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정/한학자 김규정/한학자

浮槎之西 山陽之東 間有山焉 金華其名也 中有寺焉 澄光厥號也 吁 山水淸峻 林壑幽靜 仁智所樂 隱子所栖亦莫如此地也 是以金剛自性 鐵石其志者 一入雲扄 而菩提樹枝 心華發明 則名之以金華 豈不然乎 弊屣人間 高蹈物表者 暫住禪扉 而智海澄淸 慧光獨曜 則稱之以澄光 不亦宜哉 世稱昔有郡城巨室 金公倣致仕還家 閑居養素 一日出獵山下 放鷹徘徊 見一獐射之 追逐不舍 兼玩山水 深入澗谷 則靑蘿之下 碧殿之內有一佛像 箭穿腋下 見而異之 了無狐疑之念 別有殊勝之想 乃於其處伐木開基 建大伽藍 尋眞緇素 自遠風趍者 莫不歎未曾有 不可不謂之奇勝也 及其破改古殿 則但有書新羅法興王朝重剏之語于棟樑之間 而猶未現始剏之年代也 由是以來 時淸無事 邊烽息紅 塞草抽靑 上下各得其樂矣 顧乃時移歲換 流至于萬歷丁酉之兵燹 則崢嶸梵宇 俱焚蕩破 風悲古樹 月吊空階者久矣 粤有山之德士省田 得與二三子 誅茅剪棘 遂結禪廬一二所 僅蔽風雨 聊以栖遲 雖有志於興復一寺 計無成而霜催兩鬂 縱虧爲山九仞之屹 尙有收露補流之功也 降及天啓丙寅 郡守林公敬業 偶然仙鳬飛及于此 歎禪宮之衰歇 想塵世之堪哀鳩材補屋 招集釋徒 捐俸周急 多有仁恕 撫民餘澤 遠沾山家 功莫大焉 逮至己卯庚辰 有雲衲某某諸禪 接武相承 重營寶殿 繼建瓊樓 敬造眞儀以至堂宇 蔚然化成 庶事旣整 百廢俱立 亦未必專美於前矣 爰有說者 淸舒事蹟之大畧 以爲將來之標準 姑述梗槩 明其首尾 俾後有攷焉
 
