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정/한학자

西敎之東被且將數千餘載而中間之興廢不可以一二枚擧其興也固數也其廢也亦數也其所謂數者亦莫非緣也天盖之爲山與天地俱設寂寂空空於幾千萬億載之上忽然一朝創立大刹而絳宮朱樓照耀諸天者是緣也卓庵于其顚名之曰上院者亦緣也以此推之緣之一字雖未足爲佛家大乘而亦可以盡天地之能事可以窮鬼神之情狀豈可不謂之大矣哉卓建年久雨漏風射瓦毁棟腐幾乎將廢矣庵主定月大師肯還發慈悲於諸佛勸檀越於衆生誓心重修而大施主嘉善金君巨福不吝數百金之貨財以種百千刼之福田於是群施竝臻衆工畢擧換瓦改棟去舊維新則煥然甍宇不讓厥初庵之傾頹不爲不久而必待定月而後克成大功人之檀越不爲不多而必得金君而後能樹至德向所謂緣也者有耶無耶修庵之翌年余與冠童七八來接此庵鳳城大師義俊爲余語其顚末仍請爲之記余重其請不得辭焉

戊午三月上澣全城過客記
 
출전≪湖南左道金陵縣天台山淨水寺輿地勝覽≫

◆상원암 중수기

불교가 해동에 전래된 해가 또 수천여년이 되었는데 중간에 일어남과 없어짐(興廢)은 한두 가지로 거론할 수가 없으니 불교가 일어남도 진실로 운수(運數)이고 불교가 없어짐도 운수이다.
이른바 운수라는 것도 연(緣)이 아님이 없으니 천개(天蓋)의 산 됨도 천지(천지우주가 다 부처)와 함께 몇 천만 억 년 전에 공공적적(空空寂寂)한 법을 설했다.(법계의 모든 유정 무정은 모두 법을 설하고 법을 들음)
갑자기 하루아침에 대찰을 창립해 선궁(仙宮)과 붉은 누각이 암자를 밝게 비추니 이것도 연(緣)이다.
정상에 우뚝 선 암자를 상원(上院)이라 명하는 것도 연(緣)이니 이것을 가지고 미루어 나간다면 연(緣)의 한 글자는 불가의 대승(佛家大乘)이 되기에는 부족하지만 천지에서 가능한 일은 다할 수가 있고 귀신의 실정(實情)도 궁구할 수가 있으니 어찌 크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암자를 세운 햇수는 오래되었는데 비가 새고 바람이 휘몰아쳐 기와가 훼손되고 기둥이 썩어 장차 사라지려고 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암주(庵主) 정월대사(定月大師) 긍환(肯還)이 일체 중생 단월(檀越, 신도信徒)들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발하여 모든 부처님에게 보시하기를 권장하자  대 시주(大施主) 가선(嘉善) 김군(金君) 거복(巨福)은 맹세하는 마음을 내어 중수(重修)하기로 하고 수백금의 재화도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백 천겁의 복전(福田)에 씨를 뿌렸다.
이에 보시하려는 무리가 수없이 몰려들어 일거에 기와를 바꾸고 기둥을 고치고 옛것을 버리고 새롭게(維新)하는 일을 마치자 기와집은 환하게 빛이 나서 기울어지고 무너지려는 처음 암자의 모습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오래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건만 반드시 정월대사를 기다린 뒤에야 능히 큰 공적이 이루어졌고 모든 사람의 신도들이 많지 않은 것도 아니었건만 반드시 김군을 얻은 후에야 능히 지극한 덕을 세울 수가 있었다.
지난번에 말했던 연(緣)이라는 것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암자를 꾸민 다음 해 나와 남자 어른아이 칠팔 인이 이 암자를 구경 가자 봉성대사 의준(鳳城大師義俊)이 나에게 그 전말을 말하며 기문을 써 줄 것을 요청하기에 나는 거듭해서 그 요청을 사양할 수가 없었다.
1798년(정조22년) 3월 상순 전성과객은 기록한다.

注)
空空寂寂 - 우주의 유형·무형 일체의 존재는 그 본체가 모두 공무(空無)하여 생각하고 분별할 것이 없다는 뜻.
維新 - 낡은 제도 따위를 고쳐 새롭게 하다.

