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본 원문에 스며들어 시적인 상상력으로 휘감긴
안중근! 동양평화 [각론]을 가슴으로 뿌리며

▲하얼빈 안중근의사 기념관 ▲하얼빈 안중근의사 기념관

▼지난호에 이어서

5. 문답(問答)
1) [문답]의 속뜻과 동양평화론에 얽힌 배경의 세계

문답(問答)은 본인이 묻고, 제3자인 상대방이 대답하는 형식이다. 아니면 그 반대로 상대가 묻고, 본인이 대답하는 형식도 예상된다. 좋은 방안을 탐색하기 위해 가까운 사람과 대화하고 합리적 방안을 찾는다. 동양평화론을 부여잡고 세계정세에 민감했던 안중근이고 보면 [전감(前鑑)]의 영역을 벗어나지를 못했을 것이라는 불같은 생각이 두 눈을 스쳐 지난다. 때늦은 후회감을 T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난상토론을 하는 것으로 묻는 자는 안중근이요, 이에 대답하는 자는 안중근 취조한 미나베 재판장이란 가상적인 인물과 동양평화론을 두고 문답 형식이나 상상으로 이끌 수도 있다. 그래서 안중근은 이 문답이란 설문을 맨 나중에 설정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음과 대답. 또는 서로 묻고 대답함. 원불교에서는 스승과 제자, 교무와 교도 사이에 심중에 담고 있는 일이나 공부 중에 의문이 되는 사항에 대하여 서로 대화하게 하는 문답 감정의 과정을 통하여 공부가 익어가도록 했다. 보통 불교에서는 [묵식심통(默識心通)]이라 하여 말을 잘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통하는 문답이기도 했다.
일본이 한국에 대해서 이미 큰 욕심을 갖고 있었다면 어찌 자기 수단껏 자유로이 행동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유럽 백인종과의 조약 가운데 삽입하여 영원히 문제가 되게 만들었단 말인가. 침략자를 두둔함은 도무지 어이없는 짓이다. 또한 미국대통령이 이미 중재하는 주인공이 되었을지라도 곧 한국이 유럽과 미국 사이에 끼어있는 것처럼 되었으니 중재자도 필시 크게 놀라서 조금은 기이하게 여겼을 것이다.
같은 인종을 사랑하는 의리로서는 만에 하나라도 승복할 수 없는 이치다. 또한 (미국대통령이) 노련하고 교활한 수단으로 고무라 외상을 농락하여 바다 위의 섬이 약간 조각난 땅과 파선(破船), 철도 등 잔물(殘物)을 배상으로 나열하고서 거액의 벌금은 전부 파기시켜 버렸다. 만일 이 때 일본이 패하고 러시아가 승리해서 담판하는 자리를 워싱턴에서 개최했다면 일본에, 대한 배상요구가 어찌 이처럼 약소했겠는가. 세상의 일이 공평하고 공평하지 못함을 이를 미루어 가히 알 수 있을 뿐이다.

