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정/한학자

寶玩琴書 陶令唾其月俸 泥塗軒冕 子陵遯於江干 動星像之雅操 樂天命之高趣 非古人之獨爾 感今人兮亦然 野遺先生 賦性溫明 誦五車而胸含朗玉 禀氣秀麗 敵七步而口吐明珠 可謂倒三水之詞源 掃千人之筆陣 不是池中物 冝爲席上珎 是用登進士之甲科 鶴添朱頂於仙灣九皐 應賢良之方正 生瑞鱗於禹門三層 然而恨陵澤之苔磯 歎陶村之荒徑 愛閑曠而伏虎 銓勝區而藏龜 於是高枕梅窓 發陽春之妙曲 岸巾松榻 歌窈窕之瓊章 撫瑤琴而坐花 依玉京之降士 飛羽觴而醉月 乃金谷之謫仙 爽耳根者 迸石飛湍 淸眼界者 排雲聳峀 徉徉焉適其所樂 踽踽焉任其所如 至若釣游鯉於龍池 拂簑兩岸之烟雨 採杞菊於獜洞 欹笠衆竅之巖風 時與達子 論道講書 物格知致 心廣體胖 養性怡神 玉骨氷姿 未能比其僴兮 金風寶月 詎肎方其斐然 追思曠時 已知有似潜陵之倜儻 顧惟方代 乃覺無如野遺之脩姱 或漢時之碩人歟 或晋代之高士耶 其何䣆節 如此文彩 若斯小釋 夙遭愍凶 早負罪逆 年甫九歲 皇考奄然乘鸞 月未二期 祖母繼而騎尾 由是無依無怙 等黃口之落巢 有怖有驚 類靑蠅之逢雪 故乃投身蓮社 褁足杏壇 啓玉凾於金堂 空執蹄而失兔 然寶燭於石室 徒按壁而亡羊 然後十年單瓢 千里短錫 任浮萍於漢北 逐轉蓬於嶺南 衲白蓬萊萬二千之峯月 鞋靑方丈八十九之寺苔 行未及百十城 臈已過二八跌 故學匏瓜於仙寺 傍栴壇之仁村 聊將䆿言 上瀆几案 伏冀恤其愚魯 方一哂開隻眼以垂仁 畏其嚴明 謹百拜忘半死以仰告

출전 ⟦枕肱集⟧下

◆삼가 야유당께 올립니다.

