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광주서중학교 정원/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거의 한 평생을 몸담고 활동했던 삶의 온실 직장에서 정년퇴임은 이미 약속된 냉정한 이별이려니 자각하면서도 표정에서 쓸쓸한 그늘을 지울 수는 없는 은퇴자들!

익숙치 못한 환경변화에 평소 그토록 들쑤시던 취미들도 조금씩 변해 가고 있음을 의식하게 된다. 메스컴의 쇼킹한 뉴스나 통쾌한 승부의 전시장 스포츠게임, 혈맹의 동지들과의 건배 등 열기 넘치는 욕망의 대상들마저 관심 밖으로 시들어 간다.
노년의 패러다임은 대부분 요가나 명상, 화첩, 고서 역사노트, 전원일기 드라마 같은 클래식한 심연으로 빠져드는 게 정서랄까?
하여 필자는 고향의 한적한 옛길을 홀로 거닐면서 내가 옛날 이 길을 거닐면서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곰곰이 사색해보는 여유 또한 간소한 힐링의 효과임을 몸소 체험하고 나서부터 칸트의 정례 산책코스처럼 즐기게 되었다.

또 한편 모처럼 분위기를 바꿔 서고에 묵혀있는 곰팡내 나는 사진첩을 꺼내 보았다. 1962년 필자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찍은 흑백사진 속에서 눈빛 초롱초롱한 한 소년이 수십 년 후 찾아온 주인을 반긴다. 바로 거기에 작은 내가 웅크리고 있었다.
졸업을 얼마 앞두고 수학여행 중 광주서중 교정에 소재한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을 배경으로 꼬마들이 제법 애국심의 경건한 자세로 정렬했다. 그런데 사진의 구도가 마치 훌륭한 기록 작품처럼 완벽하여 확대 복사해서 보관하고 있다. 수시 꺼내보면 순간마다 사르르 멍이 풀리는 듯 평온하다.

올빼미 눈으로 들여다보니 사진 맨 앞줄 좌측으로부터 세 번째가 백종회, 그 곁에 백광준, 중앙 선생님 곁에 야무지게 입을 다문 필자의 모습도 보인다.
이들 스몰 사이즈 트리오 라인은 제각기 개성 있는 위트와 유머의 끼가 넘치는 재치꾼들로 주목 받으며 귀여움을 몰고 다녔다.
체구가 작은 우리들 셋은 자주 붙어 다니며 서로 경쟁도 하면서 보호했다. 장흥중학교에 함께 진학하였고 공교롭게도 같은 반에 편성되어 키순으로 나란히 3, 4, 5번을 받았는데 각자 색깔 있는 이력들이 볼 만하다.

3번 종회는 전형적인 학구파로 우등생이었으며 소풍날 전교생 레크레이션 장기자랑에서 미국의 제 35대 케네디 대통령 취임사 전문을 원고 없이 원어로 유창하게 낭독하여 기염을 토했다. 될 성 싶은 떡잎은 예상했던 대로 당시 명문인 광주고의 문을 뚫고 연세대를 졸업 국내 유수의 대기업 중견 간부와 학자로 제 위치를 굳혔다.

5번 광준 또한 뒤질세라 초등학교 총학생회장 전력을 발판으로 정치성 있는 포용력과 달변은 어릴 적부터 보스의 기질을 내 비쳤다. 성장해가면서 그의 인품은 호방함과 외유내강의 침착성, 정밀한 경제 식견, 그리고 기교있는 화법이 훨씬 무르익어 정련 되고 원숙해진다.
특히 많은 해외연수 보조 수업에서 체화된 기량은 진화하여 퇴계의 갓과 링컨의 조끼를 제몸에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코디 할 줄도 안다.
어쩌면, 그의 천부적인 마인드를 제련하는데 협소한 시골보다는 넓은 무대에 둥지를 틀 요량으로 일찍 중2때 상경(전학)을 결심한 뼈대있는 가문의 안목과 선택은 적중했다. 이제 마치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그는 중앙 정가의 늪지대를 은밀히 배회하며 인맥을 튼튼히 구축하고 수련을 쌓더니만, 어느 날 돌연 귀향하여 일거에 지방의원 뺏지를 훔쳐 내고는 아예 군의회의장직까지 접수하여 파란을 일으킨다.
돌아온 장고, 고삐 풀린 기민한 그의 아이디어는 분수처럼 치솟아 급기야 특허품 ‘정남진’ 이란 브랜드(상표)를 최초 출원 취득하여 장흥 홍보의 대박 아이콘에다 국내뉴스의 러브콜로 한 동안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뿐이던가 새내기 의원의 핸디캡을 무색케 의정활동에 있어 괴물 의원으로서 타협과 조율의 중심추 역할로 정평이 났으며 그런 저력으로 전남 서남부 지방의회 의장단 회장직함까지 거머쥐는 출중한 지모를 연출하게 된다.
임기를 마치고 나서는 고향인재육성과 문화예술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자임하며 사회 봉사활동에도 여력을 쏟고 있다.
어느 덧 칠순의 고령에 들어선 그의 위상은 아직도 동력을 잃지 않고 지방 언론사 사장직을 수행하며 촘촘한 일상 속에서 건재함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 학구파와 정략가의 중간에 어정쩡 끼어있던 4번 필자야 말로 하란 공부는 뒷전에 두고 소설 음악 미술 스포츠 등 예능 방면에 심취하여 학업 성적표는 비록 보잘 것 없었지만, 그나마 예능과목의 감수성과 인문학 암기력, 친구 사귀는 데는 단연 귀재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 급우들 앞에 내 일기장을 소개하며 즉석에서 문예반장에 발탁시켰던 인연이 박토에서 장래 문인의 씨앗을 발아시킨 것이다.
또 하나 자랑은 중3때 장문의 교과서 암기 숙제를 유일하게 한 문장도 빼놓지 않고 끝까지 외워 재학 중 국어 선생님의 각별한 총애와 함께 학생들 간 입소문의 주인공으로 거드름을 피운 촌극도 떠오른다.

이렇게 말과 책과 글로 엮어진 기질있는 동량 세 어린이는 성장하여 일선에서 용케도 자신들의 캐릭터에 걸 맞는 삶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J는 기업가와 학자로 G는 정치가와 언론인으로 필자는 목민관과 문인으로서 모두가 결승점까지 무난히 통과한 의지의 마라토너인 셈이다.
중학시절 필자와 자취생활을 했던 광준과는 지금까지 고향을 지키며 교우하고 있어 서로 위안이 된다.
헌데 종회란 친구는 20여년 까마득히 소식 한 번 주지 않고 있으니 소싯적 흉금없이 쌓았던 우정이 왠지 허허롭기만 하다.
우리에게는 저들의 옹골찬 삶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을 그리운 벗들이 어디엔가 존재하기에 외롭거나 고달플 때면 사진 앞에서 그들과 뛰놀던 소박한 동심의 세계를 추억하며 스스로 위안 받는다.
아쉽게도 사진 속 그 얼굴들의 행방을 죄다 알 순 없다지만, 지금쯤 초로의 경로석에서 몸을 낮추고 의미있는 미소만을 머금고 있을 수많은 벗들의 향긋한 가슴팍으로 뛰어 들고픈 충동과 인정만큼은 항용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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