◆八嶺山楞伽寺大殿募緣文
-침굉 현변枕肱懸辯(1616~1684)

余徧閱東方山川 形勝雄偉壯麗 可爲寺刹者 莫瀛洲楞伽若也  至若地勢寬厚 而龍蹲虎踞 靈氣所鍾 統爲東方會撮者 必莫過於楞伽若也 然而江山淸致 都屬野人之家 而空然弃之 白足靑衿 凡經過此 孰不惜之 此吾東道詵之所未覩 而抑亦大唐一行之所未囑也 比若掎摭星辰 而遺棄羲娥也 此亦行詵之一大所缺也 降及季世 爰有道人等數十餘指 相與議曰 安知夫行詵之未及 此地立寺 乃延囑於吾等之手乎 又安知夫鬼神之秘慳 此地不與 豈地運之不至乎 道德經曰 大器晩成 大音希聲 固此地之不得宜其理也 曷若爲可爲於可爲之時乎 唾手辦志 斬除林叢 經始禪廬 先立法雲一殿 次建淸心與屹靈兩寮 於是山光水色 及諸百物 欣欣然若有情於感遇也 然而中無大殿 無以鎭之 又欲搆大殿 財匱力乏 不可默矣 普告檀門 憗罄財糓 俾成大事 則其功厥德 可勝道哉 古人以一竹枝建刹 一破笠遮佛 而驟登寶位 現承祖燈 因果報應 如影之隨形 豈欺人哉 曾子曰 出乎爾者 反乎爾者 伏請有志君子 五花斯文

출전 ≪枕肱集≫下

❍팔영산 능가사 대웅전 모연문

내가 동방산천을 두루 점검하니 형승이 우람하고 장려(壯麗)해서 사찰을 세울만한 곳으로는 영주(瀛洲) 능가사(楞伽寺) 같은 곳이 없었다.
지세가 관후하여 용과 범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 같고 영기가 한데 모여 동방(東方)을 두루 모으고 엮어도 필시 능가사보다 더 나은 곳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강산(江山)이 맑은 운치가 있는데도 모두 시골 사람의 집으로 들어차 있을 뿐 텅 빈 채로 내버려져 있어 사문(沙門)이나 유생(儒生)이 대체로 이곳을 지나가면서 누구든지 애석해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곳은 우리 해동의 도선대사(道詵大師)도 보지 못한 곳이요 그리고 또한 당나라 일행선사(一行禪師)도 언급하지 못한 곳이다.
비유하자면 “별들만을 따 담고서 해와 달은 버린 격과 같다.” 고나 할 것이니 이는 또한 일행과 도선의 아주 큰 흠결(欠缺)이라고 해야만 할 것이다.
세월이 흘러 말세에 이르면 도인(道人) 등(等) 수십 여인이 있었으니 서로 의논하며 말하기를 “일행이나 도선이 이 땅에 사찰을 세울 생각이 미치지 못해서 우리들의 손에 까지 이어져 내려 올 줄은 어찌 알았으랴.
또 귀신이 이 땅을 내놓지 않고 비밀스럽게 숨긴 것은 아닌지 어떻게 알겠는가. 아마도 땅의 운수(運數)가 이르지 않은 것 같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에 말하기를,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고 지극히 큰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大器晩成, 大音希聲).’라는 말이 있다. 진실로 이 땅이 때를 만나지 못함은 그 이치상 당연하다. 어찌 일을 할 만할 때에 일을 하는 것만큼 좋은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라고 했다.
손에다가 침을 바르고 뜻을 세우고는 삼림을 베어내고 선려(禪廬)를 경영하면서 우선 법운(法運)의 전각 하나를 건립하고 다음에 청심(淸心)과 흘령(屹靈)의 승료(僧寮) 두 채를 세웠다.
이에 산수가 찬란한 빛을 발하고 모든 만물에 까지 미치자 기뻐하면서 감사하는 뜻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가운데에 대전(大殿)이 없어 진압(鎭壓)할 수가 없으므로 또 대전을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재력이 고갈되었다.
침묵할 수가 없어 널리 단문(檀門, 시주자施主者. 보시布施를 행하는 사람)에게 알리고 바라건대 재물과 곡식을 있는 대로 다 들여(罄輸) 대사(大事)를 이루게 한다면 그 공덕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옛사람은 한 대나무 가지로 사찰을 세우고 하나의 해진 삿갓으로 부처를 가렸는데도 곧장 보위(寶位)에 오르고 조사의 등불(祖燈)을 나타내 이었다.
인과응보는 그림자가 형체를 따른 것과 같으니 어찌 사람을 속일 수가 있겠는가.
증자가 말하기를,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돌아간다.”라고 했다. 엎드려 청하건대 뜻있는 군자들은 이 글을 읽고 적극 호응해 주기를 바란다.

▲고흥 팔영산 능가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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