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정/한학자

近歲禪林宗風寖微。雖靈山道場。錯落相望。而未聞有傑然樹法。幢標慧名者。無亦國俗不崇內敎。歸趨者鮮而然哉。晩而玅香。有雪師。稱領袖有聲。稍稍濟度羣有。而俄聞不永年而遷化矣。於是其法嗣圓照敏機等。謀樹石以表靈跡於師示寂之地。相與狀師行。叩余漢濱屛居。謁爲銘。余謝曰。爾空門。亦爲名乎。爾師心燈密傳。萬古若新。則有足以昭朗垂耀。何假世諦文字。爲不朽地耶。照等請益固。且曰。淸虛堂休靜。倡道西嶽。上接石屋之統。歷四世而嫡傳屬吾師。源流遠矣。上溯之諸耆師。俱有銘。紀德載行。銘之。乃故事也。余遂諾而發其狀。師法名秋鵬。姓金氏。父應素。西關江東縣良家也。母張氏。娠師有異夢。幼而聰穎絶人。嬉戱。輒作佛事。髫年割愛緣。從宗眼長老。剃落。初參碧溪九二禪師。受戒。早夜勤於服事。五年間博綜諸經。日有新悟。碧溪歎曰。奇哉。鵠卵。豈越雞伏耶。遂屬之月渚道安大師。請加磨淬。而盡其詣。月渚卽淸虛正派。其徒常數十百人。而師獨超然透解。如融風泮凍。而時雨化物。雖其年大名盛於師者。莫或先焉。月渚深器異之。凡經義微奧。不可思議者。必與師互相發難。其歸未有不沕合。時師年甫二十餘。已學淹識通。爲人敎師。道譽四出矣。師姿纖瘦。不飾外儀。而口無擇言。遇貴賤平等。苟有得。一以供佛。餘者輒施於人。生平弊衣糲飯。澹如也。蓋師性慧。而輔以刻勵。三乘諸敎。靡不貫穿。蓄之旣富。有叩之。其應不窮。而又未嘗滯於言句。師於眞空玅有之旨。庶幾其有得焉者矣。住香山內院。眞修,退藏三十餘年。謂南方敎所未布。乃杖錫游邁。所至若優曇鉢花之現世也。遠近緇白。聞聲坌集。師從而說法。辭辨縱橫甚晣。詣講座者日累百人。法席之盛。近世所未有也。丙戌八月。在樂安澄光寺。偶感疾。吟留一偈。翛然而逝。俗壽五十六。法臘四十一。闍維得靈骨一片。閟之于寺之南岡。所著有雪巖集五卷。覽之可以知其蘊矣。噫。使師而享有高年。彌究其業。則所造之邃。豈止於斯而已耶。可惜也已。銘曰。

閎哉靜師。道淵材全。東來眼藏。有的其傳。鞭羊楓潭。承以月渚。代暢玄風。蔚爲宗主。嗣之者誰。雪師晩峙。揭法振衰。大扇西鄙。佛乘萬軸。浩若雲煙。師探厥旨。硏繹拳拳。資敏神淸。戒嚴律正。繇定發惠。因相契性。講演泉涌。席有瑞花。其齡則夙。其進未涯。緣盡幻滅。如雲歸空。非幻霛霛。皎月在穹。湖刹南岡。靈寶攸藏。琢石嵬峩。永眎茫茫。

출전 晩靜堂 徐宗泰⟦晩靜堂集⟧第十四

❍전라도 낙안군 금화산 징광사 설암선사 비명
-만정당 서종태(1652~1719)

요즘 선림의 종풍은 점점 약해졌으나 영취산(靈山)의 도량만큼은 여기저기 각처에서 서로 선교(禪敎)를 이어갔으니 걸출한 수법이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당간(幢竿)을 세워 이름난 사람은 역시 나라의 풍속으로 불교를 높이지 않은 적이 없었고 귀추자(歸趨者)가 드물어도 당연히 그렇게 했다.
말년을 묘향산에서 지냈던 설암선사는 영수라 칭송되며 명성이 있었는데 점차 만유(萬有, 衆生)를 제도하더니 오래도록 살지도 못하고 갑자기 입적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이때 그의 법통을 이어받은 제자 원조(圓照)· 민기(敏機)등이 법사가 시적(示寂)한 곳에 신령한 자취를 드러내는 빗돌을 세우자고 의논하고는 서로 함께 선사의 행장을 가지고 한강변 나의 은거지(隱居地)를 찾아왔다.