2) [문답(問答)]에서 보이는 동양평화론 사실적인 배경
안중근 동양평화론은 [서문]에 16문단, [전감]에 40문단을 배열했고, [현상ㆍ복선ㆍ문답]은 모두 빈집이었다. 고른 평설을 순서대로 위 [3개집]에도 10문단씩 배열했다.
(31) 황차 러ㆍ일 담판을 보더라도 이왕이면 강화 담판할 곳을 의정(議定)하면서 천하에 어떻게 「워싱턴」이 옳단 말인가. 당일 형세로 말한다면 미국이 비록 중립(中立)으로 편벽된 마음이 없다고는 했겠지만, 항차 짐승들이 다투어도 오히려 주객이 형세가 있는 법인데 하물며 인종의 다툼에 있어서랴.
(32) 일본은 전승국이고 「러시아」는 패전국인데 일본이 어찌 제 본뜻대로 정하지 못했는가. 동양에는 족히 합당할만한 곳이 없어서 그랬단 말인가.
(33) 소촌(小村壽太郞) 외상(外相)이 구차스레 수만리 밖 「워싱턴」까지 가서 강화조약을 체결할 때에 화태도(樺太島) 반부(半部)를 벌칙조항(罰則條項)에 넣은 일은 혹 그럴 수도 있어 이상하지 않겠지만 한국을 그 가운데 첨가해 넣어 우월권을 갖겠다고 이름하는 것도 근거가 없는 일이겠고, 합당함을 잃은 처사라 하겠다.
(34) 지난날 마관(馬關) 조약 때는 본시 한국은 청국의 속방(屬邦)이므로 그 조약 중에 간섭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지만, 한ㆍ러 양국 간에는 처음부터 관계가 없는 터인데 무슨 이유로 그 조약 가운데 들어가야 한단 말인가.
(35) 일본이 한국에 대해서 이미 큰 욕심을 가지고 있다면 어찌 자기 수단으로 자유로이 행동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구라파(歐羅巴) 백인종과의 조약 중에 첨입해서 영세(永世)의 문제로 만들었단 말인가. 도시 방책이 없는 처사라 하겠다.
(36) 또한 미국대통령이 이왕 중재하는 주인으로 되었는지라 곧 한국이 구미 사이에 끼어있는 것처럼 되었으니 중재주(仲裁主)가 필시 크게 놀라서 조금은 괴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같은 인종을 사랑하는 의리로서는 만에 하나라도 승복할 수 없는 이치이겠다.
(37) 그래서 (미국대통령이) 노련하고 교활한 수단으로 소촌(小村) 외상(外相)을 농락하여 약간의 해도(海島) 조각 땅이나 파선(破船) 혹은 철도 등 잔물(殘物)을 배상으로 나열하고서 거액의 벌금은 전폐(全廢)시켜 버렸다 한다.
(38) 만일 이 때 일본이 패하고 「러시아」가 승리해서 담판하는 자리를 워싱턴에서 개최했다면 일본에 대한 배상요구가 어찌 이처럼 약소했겠는가. 그러하니 세상일의 공평되고 공평되지 않음을 이를 미루어 가히 알 수 있을 뿐이고 다른 이유는 없다.
(39) 지난날 「러시아」가 동으로 침략하고 서쪽으로 정벌을 감행해 행위가 심히 가중하므로 구미열강이 각자 엄정중립을 지켜 서로 구조(救助)하지 않았지만 이미 이처럼 황인종에게 패전을 당한 뒤이고 사태가 결판이 난 마당에서야 어찌 같은 인종으로서의 우의가 없었겠는가. 이것은 인정세계의 자연스런 형세다.
(40) 슬프다. 그러므로 자연의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같은 인종 이웃나라를 해치는 자는 마침내 독부(獨夫)의 판단을 기필코 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3) {문답}을 통해 본 동양평화론 시적인 지향세계 : 문답 문단에 10개에 의함
위 문답을 포함하는 제안 작품으로 불러 앉혀 명예로운 자리로 앉혔다. 아래 율시 한 편의 첫째 [기구]는 승구를 끓어 당겼고, 둘째 [승구]는 전구를 끓어내서 화합했으며, 셋째 [전구]는 넷째 [결구]와 어울림 한 마당을 【문답】이란 대문이 보다 잘 채워질 수 있도록 얹어 두었다. [문답]이 마무리를 잘 불러드린 조력제란 역할만은 손쉽겠다.

{問答[Ⅰ]}을 위한 긴박한 [토론(討論)]의 자리에 앉아서

東平問答定論時    (동평문답정론시)
獨立終身啓導宜    (독립종신계도의)
先露講話頒露土    (선로강화반영토)
後倭條約鞏倭基    (후왜조약공왜기)
日軍得勢眞辛感    (일군득세진신감)
俄國亡權極努知    (아국망권극노지)
必至韓人甚束縛    (필지한인심속박)
光明世上復歸期    (광명세상복귀기)
=敍光,『東洋平和論【問答(Ⅰ)】』의 決心과 感想

동양평화를 위한 問答의 논리를 정하려 할 때에
종신토록 대한독립을 쟁취하기 위함이 마땅했네
러시아가 강화를 청해서 노국 땅을 할애 받았고
일본이 뒤에 조약 맺어 일본 기틀을 공고했었네
일본군이 득세함에 진정으로 괴로움을 느꼈으며
아라사 권리 잃음에 지극히 힘들다는 것 알았네
반드시 한인들의 속박이 더 심해짐에 이르겠으니
광명한 세상으로 다시금 돌아갈 것을 기약하겠네.