출전 ⟦詠月堂大師文集⟧

❍징광사 중창기

부사(浮槎 낙안)의 서쪽과 산양(山陽 보성)의 동쪽 사이에 산이 있으니 그 이름(名)은 금화(金華)이고 가운데 있는 절은 그 호(號)가 징광(澄光)이다.
우와, 산수가 간결하고도 준엄하고 숲 골짜기는 어둡고 고요해서 어질고 슬기로움을 좋아하는 곳으로 은자가 깃들만한 장소로는 이 땅 같은 데가 없다.
이 때문에 견고한 금강 자성(金剛自性)으로 철석같이 그 뜻을 품은 자는 산문(山門)에 한번 들어가면 보리수 가지는 마음의 꽃을 밝게 드러내기에 이름 하기를 금화(金華)라고 하니 어찌 그렇지 아니한가.
헌신짝을 내버린 인간은 세속을 떠나서 세상을 초월한 자로서 선방의 사립문에 잠시 머무르다 맑고 깨끗한 지혜의 바다에서 슬기로운 빛은 유독 광휘를 발하자 일컫기를 징광(澄光)이라 했으니 또한 당연하지 않은가.
세상에서 말하기를 옛날에 군성(郡城 낙안읍성)에 명문가가 있었는데 김공(金公)이라는 사람이 벼슬을 사직하고 귀향한 집안을 본받아 한가하게 살면서 성품을 닦고 있었다. 하루는 산 아래로 사냥을 나가 매(鷹)를 풀어놓고 배회하다 한 마리 노루를 발견하고 활을 쏘며 포기하지 않고 쫓아가다 아울러 주위의 산수를 탐하고는 깊은 골짜기에 들어섰다.
푸른 등라덩굴 아래에 있는 푸른 전각 안에는 한 불상이 있어 화살을 당겨 겨드랑이 밑을 뚫고는 대충 보아도 기이하게 생겼지만 의심하는 마음은 전혀 들지도 않았다.
별도로 기특한 생각이 일어나 마침내 그곳을 벌목하고는 터를 닦기 시작해서 대가람을 세웠다.
멀리서부터 몰려 든 진리를 구하는 승려와 속인(緇素)들은 미증유(未曾有)의 일에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기묘하고 뛰어난 경치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옛 불전(古殿)을 무너뜨리고 개수(改修)하는 일에 이르면 다만 신라 법흥왕 조에 중창했다는 말이 마룻대와 들보 사이에 씌어있고 아직도 처음 창건한 연대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후로 시절이 태평해 일이 없다가 변경의 붉은 봉화는 꺼지고 요새지 풀은 푸르게 돋아나더니 상하가 다들 제 즐거움을 누렸다.
이에 시세의 추이와 변환을 돌아보니 흐름이 만력 정유년(선조30년1597) 전화(戰禍)에 이르면 세월이 오래된 불찰(佛刹)들은 다 불타고 모조리 파괴되어 옛 나무에 바람만 슬피 울고 달만이 빈 뜨락을 조문(弔問)한지가 오래되었다.
깊은 산중에 있는 승려들과 전답을 몸소 살펴보고 나서 두서넛 사람을 얻어 띠 풀과 가시나무를 베어내고 마침내 선방 두 곳을 마련하니 겨우 비바람은 가릴 수 있었고 그런대로 충분히 쉬고 노닐 수는 있었다.
비록 한 사원(寺院)을 부흥시키는데 뜻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룬 일 하나도 없이 두 귀밑머리 세는 것만 재촉했다.
가령 아홉 길 높이의 우뚝한 산이 무너질까 걱정해도 오히려 이슬방울을 거두어 보충해 흘러가게 하는 공이 있다.
세월이 흘러 천계 병인년(인조4년1626)에 이르면 군수 임공 경업이 우연찮게 선부(仙鳬, 족적足跡이나 행적行跡, 지방관의 행차를 가리킨다)를 날려 여기에 이르러 선궁(禪宮 절간)이 쇠퇴해 가는 모습을 보고 탄식하면서 속세는 너무도 애처롭다고 생각하고는 보수하려고 재목을 모으고 승려의 무리를 불러들이고 자기 녹봉을 떼 줘가며 급박한 상황에 놓인 사람을 구하여 주자 사랑과 관용을 베푸는 자가 많았다.
끼치고 남은 혜택으로 백성을 어루만지고 머나먼 산속에 있는 집까지 더하니 공적은 이보다 큰 것이 없었다.
기묘년‧경진년(인조17‧18년1639‧1640)이 되어서야 운수납자(雲水衲子) 모모(某某)와 선객(禪客)들이 그 뒤를 서로이어 대웅보전을 다시 짓고 호화로운 누각을 이어서 세우고 공경히 진의(眞儀‧眞影)를 조성해 당우에 모셔 성대하게 교화시키고 이루어가니 모든 일이 정돈되었다.
제대로 시행되지 않던 종전의 많은 일들이 모두 다시 시행되었음에도(百廢俱立) 옛날보다 오로지 아름답다고만 할 수가 없었다.
이에 누군가(有說者)가 있으면 사적의 대략을 시원하게 펴서 장래의 표준으로 삼아야 하니 우선 경개(梗槪, 대강)를 진술해서 그 처음과 끝을 밝히고 후인들로 하여금 상고하게 하노라.

