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본 원문에 스며들어 시적인 상상력으로 휘감긴 
안중근! 동양평화 [각론]을 가슴으로 뿌리며

◀지난호에 이어서
적을 죽이고 나라의 독립을 기필코 찾겠다는 깊은 유지를 심으려는 [의병중장 응칠 안중근의 장대한 뜻]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운자 [外]는 측성으로 평성을 놓아야 되겠지만, 오언절구처럼 측성자를 놓았으나 여기는 칠언절구도 측성운자를 써도 무방한 자리다. 시인은 모든 백성들이 한결 같은 뜻을 담아 이제 큰일을 도모해야겠다는 원대한 뜻이 되지 못함을 깨닫고, 침략의 원흉 이토를 하얼빈에서 반드시 사살하는 대업을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내용까지 잘 암시되었다. [男兒有志]를 담는 도마 안중근의 대업이란 깊은 의지가 도담도담 담겼음을 알겠다. 남아로 태어나서 이런 기상쯤은 적어도 대범했으리라.

2. 現象(현상)으로 보여주는 우리의 展望(전망)
앞에서 언급했듯이 [현상(現狀)]은 그냥 보는 것이고, [현상(現象)]은 관찰하며 보는 것으로 다르다. 現狀은 [지금 상태]이고, 現象은 [관찰할 수 있는 사물의 모양]으로 다른 뜻이다.

일본의 군사 재무장화와 재침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이 때에, 미래를 예시하는 역사적 통찰력은 [한~일] 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줄 것으로 믿는다. 110년 전 차디찬 저 뤼순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한 안중근이 희구(希求)한 바도 바로 이것이란 강한 방점이 찍힌다.

재판 과정에서 미즈노(水野)와 가마타(鎌田) 두 관선 변호사가 “피고의 범죄는 분명하고 의심할 바 없으나, 그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므로 그 죄가 크고 중대하지는 아니하다. 더구나 대한인에게는 일본의 법 관할권이 없다”고 변론했는데, 이 변론 후 안중근은 “이토의 죄상은 천지신명과 모든 사람이 다 아는 일인데 무슨 ‘오해’란 말인가. 나는 개인 원한으로 남을 죽인 죄인이 아니다. 나는 대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직무로 하얼빈에서 전쟁을 수행하다 포로가 되어 이곳에 온 것이다. 지방재판소와는 전연 관계가 없는 일인 즉, [만국형법과 국제공법]으로 재판하는 것이 옳다”고 스스로를 변론했던 일 등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 모두가 인지해야 할 중요한 언변이다.
이틀 뒤 사형을 구형받은 안중근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예로부터 허다한 충의로운 지사들이 죽음으로써 충성하고 정략을 세운 것이 훗날의 역사에 맞지 않은 것이 없다. 이제 내가 동양의 평화를 위해 정성을 다하고 온 몸으로 방책을 세우다가, 끝내 허사로 돌아가니 통탄한들 어찌하랴. 그러나 일본국 4천만 국민이 안중근의 죽음을 두고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다면 반드시 이 같은 정책을 쓰지 않을 일이다. 최소한의 염치와 공정심이 남아 있었던들 어찌 이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과연 큰 죄인이다. 어질고 약한 대한제국 인민이 된 죄로다”라고 기록한 재판기록도 있다.

자서전의 마지막 귀절은 홍 신부와의 인연과 성세대례를 거행하고 헤어지는 1910년 경술 음력 2월 초하루의 기록까지 있어 우리는 주목을 끈다. [안응칠의 역사책]은 “안중근의 32년 동안의 길지 않는 역사의 대강이 종합되어 있다. 2010년 경술 음력 2월 초닷새(양력 3월 15일) 뤼순옥중에서 대한국인 안중근이 쓰다”로 끝을 맺고 있다.

▲장동면 해동사에는 안중근 의사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유서 동양평화론’은 자신이 듣고 공부했던 바의 구상을 서술한 [평화공존론]이다. 안중근의 염원은 크게 [자주독립, 동양평화]로 대변되는데, 동양대세를 생각하며 순 한문으로 쓰였고, 집필 시간이 절대 부족한 상태에서 [미완의 글]로 남았다. ‘안응칠 역사’가 3월 15일에 탈고되었는데 3월 26일에 안 의사가 순국하였으니 결국 구상기간은 길었을망정, 집필 기간은 불과 열흘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사이 3월 24일에 6통의 유서를 남겼으며, 3월 25일에는 두 동생까지 면담을 했었다.
뤼순의 재판관은 본국의 뜻에 따라 이토 사망 5개월에 맞춰 사형을 언도하려며.

