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정/한학자

一分南北 形影莫接 而榮聞休暢 馳想之餘 賛歎何極 智峯兄之入寂 意謂奔喪而竟絕笻音 盖拘於國事奈何 中間音信雖阻 而徃來絡繹 每聞儤音布連直也直重地 小無魔妖 自非疇離有祉然乎 喜慰良深 拙六秩以後 散衆靜處 其衰老之形 赤窮之狀 乃是常事 而今年萬義二喪 法運垂盡 悲痛何堪 遠地特賜唁問 尤不任傷感也 聞朝家另下終身之俸 聖恩罔極 何以報答 古師有云 受恩深處宜先退 得意濃時便好休 不可改也 畦衣之下 親奉天顔 帶得敎旨之任 勝國或有 而入我朝 寂無所聞 不知吾丈以何善 緣而然耶 功成名立 至矣盡矣 知足知止 自今急務願 頻上乞骸之狀 擺脫南歸 當爲三十六策之第一 思之密矣 密矣思之 意滿楮狹 不盡所懷 統惟諒照

출전⟦蓮潭大師林下錄⟧

◼보경총섭께 올립니다.
-연담유일(1720~1799)

남북으로 한 번 헤어진 뒤로는 형체와 그림자도 접하지 못했는데 좋은 평판을 드높이셨다고 하니 마음만 달려간 나머지 찬탄은 얼마나 지극하겠습니까.
지봉 형께서 입적하셨을 때 달려가 조문하시리라 생각했었는데 마침내 소식이 끊겼습니다.
나랏일에 얽매이시어 못 오신 것인데 어찌합니까.
중간에 안부를 묻는 편지가 막혔으나 왕래는 끊이지 않았으니 매양 막중한 지위에 계시면서 연달아 숙직하며 임금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시는데도 조금도 장애와 요망한 일이 없었다고 들었으니 저절로 승도들은 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쁨과 위로가 진실로 깊습니다.

▲연담대사 문집 임하록

저는 예순 이후 절간에서 흩어져 살았으니 그 노쇠한 형상과 몹시도 궁핍한 용모는 바로 흔히 있는 일입니다.
금년에 경기도 화성 만의사에서 스승 두 분을 잃고 훌륭한 종문(宗門)의 법운(法運)이 거의 다하였으니 비통함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 먼 곳까지 특별히 위문하여 주시니 더욱 슬픈 감정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조정에서는 각별하게 종신(終身)의 녹봉을 내려 주셨다고 들었으니 성은이 망극함을 어떻게 보답하겠습니까.
옛 스승이 말씀하시기를 ‶깊은 은혜를 입었으면 마땅히 먼저 물러나야하고 충분히 뜻을 펼쳤다면 물러나 편히 쉬어야 한다.″고 했으니 이 말은 고칠 수가 없습니다.
가사를 걸친 승려가 몸소 임금의 용안을 뵈었으니 교지(敎旨)로써 국사(國事)의 임무를 부여받은 일은 고려 국에서는 혹 있었으나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는 들은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어른께서는 무슨 좋은 인연으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공을 이루시고 아름다운 평판이 났으니 지극하고 극진합니다.
만족함을 알면 그칠 줄 알아야한다고 했으니 지금부터 시급한 일은 자주 걸해지장(乞骸之狀, 늙은 재상이나 신하가 나이 등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임금에게 청원하는 일)을 올려 다 털어버리고 남쪽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히 36계책 중에 제일이 됩니다.
생각을 치밀하게 하시고 치밀하게 생각하십시오.
상념은 가득한데 종이가 작아 소회를 다하지는 못합니다.
오직 실마리를 헤아리고 살펴주십시오.

⦁送寶璟上人 보경 상인을 전송하다.

關東千里客 관동 가는 천리 나그네
秋思起鄕心 가을 회포에 고향생각 난다.
歸路山俱遠 귀로에 산은 모두가 멀어
離情海共深 이별의 정은 바다같이 깊다.
無盃君可勸 술 권할 만한 사람 없으니
有句我難吟 난 시 한수 읊기도 어렵구나.
楓岳他年約 풍악산은 훗날을 약속하니
行當早晏尋 이제 곧 조만간 찾아가리다.

출전⟦蓮潭大師林下錄⟧

注)
楓岳 - 금강산의 별칭. 여름철엔 봉래, 가을엔 풍악이라 한다.

