 누구인가
雪師晩峙늦게야 설암선사 우뚝 섰네.
揭法振衰선게는 쇠락한 불법 일으켜
大扇西鄙서쪽 변방에서 큰 부채 흔들었다.
佛乘萬軸교법 만권 서적이
浩若雲煙엄청난 산처럼 쌓여있네.
師探厥旨선사는 그 종지 탐구하여
硏繹拳拳간절하게 실마리를 궁구했다.
資敏神淸자질은 민첩하고 정신은 맑아
戒嚴律正계율은 엄정했다오.
繇定發惠선정과 지혜 발휘하니
因相契性인상(원인의 모습)은 성과 계합(契合)한다네.
講演泉涌강연은 마치 샘 솟 듯해서
席有瑞花법석에는 상서로운 꽃이 핀다오.
其齡則夙선사 나이 아직 젊어
其進未涯그 나아감은 끝이 없었단다.
緣盡幻滅인연 다해 덧없이 사라져
如雲歸空구름처럼 공으로 돌아갔다네.
非幻霛霛영묘해서 허깨비가 아니니
皎月在穹밝은 달은 하늘에 계시리라.
湖刹南岡호남 사찰 언덕에
靈寶攸藏훌륭한 보배를 안장했다.
琢石嵬峩돌을 쪼아 우뚝 솟았으니
永眎茫茫아득한 후대까지 길이 보리라.

역자 注)
이 비석은 전라도 낙안군 금화산 징광사에 세워졌다. 사찰이 폐사되면서 모든 유적과 유물이 사라져 그 흔적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징광사 유허지

징광 마을 폐사지를 발굴해서 복원하면 이 빗돌의 종적도 혹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행스럽게도 영의정을 여러 차례 지낸 만정당 문집에 설암 추붕 선사의 행적이 남아 있었다.
대신(大臣)이 산속 절집의 승려들 부탁을 들어주며 붓을 들 만큼 불가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대단했음을 알 수가 있다.
추붕은 시승(詩僧)으로 불릴 만큼 뛰어난 시가 상당량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생을

조망하는 이런 전기(傳記)가 문집에는 없어 아쉬움이 많았으나 이 글로 보충할 수가 있었다.
징광사는 우리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었고 장흥고을 출신 선승들과도 깊은 인연이 있다.
임란 후 장흥부 유치 출신 영월 청학은 이 사찰에 머물며  황폐해진 사암을 재정비하는데 지대한 공적을 남기고 입적해 청학의 문집은 그의 문도들과 침굉헌의 주관 하에 이곳에서 개간되었다.
숙종 대에 백암성총은 천관산 대 선객 침굉 현변의 후원을 받으며 출판문화에서 일대 사건이 된 다종다수의 불교 전적을 간행해 배포하고 화엄 대법회를 열었다.

▲징광사 유허지 기와 파편들

조선시대 금화산 징광사 주변에서는 여러 종류의 종이를 생산할 수 있는 닥나무 등나무 뽕나무 소나무 버드나무 등이  많이 자라 자연환경이 조성된 것 같고 게다가 품질이 우수한 우리 고유의 소엽종(小葉種) 야생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었다.
불교의 남종 선과 차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통일신라 말기 9산 선문이 개창한 위치를 보면 분지의 차산지에 자리 잡고 있다.
지금도 “징광차”라고 하면 알아주고 수년 전만해도 전국 각지에서 구매해 갔다.
남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며 운수납자들의 귀의처였던 대가람이 왜 한순간에 역사 속에서 사라졌는지 의문이 남는다.
우수한 한지 생산지로 지역(紙役)의 폐단과 연관된 상소문이 묵암 최눌에 의해 적나라하게 작성되어 영조 임금에게 올라간다.
전문 학자들과 문화재 담당 인사들을 초청해 단계적으로 발굴해 나가고 관련 고문헌을 수집해 학술논문을 발표한다면 징광사가 다시 부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설암 추붕의 빗돌을 복원해 세우고 대웅전과 강당 요사채 종각 등 부속 건물을 조성하는 날이면 해당 고을 행정당국의 부화뇌동하는 문화예술 정책도 제대로 된 길을 찾아 나서지 않을까 싶다.

▪서종태(효종3년1652~숙종45년1719) 향년 70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노망(魯望), 호는 만정(晩靜)
29세 때인 숙종(肅宗) 6년(1680) 경신(庚申) 별시(別試) 을과(乙科) 2[探花郞]위(3/20)했다.
숙종29년(1703) 정조사(正朝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이조판서·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거쳐 숙종42년(1716)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가 되었다.
적통 노론의 핵심인물로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4 대신 등과 친밀했다. 저서로 ⟦만정당집(晩靜堂集)⟧이 남아있다.