▲징광사 귀부와 이수

묘갈명을 지어 주기를 아뢰자 내가 사양하며 말하기를, ‶그대 공문(空門, 불교)도 명예를 구한다는 것인가. 그대 선사라면 마음의 등불은 비밀스럽게 전해져 만고에도 똑같이 새로울 터이고 상족제자가 있다면 찬란한 빛을 전할 것이다. 어느 겨를에 타당한 진리의 문자로 영원히 전해지도록 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더니 원조 등이 진실로 다시 더 요청하기에 우선 말한다.
청허당 휴정은 묘향산에서 창도(唱導)하니 위로는 임제 정맥 석옥 청공(1272~1352)의 법통에 닿아있고 4세를 지나 적전(嫡傳) 우리 설암선사가 이었으니 원류는 멀고도 멀다.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여러 노 선사들은 모두 명(銘)이 있었는데 훌륭한 행실이 있으면 덕을 기록하여 새겼으니 바로 옛날부터 전해오는 일(故事)이다.
내가 마침내 허락하고 그의 행장을 드러낸다.
선사의 법명은 추붕이고 성은 김씨로 아버지는 응소이니 서관(西關, 평안도) 강동 현(江東縣) 좋은 집안사람이다.
어머니는 장씨로 선사를 임신했을 때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어려서는 총명해서 남보다 뛰어났고 장난치며 놀 때에는 그때마다 불사를 흉내 냈다.
유년시절 친애의 정을 떼어버리고자 부모의 곁을 떠나 종안장로(宗眼長老)를 따라나서 머리를 깎고는 벽계구이(碧溪九二) 선사를 처음 찾아뵙고 계를 받았다.
밤낮으로 부지런히 공부하며 오년간 모든 경전을 두루 망라해 읽어내더니 날마다 새롭게 깨달았다.
벽계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기특하구나. 고니 알이로다. 어떻게 월나라 작은 닭이 큰 고니 알을 품을 수 있겠는가.″하고는 마침내 월저도안(月渚道安) 대사에게 맡기자 갈고 닦기를 더 청하니 그 학예가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
월저는 바로 청허대사의 정통파로 그 문도는 항상 수십 명에서 일백여 명이었다.
설암선사는 유독 초연해서 환하게 속까지 깨달아 바람이 녹아서 얼어붙는 것 같았으니 때 맞춰 내리는 비는 만물을 소생시킨다는 것이다.
비록 그 나이에 선사의 성대한 명망은 혹 이보다 앞선 이가 없었다.
월저는 참으로 더 좋게 보고는(특이한 法器임을 알아차리고는) 모든 경전의 은미하고 오묘한 뜻을 강론하면 불가사의한 사람이었지만 반드시 설암선사와 상호 어려운 곳을 드러내 밝혔다.
그들의 귀래 처(歸來處)는 딱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없었고 당시 선사의 나이는 겨우 스무 살 남짓이었지만 이미 학문은 넓고 뛰어난 식견이 있어 가르칠 스승이 된 사람으로 평판이 나서 도인의 명예는 사방에 알려졌다.
선사의 자태는 점차 야위어 갔지만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꾸미지도 않았고 입에 구별해야 할 말이 없었으며 귀하고 천한 사람을 만나도 평등하게 대했다.
만일 얻은 것이 있으면 하나라도 불전에 올렸고 남는 것이 있으면 그때마다 남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일생을 해진 옷과 거친 밥에도 담담해 하셨으며 선사의 타고난 지혜는 노력을 겸하였으니 삼승(三乘)의 모든 가르침도 꿰뚫지 않는 것이 없었고 쌓은 학문은 이미 넉넉함에도 타인에게는 머리를 조아렸다.
그 응답이 끝이 없을지라도 다시 언구(言句)에 막힌 적이 일찍이 없었다.
선사에게 있어 진공묘유(眞空妙有, 생겨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절대의 진리)의 지취(旨趣)는 그가 여기에서 깨달은 바가 있다는 사람에 거의 가까울 것이다.
묘향산 내원암에 머무르면서 참 수행을 하고 나서 삼십여 년을 비밀한 곳에 물러나서 갈무리했다.
남쪽 지방은 아직 가르침을 펴지 않는 곳이라 말하고는 바로 지팡이를 짚고 멀리 떠나갔다.
가는 곳마다 우담바라가 세간에 출현한 것 같았다.
원근의 승려와 백성들은 명성을 듣고 무더기로 모여드니 강좌에 참여한 사람은 날로 일백 사람으로 늘어났고 성대한 법석은 요즘에 들어와서는 아직까지 없었던 바였다.
병술년(숙종32년1706) 8월 전라도 낙안군 징광사에 있으면서 우연히 감기에 걸렸다가 게송 한 수를 읊어 남기고 조용히 서거했다.
속수는 56세이고 법랍은 41년으로 다비하자 영골 한편이 나와 절의 남쪽 언덕에 안치했다.
저서는 ⟦설암집⟧5권이 있는데 열람해 보면 선사가 온축(蘊蓄)한 학문의 역량을 알만하다.
아, 선사로 하여금 세수를 누리게 했다면 더욱 그 학업을 궁구해 나아간 바가 심오했을 것이니 어찌 여기에서 그치고야 말았겠는가. 아쉽도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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