◇보경 상인(寶璟上人)은 전라도 장흥부 보림사에 살았던 보경 사일(寶鏡獅馹)이다.
조선 후기의 승려로 생몰연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호는 보경(寶鏡). 전남 장흥군(長興郡) 보림사(寶林寺)에 살던 사람으로 정조(正祖)에게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을 바쳤으며 정조를 불교에 귀의시켰다고 한다.
정조14년(1790) 용주사(龍珠寺)를 지을 때 남한산성 도총섭(南漢山城 都總攝)으로 역사(役事)를 감독하고 팔도 도화주(八道都化主)가 되어 전국의 승려들로부터 기부를 받아 들였으며 팔도 도 승통(八道都僧統)을 지냈다고 한다. 그 뒤 왕의 신임을 받고 전국교단을 통솔했다고 전해진다.

◾與寶鏡堂
-仁嶽義沾(1746~1796)

旣見得三同苦 臨歸 復兩宵聯枕 此誠平生不易得底勝事 歸臥故山 益增瞻仰 伏惟政候 連嚮珍福 道場淸淨 慰漽區區 沾間關歸來 親候少蘇然衰耄日甚 快復似遲 私悶奈何 伏念春中大駕俯臨 應被入侍矣 其爲光寵 何以奉當 旣在其位 思庇八域緇流 庶使吾道不墜於地也 至至祝祝 適因順便 暫此附候 餘不宣

출전 ⟦인악집 仁嶽集⟧卷之三

◾보경당께 올립니다.
-인악 의첨(1746~1796)

이미 세 번이나 만나서 동고동락하고 돌아올 무렵에 다시 잠을 함께 자면서 이틀 밤을 지냈으니 이는 참으로 평생에 쉽게 얻을 수 없는 멋진 일이었습니다.
고향에 돌아와 눕자 우러러 사모함이 날이 갈수록 더합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기체가 계속하여 평안하실 것이며 도량이 청정할 것이니 나의 마음은 위로가 됩니다.
의첨이 어렵게 돌아오니 부모님의 환후는 조금 소생되었으나 노쇠하여 기력이 없으시니 완쾌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사사로운 근심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삼가 염려되는 것은 올봄에 임금의 행차가 당도하면 응당 입시하게 되실 겁니다.
성상의 총애를 어떻게 받드시겠습니까.
이미 그 자리에 계시니 온 나라 승도들을 감싸주어서 우리의 불도가 땅에 추락하지 않게 하시기를 빌고 빕니다.
마침 인편이 있어 잠시 이 안부를 전합니다.
나머지는 이만 줄입니다.

◊인악 의첨仁嶽義沾(1746~1796) 향년 51세. 선랍禪臘 33년.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인흥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는 이휘징李徽澄. 모는 달성 서씨. 18세에 용연사龍淵寺 가선헌공嘉善軒公에게 출가했다.
22세에 벽봉 덕우碧峰德雨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서악西岳ㆍ추파秋波ㆍ농암聾巖ㆍ설파雪坡 등에게 배웠고 이후 강백으로 활동하며 많은 사기私記를 남겼다.
1790년 수원 용주사龍珠寺 창건 시 정조의 명으로 증명 법사가 되어 의식을 주재하였고 ‶용주사불복장봉안문龍珠寺佛腹藏奉安文″ 등을 지었다. 비슬산 명적암明寂菴에서 입적하였다. 저서로 ⟦仁嶽集⟧이 전한다.

역자 注)
정조14년(1790) 수원 용주사(龍珠寺) 불사 때 보경과 인악은 동고동락하며 불사를 지휘한 것 같다.
왕이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용주사를 창건하여 불상 만드는 작업을 추진하면서 당시 이름난 승려로 하여금 이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이때 인악이 ‶용주사불복장봉안문(龍珠寺佛腹藏奉安文)″과 ‶용주사제신장문(龍珠寺祭神將文)″을 지으니 정조가 그의 문장에 감탄한 나머지 조선 제일의 문장가라 칭찬하고 홍제(弘濟)라는 호를 내리며 그곳에 머무르게 했다고 한다. 경상도 출신으로 불교계에서 연담유일과 쌍벽을 이루었으나 세수를 다하지 못하고 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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