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암괴석 면류관 아래에 위치한 한반도의 문화유산
고려대장도감에 새긴 ‘반야심경 경판’ 지방문화재 금동여래입상 등
사찰음식 맛보며 1박하면 몸도 마음도 맑아지고 행운도 따른다는 절

▲ 도성/탑산사 주지 스님

천관산은 그 모습을 처음 마주하는 이의 숨을 멎게 한다. 산봉우리에 자리 잡은 기암괴석의 이질적인 모양새는 시대를 막론하고 보는 이를 매료했으며. 남도 자락에 있는 산에 “천관”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탑산사 대웅전

하늘이 내린 천자의 면류관 같은 괴석의 모습만이 천관산의 매력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하늘을 찌르는 웅장한 기암괴석을 뒤로 산밑을 내려다보면 남해안의 다채로운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철 따라 옷을 갈아입는 천관산의 산자락과 그 너머를 꾸미는 다도해의 푸른 바다를 한눈에 담을 수 있다는 점에서 천관산의 정상을 향하는 길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정상까지 가지 않아도 천관산의 사계절을 누리는 방법은 다양하다.
 

▲지방문화재 탑산사 석등

가을에는 억새가 천관산의 일대를 은빛으로 물들인다. 겨울 끝자락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즈음에는 천관산의 동백숲이 빨간 얼굴을 하고 찾아오는 이를 반긴다. 2만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자생하고 있는 동백숲에 들어가면 멀리서 보였던 기암괴석의 웅장했던 산새와는 또 다른 매력에 푹 빠질 수밖에 없다.
자연이 빚어낸 보석이 가득한 천관산은 절경 외에도 또 다른 측면에서 주목해야 할 곳이다. 천관산 지대를 휘감는 역사적 사실을 더듬다 보면, ‘천자의 면류관’이라는 뜻의 단어 ‘천관’이 또 다른 의미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구룡봉 아래 자리 잡은 「탑산사」야말로 「천관」이라는 이름의 뜻을 확고하게 하는 천관산의 또 다른 보물이다.

2007년 9월 3일, 한국기록원은 탑산사를 우리나라 최초로 불교와 부처님 진신사리가 들어온 곳이라는 기록을 인정했다. 한국기록원은 정치, 경제, 사회, 과학기술, 역사, 문화 인물 등 국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에 관련된 기록을 수집하고 보관하는 것은 물론, 국내 우수 기록을 발굴해 인증할 뿐만 아니라 기네스북과 같은 세계 기록에도 등재시켜 대한민국의 기록문화를 세계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출범된 단체이다.

 

▲지방문화재 금동여래입상 ▲지방문화재 금동여래입상

한국기록원이 근거로 삼은 기록은 보물 제523호로 지정된 ‘석보상절(釋譜詳節)’ 제23권, 24권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석보상절(釋譜詳節)」 에 의하면 “아육왕(阿育王, 아소카왕)은 아도세왕이 세운 탑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다 내어 84,000개의 금, 은, 유리, 파려로 84,000개의 통과 병을 만들어 불탑을 세웠으니 중국에는 열아홉이고 우리나라에는 전라도 천관산과 강원도 금강산에 이 탑이 있어 영험한 일이 있었다.
아육왕(阿育王)이 탑을 세운 것이 려왕(厲王) 마흔여섯째 해인 무진년(BC233년/약 2천1백여 년 전)이었다”고 한다. 한국기록원은 이와 같은 문헌적 증거를 바탕으로 장흥 천관산의 탑산사야말로 한반도 불교의 첫 도래지라는 기록을 인정했다.
고서(古書)의 기록을 근거로 사찰의 역사와 그 중요성을 증명하고 주장하는 일이 당연하다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탑산사」를 둘러싼 역사적 기록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역사는 북방전래설과 남방전래설로 나뉜다. 북방전래설은 소수림왕 2년(서기 372년)에 고구려에 전해진 게 한반도 불교의 시작이었다는 주장이다. 남방전래설은 가야설, 제주도설, 법성포설 세 가지로 압축된다. 먼저 가야설은 가락국 초대 왕인 김수로왕의 왕비가 된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에 의해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해졌다는 설이다. 제주도설은 한라산 영실 존자암의 존재에서 시작한다.
존자암은 부처님의 16 아라한 중 발타라존자가 불법을 전하기 위해 제주도에 와 수행하면서 불교를 전한 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법성포설은 백제 침류왕 1년(서기 384년)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영광 법성포로 들어와 백제에 불교를 전래했다는 내용으로 영광군의 불갑사가 역사적 증거로 꼽히곤 한다. 
 

▲아육왕 탑

우리나라의 불교 도래지를 둘러싼 다양한 설이 존재하지만 대부분이 구전설화로 명확한 문헌 기록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문헌적 근거를 가진 탑산사의 첫 도래설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한국기록원이 인정한 「석보상절(釋譜詳節)」의 기록이 학술적으로도 인정될 경우, 한국 불교사는 500년 이상 앞당겨지게 된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왔고, 지금 우리 자녀들이 배우고 있는 역사 교과서는 다시 쓰여야 한다는 뜻이다. 역사적 상식을 뒤집는 일은 절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치밀하고 면밀한 조사와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여기에 학술기관의 지표조사를 위한 장흥군의 적극적인 대처가 더해진다면 문헌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사실 확인과 이를 확고히 하기 위한 절차가 더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곳인 부처님 진신사리가 들어온 사찰 탑산사는 문헌 기록뿐만이 아니라 이 지역의 불교 중심지의 역할도 담당해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보물 제88호 탑산사 동종. 대흥사에 보존

탑산사 큰절 주지 도정스님은 “불교 전성기 천관산에 89 암자가 있었는데 「탑산사」는 89 암자를 이끌었던 으뜸 사찰이었다"고 과거 탑산사가 지닌 위상을 이야기했다. 과거의 위용은 지금도 그 흔적이 뚜렷하다. 암자터에 주춧돌이 괴여 있고 주변에는 기왓조각들도 널려 있으며, 또 아육왕(阿育王, 아소카왕) 탑으로 알려진 바위와 의상대사 등 고승들이 수양한 터도 남아 있다. 탑산사의 주요 유물로는 보물 제88호로 지정된 「탑산사 동종」과 지방문화재 「탑산사 석등」, 고려대장도감에 새긴 「반야심경 경판」 등이 있다.
 한국기록원의 인증을 받은 문헌 기록과 이를 입증하는 사찰의 역사와 문화재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천관산의 탑산사. 화려하고 찬란한 기암괴석의 왕관을 쓰고 있는 천관산을 바라보고 있자면 아육왕(阿育王, 아소카왕)의 명을 받아 부처님의 사리를 들고 한반도를 찾은 승려들이 탑을 세울 장소로 천관산을 선택한 이유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옛날 먼 나라에서 남도를 찾은 이방인들을 사로잡은 천관산의 수려함과 600미터 고지에 있는 탑산사의 존재야말로 그 어떤 기록보다 이곳이 한반도의 불교 기원지라는 확실한 증거가 아닐까? 천관산의 신비로운 산새 아래 자리 잡은 탑산사의 웅숭깊은 발자취는 반드시 재평가되고 또 보존되어야 한다. 역사를 잃은 이들에게 미래는 없기 때문이다. 탑산사를 방문하여 사찰음식을 시식하고 하룻밤 묵는다면 몬과 마음이 맑아지고 행운도 따른다고 한다. 기도 도량으로 권한다.
▲ 도성/탑산사 주지 스님 ☎010-7416-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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