「그대는 이제 사형이 선고되려는 마당에 마지막 할 말은 없는가?」란 어눌한 재판관의 주문에 다음 시 한 수를 읊으면서 조국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시상으로 일궈냈다.

멀지 않아 이 목숨 끝나려 하나
민족이 겪었던 수난 언제 끝나랴
교수대의 한 방울 이슬 될지언정
내나라 꽃잎 위에만 맺히어 주렴.
  =應七(응칠) 安重根(안중근) : 교수대(絞首臺) 전문

▲해동사 안내소

시인 안중근의 찢어지는 마음을 우려내어 울컥함이 전율되어 흐른다. <3대 義士> 중 한 사람인 강우규의 단두대(斷頭臺) 단두대(斷頭臺) : 강우규 지음. [단두대 위에 서니(斷頭臺上) /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猶在春風) /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有身無國) 어찌 깊은 생각 느낌이 없겠는가(豈無感想)]. 강우규를 비롯하여 안중근. 윤봉길을 <3대 의사(三大 義士)>라 한다.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은 1909년 10월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사살시켰고,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은 1932년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 수뇌부에 폭탄을 투척했으며, 강우규(姜宇奎 1855~1920)는 1920년 남대문역 투탄 의거자(義擧者)다.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의(義)]를 지켰던 애국지사다.
 시 한 수가 울컥 가슴을 스친다. 안중근 시제 [교수대]는 목에 줄을 묶은 처형이고, 강우규 시제 [단두대]는 칼로 목을 자르는 처형이다.
본 평설 소고(小考)의 마지막으로, 현재 보물 제569-5호로 지정되어 있는 <동양평화론>의 대체를 밝힌 의병중장 안중근이 마지막으로 쓴 유묵인 절구 한 수가 우리 땅에 남은 자들이 반듯이 기억해야할 지상 목표로 삼아 살펴보는 것을 끝으로 이 평설을 마무리한다.

사형집행 전날 취조관 중의 한 사람인 사카이 경시의 마지막 요청을 차마 더는 거절할 수가 없어 최후의 진술 같은 한 줌 시상을 피를 쏟는 마음을 담아 온 몸으로 우려냈다. 일본을 두고서 [침략적 정략을 고치지 않으니 참으로 가엾구나]라고 읊어냈다. <끝내 기울어져가는 내 조국 대한민국!> 피맺힌 가슴의 응어리 한 가닥을 담아내자는 마음을 담아 안중근의 우렁찬 목소리가 온 산하를 뒤 업듯이 저 멀리서 달렸으리라.

東洋大勢思香玄 (동양대세사묘현)
동양대세를 생각함에 아득하고도 어둡거늘
有志男兒開安眠 (유지남아개안면)
뜻있는 사나이가 편안한 잠 어이 이루리
和局未成猶慷慨 (화국미성유강개)
평화시국을 다 못 이룸이 이리도 서글픈데
政略不改眞可燐 (정략불개진가인)
 침략적 정략을 고치지 않으니 참 가엾구나.
=應七(응칠) 安重根(안중근) : 정략부개
(政略不改) 전문

라는 내용으로 시인 안중근은 일제에 대한 짤막한 마지막 경고문 한 수를 쏟아냈다. 여기에서도 시인은 시제(詩題)를 앞마당에 내동댕이치면서 그만 미처 붙이지 못했기에 평자가 내용의 핵심을 골라 [政略不改(정략부개)]라고 붙여보았다. 시인의 속 깊은 뜻과 많이 어긋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안중근의 단두대 위에 살포시 깔아드렸다.
이 시는 안중근 의사가 남긴 자작 어록 중에서 심금을 파고드는 명문이라는 판단에 따라 평설문 시제에 따른 요지문으로 다듬었다. 응칠 안중근의 순국 전날인 3월 25일 여순 옥중 취조관 중의 한 사람인 사카이 요시아키 경시가 ‘유서 동양평화론’의 미완을 보고, 안중근에게 <책의 결론을 써주기>를 거듭 요청함에 따라 썼던 시라고 가만히 귀띔해주었다. 원한국(怨恨國) 일본인 사카이가 아니었더라면, 위의 시 [정략부개(政略不改)]는 우리를 시원스럽게 해주지 못했으리라. 또한 이 시는 ‘미완의 동양평화론’을 간추리는 [결론]이란 자리에도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침략했던 통치자가 문제였을 뿐이지, 개개 일본인들은 [황인종 동양인!]이라며 살갑게 다가오는 긍지를 느낄 때도 더러 있었단다. “우리, 우리들 손잡고 같이 가자면서…”                  《2020-12-22(土)》

▲장동면 만수길 해동사

【옥중 집필본 동양평화론】전감(前鑑)에서 문답(問答)까지는 이것으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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