시인이 붙잡고 앉은 자리는 문답을 위한 토론의 자리다. 아무리 상대에게 겨누는 총부리가 급하다 하더라도 완급은 있었다. 침략자도 할 말은 있고, 침략을 당한 자도 할 말을 있다. 문답이란 대화를 하면서도 전쟁을 했다. 동양평화를 위한 문답의 논리를 정하려 할 때에는 종신토록 대한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 극히 마땅했었다는 논리를 폈다. 러ㆍ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러시아는 강화를 청해서 노국 땅을 할애 받았고, 일본은 뒤를 이어서 조약을 맺어 일본 기틀을 공고히 했다. 이것이 상대 의중을 알고 밀고 당기는 전쟁의 원리다. 그래서 안중근은 이 문답의 과정을 중시했음도 알겠다. 문답이 평화를 위한 대화이어야지, 전쟁을 위한 문답식 대화가 되어서는 안 된다.
화자는 러ㆍ일 전쟁이 발발했을 때 득(得)과 실(失)의 과정이 꼭 따랐다. 일본군은 득세했고, 러시아 군은 그들만의 권리를 야금야금 잃어갔다. 전쟁이 인류에게 주는 준엄한 교훈이다. 그래서 일본군이 득세함에 따라 진정으로 빼앗긴 괴로움을 느꼈고, 러시아군은 권리를 하나 둘 씩 잃음에 따라 지극히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그 과정에서 문답을 알게 되었다는 진리를 터득하는 오히려 준엄한 심판의 험한 과정에 놓인다. 그 사이에 고래 등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식을 한인들은 쓴 맛을 보았음을 화자는 지적해 보인다. 거기에는 반드시 한인들의 속박이 냉정하게 심해졌음에 이를 것이나, 언제인가는 한인들이 광명한 세상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기약하겠다는 향수(鄕愁)의 그리움을 필연코 맡게 된다는 점이리라. 대화 속에 펼쳐지는 전쟁의 소용돌이가 무섭다.

{토론(討論)[Ⅱ]}을 위한 절박한 [문답(問答)]의 자리에 앉아서

東平討論可論時   (동평토론가론시)
黃族相殘四海聞   (황족상잔사해문)
白館露分昇日業   (백관로분승일업)
馬關韓獨斥中勳   (마관한독척중훈)
俄淸上日風潮合   (아청상일풍조합)
歐美間韓政勢紛   (구미간한정세분)
蓋世吾邦孤立處   (개세오방고립처)
太和家國有何云   (태화가국유하운)
=敍光,『東洋平和論【問答(Ⅱ)】』의 決心과 感想

안중근의 동양평화를 위한 논조가 많이도 옳았으니
황색인종끼리 서로 다툼 소리 사해에 저렇게 들렸네
워싱턴 회담 때는 화태 분할에 승일하는 업적이었고
마관조약 때 한국독립 중국배척은 가짜란 공훈이었네
소련과 청국 위에 일본 풍조는 대단히 합당했었으니
유럽과 미국 사이에 낀 한국 정세는 참 어지러웠네
온 세상에 우리나라가 하늘아래 고립되는 처신되니
크게 화평하는 집안과 나라 신세를 무어라 말할거나.