❍物外庵勸善文
-詠月堂大師(1572~1654)

金華山中 有一舊墟 泉甘土肥 林壑尤美 人烟敻絶 塵蹤罕到 故以物外名其庵也 觀夫背倚霞岑 俯壓蒼江近控八嶺 遠連支提 南望則隱然乎漢拏之崒嵂 東望則歷落乎方丈之崔嵬 以至萬點漁火碧海成紅一聲欵 乃白鷗雙飛 猿啼嶺上 鶴唳林間 朝雲暮烟 態度無窮 此則物外之勝狀也 噫月盈則虧 物盛則衰 理數之當然歟 昔聞梵宇崢嶸 今見石逕荒凉 靑松落陰 白雲空鎻 溪聲訴怨 山色帶慘而已 山野來自冠山 屨及于此 慨然有重新之志 事不爲不多 力不爲不少 告于善男善女 逆旅天地之間 過客光陰之中 彭殤同夢 凡楚一轍 家積千金 竟爲陷身之芳餌 心存一善 終作上天之良橋 倘副雅懷 請垂金諾

출전 ⟦詠月堂大師文集⟧

❍물외암 권선문

금화산중에 옛 유적지 하나가 있으니 샘물은 달고 토질은 비옥하며 숲 골짜기는 더욱 아름답고 사람 그림자는 아득하게 끊겨 속인의 발길이 드물어 물외(物外)를 이 암자의 이름으로 삼았다.
자세히 보면 뒤로는 머나먼 산봉우리에 기대고 내려다보면 푸른 강을 진압하고서 가까이로는 팔령산(八嶺山)을 잡아당기고 멀리로는 지제산(支提山‧天冠山)과 잇닿아있고 남쪽을 바라보면 유다르게 드높은 한라산(漢拏山)은 어렴풋하고 동쪽을 바라보면 높고 큰 방장산(方丈山‧智異山)은 세속을 벗어나 고결하다.
수많은 고기잡이배 등불은 푸른 바다에서 불꽃을 이루어 한 곡조 뱃노래와 어울린다.
하얀 갈매기는 짝지어 날고 고갯마루에서는 원숭이 소리가 시끄럽고 학은 수풀사이에서 울어대고 아침구름과 저녁안개 거동은 무궁하다.
이는 물외암(物外庵)의 아름다운 풍경이니 아, 달이 차면 기울고 만물은 가득차면 쇠퇴해 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옛날에는 세월이 오래되었다고 들었던 암자가 오늘에야 보니 황량한 돌길에 푸른 소나무 그림자 드리우고 흰 구름은 부질없이 쌓여만 있고 시내는 원망을 호소하는 소리를 내고 산색은 슬픔을 머금었을 뿐이었다.
산야는 관산(장흥)으로부터 왔으니 발길이 이곳에 미치자 감개무량해서 새로운 뜻이 거듭해서 일어났다.
일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힘은 적지 않아서 선남선녀에게 고하노니 천지간의 여관과 광음 속을 지나가는 나그네로 오래 살건 일찍 죽건 다를 것은 없지 않은가.
온 세상(凡楚)은 한 수레바퀴 자국(一轍)을 밟듯이 집안에 천금을 쌓아 놓아도 마침내는 향기로운 미끼에 몸은 빠져들기 마련이니 마음을 보존하는 한 가지 착한 일은 종국에는 상천가는 선량한 다리가 되어야한다.
만약에 바르고 아름다운 생각을 지녔다면 청컨대 굳은 승낙(金諾)을 후세에 전하라.
 
注)
彭殤 - 팽은 팽조(彭祖)로서 800살을 산 사람이고 상은 성년이 못 되어서 죽은 아이를 가리킨다. 장수(長壽)와 요절(夭折)을 말할 때 흔히 쓰인다. 장수한 팽조나 요절한 아이나 죽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을 말한다.
凡楚 - 춘추 시대 강대국인 초나라와 그의 속국인 범 나라를 합해 부르는 말이다. 강자와 약자, 또는 온 세상의 뜻으로 쓰인 것이다.

▲보성 금화산 징광사 유허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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