幽居(유거)/월사 이정구
사는 곳 구석지어 찾는 발길 끊기는데
한가한 잠 깨어도 할 일이 전혀 없고
그래도 마음 안 놓여 봉우리를 바라보네.
幽居地僻斷過從    睡起閑齋萬事慵
유거지벽단과종    수기한재만사용
猶有憂時心未已    夕陽扶杖看前峯
유유우시심미이    석양부장간전봉

공직을 그만 두고 귀농歸農했던 경우가 많았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이른 바 귀촌歸村이다. 말이 귀농 귀촌이지 귀향歸鄕이나 진배없다. 그렇더라도 같은 의미를 지닌 말이다. 바쁜 공직생활에서 물러앉으면 모든 것이 한가하기만 하다. 이제 남는 건 그 동안 못했던 독서와 집필이다. 등산이나 산책도 빼놓을 수 없는 메뉴리라. 한가한 집, 잠을 깨어도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지만 그래도 근심은 있고 마음은 놓이지 않다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그래도 근심은 남아 있어 마음은 놓이지 않아(幽居)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1564∼1635)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14세 때에 승보시에 장원하여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되었으며, 22세에 진사,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3년 명사신 송응창을 만나 <대학>을 강론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사는 곳 구석져 있어 찾는 발길은 끊겼으니 / 한가한 집, 잠을 깨도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네 // 그래도 근심은 있고 마음은 놓이지 않아서인지 / 저물녘 지팡이를 짚고 앞 산봉우리를 바라보네]라는 시심이다.
위 시제는 [고요한 곳에 묻혀 외따로 살다]로 번역된다. 할 일은 없지만 해야 할 그 무엇을 찾아 만족하는 경우가 많다. 하는 일 없이 살아가지만 근심을 한 짊어지고 사는 경우도 많다. 우리네 인생살이의 한 모습들이다. 속세를 떠나 깊숙하고 고요한 곳에 묻혀 외따로 살면서 그래도 근심을 짊어지고 사는 경우도 본다. 인생은 늘 그렇게 바쁘게 살아간단다.
시인은 이런데 착안하여 한가하게 살면서도 한가하지 못한, 여유로우면서 여유롭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경우를 대비해 보인다. 사는 곳이 구석져 있어서 사람들이 찾는 발길도 끊겼고, 한가한 집에서 잠을 깨어도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는 초탈의 경우를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시는 대비법이란 사실을 염두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화자는 시격에 맞은 대반전은 근심과 걱정에 한 짐이 있었던지 바라보는 앞 산 봉우리를 다시 대비해 보인다. 그래도 근심 있고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햇무리 진 저물녘에 지팡이 짚고 앞 산봉우리 우두커니 바라본다고 했다. 정중동靜中動이란 대비법을 알 수 없는 근심으로 치환하는 멋을 부림에 따라 시격을 높이고 있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찾는 발길 끊겼으니 아무 것도 할 일 없네, 근심 있고 마음 못 놓여 산봉우리 바라보네’라는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한자와 어구】
幽: 그윽하다. 居地: 사는 땅. 僻: 구석지다. 깊숙하다. 斷: 끊기다. 過從: 지나는 발길. 睡起: 잠을 깨다. 閑齋: 한가한 집. 萬事: 만사. 모든 일.  慵 : 게으르다. // 猶有: 그래도 있다. 憂時: 근심스러울 때. 心未已: 마음이 놓이지 않다. 夕陽: 석양. 扶杖: 지팡이를 짚다. 看前峯: 산 앞 봉우리를 보다.
장희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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