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토 볼라뇨의 문학과 한국의 수용 과정 연구’ 주제
“제3세계 주변부 작가의 저항정신, 국내에도 영향 컸다”
“희소한 중남미 문학, 공동체 회복에 필요한 단서 될 것”

“중남미 문학에 대한 독자적인 연구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특히 문학 번역이 서로 다른 문화권의 독자들에게 변화를 야기할 수 있는 점을 중요하게 언급함으로써 문학에 대한 사유를 넓혔다.” -전미 스페인ㆍ포르투갈어 교사 협회(AATSP) 주관 제103차 국제학술대회 우수학술논문상 심사평 중-

  제3세계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 문학에 관해 연구한 논문이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학술대회에서 독자성과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전남 장흥 출신의 조선대학교 글로벌 인문대학 유럽언어문화학부 이경민 교수(스페인어학과)는 해당 논문으로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전미 스페인ㆍ포르투갈어 교사 협회(AATSP) 주관 제103차 국제학술대회에서 우수학술논문상(Outstanding Scholarly Publication Award)을 수상했다.

이 교수는 장흥읍 향양리 병천마을 이의준(작고)과 최연임 사이 2남 2녀 중 장남이다. 장흥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중학교부터 광주에서 공부했다.

이 교수의 수상 논문은 한국에서도 희소성이 높은 중남미 현대문학을 다룬 것으로 해외에서 먼저 연구 가치를 인정받아 화제가 되고 있다.
“2주 전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사실은 그냥 덤덤했습니다. 제가 보기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것 같아 이런 상을 받아도 되나 싶었죠. 하지만 인문학 분야로는 미국사회의 인정을 받는 일 자체가 드문 일이고, 이번을 계기로 한국에도 중남미 문학이 조금이라도 알려지면 좋을 것 같아 기쁘기도 했습니다.”
이경민 교수는 지역 학계에서 흔치 않은 중남미 현대문학 전공 연구자다. 겸손한 수상 소감처럼 그는 20년 동안 담담하게 전공 연구에 매진해 왔다.

문학의 고장 장흥군에서 유년기를 보낸 이 교수는 이청준, 한승원과 같은 걸출한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문학사 연구에 깊은 통찰을 얻었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고향 출신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읽게 되면서 문학에 대해 깊은 유대 정서를 갖게 되었어요. 제가 문학가는 아니지만, 연구논문을 쓰면서는 우리나라에서 많이 읽혀 우리나라 문학 연구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중남미 문학이 한국어로 번역되고 연구를 시작한 역사가 길지 않기 때문에 타 전공에 비해서 연구 자료가 미비하거든요.”

이 교수의 논문 주제는 ‘로베르토 볼라뇨의 문학과 한국의 수용 과정 연구’로 지난 2019년 미국의 존스홉킨스대학교(Johns Hopkins University)가 발간하는 학술지 ‘이스파니아(Hispania)’에 게재됐다. 이전의 중남미 문학들의 국내 수용과는 다른 결을 짚어내며 문학에 대한 사유를 넓힌 논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칠레 출신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의 문학이 우리나라에 수용된 과정을 보면 흥미로워요. 제 3세계 국가, 그 중에서도 주변부 작가의 작품이 가진 저항적 특징이 새로운 문학사조의 불씨가 된 셈이지요.
노벨상을 받은 칠레의 작가 파블로 네루다는 1970년대 국내 정치 상황을 반추하는데 기여했다면, 볼라뇨는 기성 문단 자체에 반기를 들고 네루나마저 비판하는 저돌성을 보여줍니다. ‘피노체트’ 정권 하에 어두운 정치에서 만들어진 문학적 명성이란 결국 어떤 식으로든 권력에 기대어 도덕성, 예술성의 결핍이 불가피해졌다는 비판이었죠.
볼라뇨의 영향으로 21세기 한국 문단에서도 젊은 작가들이 주류 문학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문학운동(후장사실주의)을 전개했어요. 중남미 문학 번역본 자체가 드물었던 20년 전까지는 이렇게 다양한 문학사조가 생겨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2010년대 들어 국내 신진 작가들(이상우, 오한기 등)이 로베르토 볼라뇨의 인프라레알리스모(밑바닥사실주의-내장사실주의)를 패러디해 기성문단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후장사실주의를 전개했다. 이들은 익살스런 패러디를 통해서 기성 질서를 조롱하거나 모른 척 하는 방식을 취했다.

