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우수영 국민관광단지에 설치된 ‘회령포의 결의’등 
충무공 이순신은 장흥 회진면 회령진성에서 1597년 8월 19일(양력 9월 29일) 삼도수군통제사 취임식을 갖었다. 이처럼 장흥 회령진성은 이순신과 관련이 있는 사적지로서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44호이다.
그런데 회령진성이 아닌 회령포진(鎭)은 조선 초기 1422년에 지금의 보성군 회천면 전일리 바닷가에 있었다. 현재 보성군 회천면은 조선 시대에 장흥도호부에 속한지역 이였는데 1914년 일제 강점기 때 보성군 관할이 되었다.
1422년에 설치되었던 회령포진을 1425년 원래 있었던 장흥 회진면 선자도 해안으로 옮겼고, 1490년 현재 위치에 회령진성(鎭城)을 쌓았다. 그로부터 170여년이 지난 1597년 정유재란 때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취임식을 지금의 회령진성에서 했고 명량해전을 준비했다. 또한, 구전에 의하면 장흥 회진면 덕산마을에서 그 당시 부서진 판옥선 전선을 고쳤다고 한다.

■ 당초 회령포진이 위치한 곳?
 1406년 1월 왜선 6척이 장흥도호부 주포(周浦:현재 장흥 회진면 선자도)에 침입하여 병선 1척을 약탈하였고, 1408년 11월 왜적이 처들어와 사람을 죽이는 등 피해가 많아 조정에서는 거듭된 왜구 침입에 대한 대응책으로 1422년 11월에 장흥도호부 동쪽 회령포(현재 보성군 회천면 전일리 바닷가)에 병선 4척을 정박시켰다.
그곳은 바닷물이 빠질 때 물의 높이가 얕아져 병선의 출입이 어려운 여건때문에 3년후 1425년에 장흥도호부 남쪽 지금의 회진면 선자도 해안으로 병선 4척을 옮겼다.

■ 보성 회천면에 회령진성이 있었다고 틀린 주장을 한다.
일부 학자와 보성군은 보성 회천면에 회령진성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재 장흥 회진면에 있는 회령진성은 1490년에 쌓았다.
결론적으로 보성 회천면에 있었던 것은 회령진성이 아닌 회령포성 이다. 만호(萬戶:종4품직 벼슬아치)가 관장하는 수군기지가 아닌 회령포성은 고려시대에 존재했던 ‘귀두산성’으로 현재 보성 회천면 전일리와 봉강리 일대에 쌓았다고 하며, 조선시대 군사시설인 장흥 회진면의회령진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순천대학교 최인선교수는 2014년 발간한「보성군사(郡史), 의향역사」P.140~141에 회천면 전일리 군학마을에 소재한 ‘구미영지’라고 불리는 석축열(石築列)은 현재 위치 장흥 회진면의 회령진성을 쌓기 이전 시기에 왜구를 방비하기 위하여 엄폐물로 사용되었던 임시방책(防柵)이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 옛 장흥도호부 군영구미는 어디였을까?
 전남도청에서 2015년 2월에 발간된 책자「조선수군재건로, 명량으로 가는 길」P.78에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난중일기 8월 17일 (양력 9월 27일)맑음- 아침식사를 하고 나서 백사정(벽교리)에 이르러 말을 먹였음. 점심을 먹은 뒤에 군영구미(군학마을)에 이르니 일대가 모두 무인지경이 돼 있었음. 수사 배설은 내가 탈 배를 보내지 않았음. 장흥의 군량감관과 색리가 군량을 맘대로 모조리 훔쳐 나누어 갈 적에 잡아다가 호되게 군장을 쳤음. 거기서 잤음. 배설이 약속을 어김.

■ 군영구미 위치?
 전라남도에서는 왜 보성 회천면 군학마을을 ‘군영구미’라고 홍보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순천대학교 최인선 교수는 군영구미가 아닌 “천면 군학마을 ‘구미영지’에 대하여 ……후대에 없어졌다고 해도 현재 전혀 남아있지 않은 것이 수궁하기 어려워 혹시 수군기지 회령포진 관련 성이 아니라, 바다에 상륙한 왜적을 공격하기 위한 일종의 엄폐물로서 사용되었던 소규모 석축열(石築列)이 아니었을까? 라고 추정한다.”라고 밝혔다.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에 나오는 지명 “~구미(龜未)”는 선박이동을 하기 때문에 ‘포구’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참고적으로 장흥 안양면 해창구미(龜未)는 내륙 깊숙이 들어간 포구였다. 그곳에서 서울로 출발하는 장흥도호부 지역 조운창(漕運倉)이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재 장흥 안양면 해창리 97번지 주변은 1938년 간척사업으로 예전의 포구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 선소(船所:배 만드는 곳)마을 위치?
 전라남도에서 발간했던 ‘조선수군 재건로, 명량으로 가는 길’책자에 군학마을을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병졸을 주둔시켜 훈련하면서 무기와 군량을 모으고 병선을 만들었던 곳이다’라고 홍보하고 있다. 참고적으로 정유재란 때 경상남도 장승포 칠천량 해전에서 패전하고 우리고장 장흥 회진면 앞바다로 이끌고 온 8척의 전선(판옥선)을 고쳤던 곳은 현재 장흥 회진면 덕산마을 땅머리 끝(산1-1번지)이며, 당시 장흥도호부 조선병창(造船兵倉) 감독자 김세호(金世浩)는 장흥출신으로 300여명과 함께 직접 도끼를 사용하여 부서진 판옥선 전함을 고쳤다. 그 당시 장흥도호부 해안(현재 회진면과 인근읍면) 이름 없는 민초들은 짧은 기간에 파손된 전함을 고치면서 갖은 고난을 겪었을 텐데 관련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아쉽기만 하다.