시인이 주장하는 동양평화를 위한 논조야말로 옳았다고 치켜세우면서도 강인한 모습이 오히려 에타는 소리로 들린다. 또 다른 한 편으로는 황색인종끼리 서로의 다툼의 소리가 멀리 대양을 뛰어 넘어 사해에 우렁차게 들렸다는 의기에 차는 과정까지도 과시하는 목소리가 되어 들린다.
평자는 이 [문답(問答)]을 양손에 들고 침략자와 침략을 당한 자의 의중을 듣고 화해의 자리로 본다. 여기에 세계정세가 좀 더 미흡했던 것은 미국을 끌어들여서 열리게 되는 워싱턴 회담은 결국 화태를 분할하여 승일(昇日)하는 역현상 업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엔 마관조약  마관 조약(馬關條約: 시모노세키조약) 1895년 4월, 청일 전쟁 뒤에 강화전권대사인 이홍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의 시모노세키에서 체결한 조약이다.
이 조약의 체결은 일본에서는 승리의 열매를 안겨주는 것이었지만, 청국에게는 굴욕의 것이었다. 강화 조약이 청국 조야에 알려지자 각지에서 비준거부 운동이 격렬히 일어났다.
 때에는 한국독립과 중국배척으로 인하여 가짜 공훈을 내세우게 되었다는 목소리가 원망의 소리로 들렸다. 잘되게 하려는 문답의 대화들이 되래 엉뚱한 방향으로 포인트가 꼬이면서 잘못되었다.
이렇게 노력하는가 하면 잘못하여 또 다른 복병(伏兵)도 만나기도 한다. 화자가 생각하는 우리 한국에 도리어 불리했으니 소련과 청국 위에 일본 풍조는 아주 합당하게 돌아가면서 유럽과 미국 사이에 어정쩡하게 낀 한국 정세는 더욱 모양새가 어지럽게 되었다는 핀잔 한 줌을 만들어 내고 만다. 이러한 화자의 노골적이면서도 직설적인 현상은 지정학적으로 청ㆍ러 라는 대국에 끼어들어 온 세상에서 유독 우리 한국만이 영원히 고립되는 안타까워하는 돌이킬 수 없는 처신되었다고 한탄의 목소리로 들리기도 하였다. 문답의 대화는 어느 다른 쪽이 손해를 보는 경우도 많다. 이는 한 쪽만이 배가 부르고 오히려 크게 화평한 집안과 그렇지 않는 집안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어정쩡한 물음과 그런 신세 되어 에 터지게 속 타는 처절한 한탄의 목소리로 들렸다.

6. 결구(結句)
1) [결구(結句)]의 속뜻과 동양평화론에 얽힌 배경과 결과

안중근 동양평화론은 [서언]에 16문단, [전감]에 40문단으로 [현상ㆍ복선ㆍ문답]을 채웠다. 논설에 [서언]이 있으면, 결론 자리에 [결구]는 필수사항임을 알기에 보완했다.

이토가 일본 추밀원 의장으로서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쵸프와 회담하기 위해 1909년 만주 하얼빈 역에서 하차 예정이라는 첩보를 접했다. 이 첩보를 접한 안중근은 이미 그의 동지들과 단지동맹(왼손 무명지)을 결성했고, 유동하, 조도선, 우덕순과 함께 이토를 처단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우기에 이른다. 우덕순 이하 3인은 함께 러시아 체가구역에서, 안중근은 북만주 하얼빈역에서 거사를 치르기로 했으나 체가구역에서 열차가 정차하지 않고 곧장 하얼빈역으로 직행하는 관계로 실패했다. 다음날 아침인 1909-10-26 오전 9시 30분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이토와 일본 전범들이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 총을 쏘았다. 이토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안중근은 “꼬레아 우라!(대한제국 만세)”를 외치며 당당하게 체포되었다.

안중근으로서는 일본인 재판장 [히라이시]의 말만 믿고 있다가 동양평화론은 <미완의 글>로 남겨놓고 만 셈이다. 그렇지만 이 글이 담고 있는 동양평화, 나아가서는 세계평화의 깊은 의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사건으로 그 마무리는 “우리 후진들이 완성해야 할 몫이 아니겠는가”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 평설이나마 접근하게 되었다. 이것만이 우리를 대신하여 먼저 떠난 {도마 안중근(安重根) 의사(義士)}의 속 깊은 뜻에 [만 분의 일]이라도 의사 서거 110년 만에 평자 서광(瑞光)이 조금 먼저 나서서 부르짖는 간절한 의도다. 이것이나마 후진된 도리라는 속 깊은 생각은 아닐까 본다.      /다음호에 계속
 

▲하얼빈 안중근의사 기념관 ▲하얼빈 안중근의사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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