“중남미 문학의 형식을 떠올리면, 보통 마술적 리얼리즘 소설로 유명한 ‘백 년 동안의 고독(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와 정반대의 사조를 유지하며 대척점에 있었던 작가가 볼라뇨에요. 밑바닥 현실의 처참한 실상 그대로를 샅샅이 짚어내는 작가의 역할을 자처하죠. 역사에 다뤄지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 오랜 식민의 역사, 독재 정권 등이 낳은 비롯된 비참하고 참혹한 현실을 처절하게 응시한 주변부 작가입니다.
그의 작품 ‘칠레의 밤’은 출세를 위해 문학을 하는 사람들을 등장시켜 문단뿐 아니라 권력의 핵심부를 직설적으로 꼬집고 있습니다. 그래서 볼라뇨는 칠레인이었지만, 칠레에서만큼은 결코 환영받지 못했지요.”
이 교수는 볼라뇨의 작가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그 역시도 중심부의 부패와 타락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저항정신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필수 요소라고 믿는다.

이 교수는 조선대학교 스페인어학과 재학 시절에 쌀 수입 반대를 외치며 데모에 참여하다 감옥에 끌려간 적이 있다. 엄혹했던 시기 민주화 투쟁의 마지막 세대로서 저항의 힘을 온 몸으로 체감했던 그다. “사회를 바꾸고 싶다”는 열망은 어느덧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옮겨 붙었다.
“3개월 수감생활을 마치고 군대도 다녀온 뒤 학교에서 보내주는 해외연수로 잠깐 동안 스페인을 가게 되었어요. 당시 혼란스럽고 치열했던 우리나라와 다르게 너무도 여유로운 스페인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같은 지구인으로 살면서 이렇게나 다른 삶의 방식이 있을 수 있구나. 한국사회도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변화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을 하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공부에 전념해보기로 결심했어요.”

이 교수가 마음을 굳힌 전공은 중남미권 현대문학. 오랜 시간 스페인 식민의 역사의 아픔을 겪었지만, 이질성 속에서도 동질성을 찾아내고 지켜가려는 노력이 중남미 문화에 남아 있었다.
급속한 성장기를 지나 이제는 다른 문화권의 외국인, 다문화 가정을 우리 공동체로 받아들이게 된 한국이 배우고 받아드릴 가치가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렇게 이 교수는 중남미 문학에서 공동체 회복을 위한 단서를 찾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주변부 작가 볼라뇨가 그의 연구의 중심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 교수는 20년 동안 한결같이 연구자의 길을 걷고 있다. 조선대, 서울대에서 수학하고 멕시코로 건너가 메트로폴리탄 자치대학교에서 로베르토 볼라뇨 연구로 인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를 지내다 2018년 모교인 조선대로 옮겨와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광주ㆍ전남에 연구를 공유할 같은 분야 전공교수가 거의 없어서 아쉽지만, 학생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전하고 다른 세계로 안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교수직에 대한 보람이 크다고...
“제가 항상 학생들에게 하는 말이 있어요. ‘한국인으로만 살려고 하지 말고, 지구인으로 살라”고요. 한국이라는 공간, 전공이라는 한계에 연연하지 않고 다양한 경험을 쌓아서 세계를 보는 지평을 넓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한국의 작가들이 볼라뇨의 작품을 통해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듯이 우리가 미처 모르는 세상이 언제고 새로운 물결로 다가올지 모를 일이잖아요. 저 역시 아직도 낯설고 그래서 새로운, 중남미 문화 연구를 지속하려 합니다. 중남미 나라의 원주민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삶을 이해하고, 어떻게 공동체 가치를 지켜왔는지 밝혀내고 싶습니다.”

한편 전미 스페인ㆍ포르투갈어 교사 협회(AATSP) 주관 제103차 국제학술대회 우수학술논문상 시상식은 올해 7월로 예정되어 있지만, 이경민 교수는 코로나19 상황 등을 고려해 행사에는 참석을 하지 않을 계획이다. 상패와 상금은 따로 전달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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