거문고와 도서를 값나가는 노리개로 여기고서 도연명은 그의 월급에 침을 뱉었고 수레와 면류관을 진흙탕 속에 묻고는 엄 자릉은 강변으로 달아났습니다.
이는 만세(萬世)에 성상(星像)을 움직인 단아한 지조를 보여 주었고 천명(天命)을 즐긴 높은 격조의 멋을 전했으니 이는 옛사람만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오늘 사람도 역시 그렇다는 걸 느낄 수가 있습니다.
야유당(野遺堂) 선생은 타고난 성품이 따스하고 총명해서 다섯 수레의 전적을 암송하고 가슴속에는 밝은 옥을 넣어두어 기품이 수려하고 일곱 걸음 만에 입으로는 밝은 구슬을 토해냈습니다.
글 솜씨는 삼협(三峽)의 물을 거꾸로 쏟아낸 듯하고 붓글씨는 일천 명의 적군을 홀로 쓸어낼 듯하니 못 속의 물(物,신룡神龍)이 아니라면 큰 선비의 대열에 참여함이 마땅합니다.
진사시에 갑과로 등용되어 구고(九皐,깊은 계곡)의 선만(仙灣, 선계의 물굽이)에서 학의 붉은 정수리가 더해지고 현량방정과(賢良方正科)에 응시해 삼층의 용문(龍門, 禹門)에서 물고기의 상서로운 비늘이 돋아났습니다.
그러나 엄자릉(嚴子陵) 연못의 이끼 덮인 낚시터를 아까워하고 도연명(陶淵明) 시골집의 황량한 오솔길을 탄식하면서 한가로움을 좋아하여 엎드린 범처럼 지냈고 살기 좋은 곳을 골라 거북이처럼 숨어 살았습니다.
이때에 매화 꽃피는 창가에 느긋하게 누워 양춘의 고아한 가곡을 따라 부르고 솔 탑상에서 두건을 젖히고 요조(窈窕)의 주옥같은 시편(詩篇)을 노래하였습니다.
옥 거문고(瑤琴)를 연주하며 꽃밭 사이에 앉아 있을 때는 옥경(玉京)에서 내려 온 사람 같았고 술잔을 돌리며 달빛 속에 취했을 때는 바로 금곡(金谷)의 적선(謫仙)이었습니다.
귀뿌리를 싱그럽게 하는 것은 돌 틈을 내달리는 여울물 소리요 시야를 시원하게 하는 것은 구름을 헤치고 솟아난 메 뿌리들이었습니다.
한가로이 배회하다 자기가 즐기는 곳에 나아가고 홀로 쓸쓸이 걷다 발 가는대로 내버려두었습니다.
용지(龍池)에서 헤엄치는 잉어를 낚을 적에는 양 언덕의 안개비에도 도롱이를 걸치고 인동(獜洞)에서 구기자와 국화를 채취할 때에는 여러 구멍에서 나는 바위바람에 삿갓을 기울였습니다.
때때로 통달한 선비와 도를 논하고 옛 글의 뜻을 강론하며 격물치지(格物致知)에 이르렀고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펴지는(心廣體胖) 가운데 성품을 기르고 정신을 편안하게 하였습니다. 옥골빙자(玉骨氷姿)의 그 굳센 모습은 비교할 수가 없고 금풍보월(金風寶月)의 그 문채 나는 모습과 어찌 즐겨 나란히 하겠습니까.
지난 역사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도연명과 엄자릉은 뜻이 크고 기개 있는 모습이 유사함을 알 수가 있고 오늘날의 시대를 돌아보면 야유당(野遺堂)과 같이 고결한 인물이 없다는 것을 바로 깨닫게 됩니다.
혹여 한(漢)나라 시대의 덕이 크고 높은 사람이 아닌가요, 설혹 진(晉)나라 시대의 고사(高士,인격이 고결한 선비)라고 할까요. 어쩌면 그 굳센 정절(靖節)이 이처럼 문채난단 말입니까.
나 같은 소석(小釋, 小僧)을 말하면 일찍이 민흉(愍凶,부모를 여의는 불행)을 만나 일찌감치 바른 도리에 거슬리는 큰 죄를 짊어졌습니다.
나이 겨우 아홉 살에 황고(皇考,선고先考의 높임 말, 돌아가신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고 두 달이 채 안되어 할머니가 잇따라 별세하셨습니다.
이때부터 의지할 곳 없고 믿을 곳 없어 어린 새 새끼가 둥지에서 떨어진 것과 같았고 두렵고 놀란 것이 여름철의 쉬파리가 겨울철의 눈을 만난 일과 꼭 닮았습니다.
그러므로 마침내 연사(蓮社,불교)에 몸을 던져 발을 싸매고 행단(杏壇,학문을 닦는 곳)을 찾아다녔는데 금당(金堂,법당)에서 옥함(玉函,옥으로 만든 함)을 열어도 쓸데없이 그물만 쥐었을 뿐 토끼는 놓쳤으며 석실(石室,석굴石窟)에서 보배로운 촛불(寶燭)을 태워도 한갓 벽만 어루만질 뿐 양(羊)은 잃어버렸습니다.
그러고 난후 십년동안을 표주박 하나에 짧은 석장을 지니고서 천리 길을 내키는 대로 한수 북쪽은 부평초처럼 떠돌았고 재 남쪽(嶺南)은 쑥대처럼 굴러다녔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납의(衲衣,승려가 입는 검은 색 옷)는 봉래산(蓬萊山,금강산) 일만 이천 봉 달빛에 하얗게 바랬고 미투리(鞋)는 방장산(方丈山,지리산) 팔십 구개 암자 이끼에 물들어 파랗게 변했으니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떠난 일백십 성의 구도행각(만행萬行,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면서 닦는 불교 수행)을 마치기도 전에 십 육년의 세월이 이미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선암사에 매달린 조롱박을 본받아 전단(栴檀, 향나무)의 어진 마을(仁村)에 기댈 겁니다.
애오라지 잠꼬대 같은 말을 궤안에 올려 번거롭게 해드렸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저의 어리석고 노둔함을 긍휼히 여기시어 이제 한번 웃으시고 일척안(一隻眼)을 열어 인덕을 베풀어 주십시오.
그 엄격하고 공정함을 두려워하여 삼가 백배를 올리며 반쯤 죽음을 잊고서 우러러 아룁니다.