■ 장흥 회령진성, 삼도수군통제사 취임
 1593년 10월 9일 초대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장을 받은 후 모략에 의해 파직된 채 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하던 이순신은 1597년 8월 3일(음력) 다시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되어 수군재건 대장정을 했다.
이순신 장군의 대장정 길은 군관 송대립외 9명 장수와 함께 병선과 군사도 없이 맨손으로 경남 진주에서 시작해 구례~압록~곡성~옥과~석곡~순천부유창~순천~낙안~별교~보성조양창~보성을 거쳐 장흥 회진면 회령진성으로 이어진 330km를 돌아 회령진성에서 명량해전을 앞두고 전진지지로서 지휘했다.
이순신 장군은 1597년 8월 19일(양력 9월29일)에 장흥 회령진성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취임식을 거행했다. 선조 임금이 내린 삼도수군통제사 임명교지에 여러 장수(군인)들이 돌아가면서 숙배(임금이 계신 곳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공수한 손을 무릎 아래까지 내려 공손히 하는 절)함으로써 삼도수군통제사에 대한 위엄과 권한을 부여하며, 지휘에 복종하며 나라를 위해 충성하겠다는 의식이었다.
장흥 회령진성에 도착하여 3박 4일간 머무르면서 장흥부사(종3품직: 수군의 첨절제사를 겸임하여 그 당시 해남군수, 강진현령, 해남현령을 지휘)가 관할하는 회령진성(종4품 무관 만호:萬戶가 주둔하던 곳)에서 수군을 정비하고 부서진 전선을 고치도록 했다.
한국사 맥락에서 살펴보면 별스럽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전쟁사 측면에서는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간직함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가 인식되지 않은 채 회령진성 역사공원이 조성되었다.

 ■ 회령진성에 있어야할 조형물들이 다른 곳에 있다.
 1986년에 해남 우수영 국민관광단지를 조성했다. 그곳에는 장흥회령진성에 있어야 할 회령포의 결의, 폐선을 전선으로, 장흥출신 마하수 5부자 탑 등 아래와 같은 조형물을 설치하고 관련 내용을 새겼다.
◆폐선(廢船)을 명량의 전함으로
 칠천량 패전이후 우리에게 남은 전선은 부서진 판옥선 아홉 척 뿐이었고 엄청난 왜군 함대는 전라도 해역에 쳐들어오기 시작했다. 온전한 전선이 없어 해전이 불가능했던 이때 밤낮으로 폐선을 수리하여 마침내 명량해전을 가능하게 한 사람들이 있었다. 김세호, 정충양 등과 함께 전쟁 준비에 혼신의 힘을 쏟은 이들이 바 로 저 무명의 선장과 목수들이었다.
◆울돌목의 의병항쟁(1)
 명량대첩은 해남 등 해안 지방 사람들이 수군과 함께 목숨을 바쳐 싸운 의병 항쟁의 승리였다. 부자형제와 이웃들이 함께 참전하여 끝까지 싸웠으나 마하수 일가 5부자의 혈전이 한 예이다.
◆울돌목의 의병항쟁(2)
 부친이 적선에 포위된 통제사를 구원하다 적탄에 맞아 전사하는 그 시신을 안고 일성통곡하고 복수를 맹세한 마 씨 형제들, 그들은 패퇴할 때까지 결사의 항전을 그치지 않았다.
◆회령포의 결의
명량해전이 눈앞에 닥쳤을 때 장흥 회령포에 당도한 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김억추 등 관내 장수들과 더불어 최후의 결전을 맹세했다.“나라의 위태로움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우리가 어찌 한 번의 죽음을 두려워하랴. 이제 모두 충의에 죽어서 나라 지킨 영광을 얻자.”하여 비장한 결의를 다진 수군 장수들은 격전이 기다리는 우수영 바다를 향해 진군했다.
자료가 발견되어 앞으로 집중 연구가 필요하다.
 장흥해안에서 평생 바다에서 생계를 꾸려왔던 민초들은 소중한 목숨을 뒤로한 채 명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 장군을 따랐다.
그러나 이름마저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이름없는 백성들은 진도의 벽파진 부근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고 한다.
그러나 향선(鄕船: 고기잡이 어선) 10척을 초계변씨 여러 형제(이순신장군의 이종형제)와 백진남, 문영개, 정명열, 김성원 등 300여명 우리 장흥출신 의인들이 밤낮으로 전선으로 수리하여 회령포진 앞바다에서 합류했다.
이 충무공은 크게 기뻐하며 “이와 같이 나라가 어지러운 시절에 자기 몸을 희생하고 있는 힘을 다하는 공들을 충성스러운 사람의 기상으로 느끼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자료출처:초계변씨 십삼 충훈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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