●金華山澄光寺事蹟碑陰記
-설암 추붕 선사雪巖秋鵬禪師(1651~1706)

余按山之支派 寺之近遠 前人述之詳 無可言而亦丁言者 存以書之 詠月淸學 長占雲霞 常行古朴 而寺亦淳古師化也 枕肱懸辯 自已毘耶 勸人西業 晩啓足于此 窆西嶺石龕 師命也
栢庵性聰 浮休正宗 翠微高弟 群藏淵部 罔弗留心 而益酷以華嚴䟽鈔繡可榟 己巳春成 乃公志于此 我東演義之行 庵之力也 其騁謀羨財 模㨾叢林 即尙岑之爲也 羽儀法物 指揮頌誄 即我西山第三世嫡孫月潭雪霽之有也 又有嘯笠孤村 鳴笻萬落 探閭左收奇零 伐石昆陽舶以還 使寺之興廢 人之膚功 被之石與金華齊壽者大矣㦲 噫 此山不崩則此寺不壞 此寺不壞則此石不老 此石不老則此人之功不墜也 此人者誰 瀛洲人碩徵也 幼抗髮 任城將 階金玉 若夫廣海師之信任者也 道遠是暉大玉麟遇 皆師之神足者也 而其服勞 亦不亞其師云
 
출전 〚雪巖雜著〛卷第二

●금화산 징광사 사적비 음기

내가 산의 지파(支派)를 살펴보건대 절의 멀고 가까움(近遠)은 옛사람이 상세하게 진술해 두어 말할 것이 없어도 말하는 사람을 만났으니 보존하려고 기록한다.
영월 청학(詠月淸學)대사는 구름과 노을을 오래도록 차지하고서 항상 예스럽고 소박하게 살았으니 절집도 순박하고 예스러워서 대사와 어울렸다.
침굉 현변(枕肱懸辯)대사는 스스로 율사(毘奈耶, 律師)를 그만두고 사람들에게 염불(西業)을 권장하였으며 말년에는 이곳에서 임종이 다가옴을 알고 서쪽 산봉우리 석감(西嶺石龕)에 하관(下棺)하라고 대사는 명했다.
백암 성총(栢庵性聰)대사는 부휴 선수대사의 정종(正宗)으로 취미 수초대사의 고족제자(高足弟子)이다.
군장연부(群藏淵部)를 마음에 두지 않음이 없어 더욱 준엄하게 화엄경소초(華嚴經䟽鈔)를 꾸며서 판각하고 기사년(숙종15년1689) 봄에 완성했으니 바로 공의 뜻은 여기에 있었다.
우리 동국에서 화엄경연의(華嚴經演義)가 유행한 것은 백암의 공력이다.
그가 꾀를 다하여 재물을 모으고 총림의 모양을 갖춘 것은 바로 도감(都監, 절에서 돈·곡식을 맡아 보는 직책)인 상잠(尙岑)을 위해서이다.
법물의 사표(羽儀法物)로서 송뢰(頌誄)를 지휘하는 바로 우리 서산대사의 제3세 적손 월담 설제대사가 있다.
또 소립(嘯笠)이 있으니 외딴 마을에서 지팡이를 울리며 수많은 촌락과 여염집을 찾아다니면서 부족한 재원을 마련해 돌을 다듬어서 곤양(昆陽, 경상남도 사천시 곤양면)지방의 큰 나무배로 싣고 돌아왔다.
절이 흥하고 망하는 일로 사람들로 하여금 공을 세우게 하지만 덮어 가려져도 돌(石)과 금화재(金華齊)가 장수한다면 위대하다고 할 것이다.
아, 이 산이 무너지지 않으면 이 절도 허물어지지 않고 이 절이 허물어지지 않으면 이 돌도 늙지 않을 것이니 이 돌이 늙지 않는다면 이 사람의 공업도 추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영주 사람(瀛洲人) 가선대부(嘉善大夫) 석징(碩徵)이다.
어릴 적에 머리를 깎은(幼抗髮) 임 성장(任城將)은 섬돌의 금옥(金玉)과 같다.
저 광해대사(백련사 소요당파) 같은 사람이 신임하는 자이다. 도원, 시휘, 대옥, 인우는 모두 대사의 신족제자(神足弟子,수제자)들로 그들의 노고도 그 스승에게 다음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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