注)
動星像之雅操 - 엄자릉은 당대에 어질고 덕이 높은 선비로 꼽히던 군자였다. 후한(後漢) 광무제는 명을 내려 모든 백관을 물리치고 엄자릉과 어울려 단둘이 밤새도록 술도 마시고 이야기 하다 잠이 들었다. 천문을 보던 일관(日官) 벼슬아치가 소스라치게 놀랄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바로 객성(客星)이 태백(太白)을 범하는 천기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태백은 곧 임금을 상징하니 이건 분명 황제에게 위해가 가해지는 징조가 틀림없었다. 천문관은 곧장 달려가 어전에 엎드려 이 사실을 고하고 알아보니 엄자릉이 광무제의 배위에다 발을 올려놓고 둘이 코를 크게 골며 자고 있었다.
敵七步而口吐明珠 - 조식은 조조의 셋째 아들로 뛰어난 학식과 문장으로 어려서부터 조조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조조는 왕위를 조식이 아닌 첫째 아들 조비에게 넘겨주었다. 왕위에 오른 조비는 동생 조식을 죽이고자 했으나 마지막 순간에 그 역시도 조식의 문장력이 아까워 갈등했다고 한다. 그래서 조식에게 일곱 걸음이 끝나기 전에 시를 지으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하였다.
이에 조식은 조금도 머뭇거림 없이 천천히 걷기 시작했고, 완벽하게 운율을 살린 시를 지어냈다. 그것이 지금까지도 유명한 칠보시(七步詩)다.
倒三水之詞源。掃千人之筆陣 - 두보(杜甫)의 시에 “글 솜씨는 삼협의 물을 거꾸로 쏟아낸 듯, 붓글씨는 천 명의 적군을 홀로 쓸어낼 듯.[詞源倒流三峽水 筆陣獨掃千人軍]”이라는 구절이 보인다. 《杜少陵詩集 卷3 醉歌行》
席上珎(석상진) - 선비의 재덕(才德)을 뜻한다. 《예기(禮記)》 〈유행(儒行)〉에 “유자는 석상의 진귀한 보배처럼 자신의 덕을 갈고닦으면서 임금이 불러 주기를 기다린다.〔儒有席上之珍以待聘〕” 하였다.
賢良之方正 - 현량(賢良)은 한 문제 때부터 시작된 과거 제도로 책문을 통해 직언과 극간(極諫)을 잘하는 사람을 뽑았는데 현량문학(賢良文學) 혹은 현량방정(賢良方正)이라고도 한다.
窈窕之瓊章 - 요조(窈窕)는 시경(詩經) “주남편(周南篇)” 첫머리에 나오는 관저(關雎)의 구절이다.
金谷之謫仙 - 적선(謫仙)이라 불리는 중국 盛唐時代의 시인 이태백이 말년에는 금릉(金陵) 지방에서 유랑했다.
乘鸞(승란) - 난새를 타다. 사람의 죽음을 의미한다.
行未及百十城 - 화엄경 입법계품에 보면 선재동자가 53 선지식을 만나는 구도행각에서 110개 성을 지나간다.
一隻眼(일척안) - 선림(禪林)의 용어로 범부의 육안(肉眼)이 아니라 진실한 정견(正見)을 갖춘 혜안(慧眼)이라는 말로 정문안(頂門眼) 혹은 활안(活眼)이라고도 한다.

역자 注)
청광 박사형도 “야유당 서문(野幽堂序)”을 쓰면서 낙안읍성 교외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문집에는 野幽翁의 姓은 蔡氏이고 字는 산보(山甫)이며 처음에는 보성(山陽)사람이었다는 기사가 있다. 사우연원록(師友淵源錄)에도 실려 있는데 이름이 빠져있어 너무 아쉽다.

▲낙안 동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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