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東微區 有大禪師 師之諱敬軒 法號順命 所居堂曰霽月 以如如虛閑自稱焉 師俗姓曺氏 湖南人也 父曰芮昌 母曰李氏 李夢有一梵僧來謁 願爲阿?之子 覺而有娠 甲辰正月十四日生焉 嘉靖二十三年也 師之爲人 骨相奇秀 性禀超羣 率群童其遊戱 以佛事爲戱 隣里皆稱 奇哉 異於常童焉 年纔十歲 兩親俱沒 唯有祖父存焉 師將有出家之志 祖誡曰 汝父先去 吾無所賴 汝何有我我之情 堅固不許 師不從其誡 年至十五潜入天冠 從玉珠禪師爲僧 受具於天冠寺焉 心中唯有學道之志 初訪名儒 勤學詩書 通古今事物之理而後 喟然嘆曰 此是世間之道耳 非出世之慈航也 於是遠挹風猷 決判出家之事 以圓哲大師爲噵 初入智異山 叅玄雲中德涉盡群經 游三藏之敎海 次叅熈悅兩敎師 以廣見聞 勿滯於一隅矣 年至三十 直入妙香山 叅淸虛大師 其時萬曆四年丙子歲也 淸虛以金搥 擊西來之密旨 師之滯敎情解 一時頓忘 從此留心祖域 所發言句 當合祖風矣 戊寅之春 入金剛山內院洞 杜口有年矣 是故開示學者之際 先以都序節要 決擇佛法之知見 以固其基本 次以禪要書狀 擊碎佛法知解之病 洒落其胸中 然後法語六段 以爲叅 句之要節也 居常室中 噵人之制 若此者也 師之節操似霜松 虛襟如水月 布衣蔬食作一生之生涯 精窮三學 爲出世之活計 故一衣一鉢之外 永不以務世也 冨溢七珍 弃之 猶同於草芥 貴尊一品示之何啻 於烟雲 極厭無常 深窮有本 故 萬曆二十年壬辰之倭變 宣廟以左營將之任 親授職帖 師堅讓不顧 逃遁於陋巷之間 淸虛以書招之 師不得已 詣於陣中 淸虛以師爲維那 領衲僧若干軰 虔設淨筵 以觀音祈禱累日潜借聖力 悉消其賊氣 淸虛嘉之入啓上亦嘉之 以禪敎兩判之任賜之 堅讓以却之曰 萬里長江水 惡名洗不去 即時還輸其帖 晦跡韜光於妙香之洞 累年矣 聲名腥薌 文綵發露 四方學徒 集之如雲 俄成法席 從此或之楓嶽 或之五臺 或之鴙嶽 或之寶盖 遊戱諸山 居無?處 放任其志 然而諸山中 최好金剛 前後居止三十餘年 萬曆四十六年戊午之春 更探隱仙洞結庵數間 結于七夏 以霽月額之 天啓三年癸亥之春 師將欲出山之計 弟子等止之 師以詩一絶荅之曰 好在金剛山 長靑不起雲 單瓢冝早去 風雪夜應紛 瓶錫移于五臺 其後事驗 果如其言矣 師之領衆 四十餘年說法 如雲如雨 言句滿天下 以大略言之 長踞敎海 波瀾浩浩 恒振禪風 祖意深深 於是禪敎學徒 虛而來 實而徃者 不可勝數也 法海已滿 度緣旣周 師於是命門人等 吾之朽質 置於有緣之山 崇禎五年壬申之夏 自雉嶽 乘輿于靈珠之靈隱 結二夏 示有微疾 遂有歸寂之勢 門人等 請臨終偈 師叱之杜默 再三請之 良久而偶吟一絕以示門人時癸酉之孟冬也 未幾臈月二十六日亥時 寂然長徃焉 于時祥光洞天 杉栝變白 及至五日 門人等 奉色身于深源之西嶺 闍維之際靈骨作聲 數三出于西邊 ?白數千有見聞者 過半矣 於是門人等 精懃二七日中 淸光數五道貫月輪 大風拔樹 瑞氣盤空 日色無光 白日雨注然後 收舍利三箇 一箇門人雪冏 樹塔于深源寺之東隅?光如來石鐘之側 一箇門人雪玄 建浮圖於金剛山表訓寺之南麓淸虛大師塔廟之側 一箇門人應和 樹浮圖於支提山天冠寺之西麓 大海山 亦有門人曇元行俊等 亦虔禱 收舍利二箇 一箇建石鍾於妙喜庵之東麓 一箇門人明義 建塔于聖興山香林寺之北麓 吁 吾師末後之光 靈應非一 神驗頗多 千萬里之外 有聞之者 無不驚愕 靡然向慕而嘆曰 眞佛出世 稱   者無數 可謂光前世之奇跡 絶萬世之靈   乎 大師壽九十一 法臘七十六也 嗚呼哀哉 師寂滅兮空谷 唯留霽月之名而已

崇禎八年乙亥三月 日 松巖道人洪澤謹撰

출전《霽月堂大師集》卷之下

●제월당 대사 행적
-송암 홍택

해동 은밀한 구역에 대사가 계셨으니 대사의 휘는 경헌(敬軒)이고 법호는 순명(順命)이며 기거하는 절집의 당호는 제월당(霽月堂)이라고 했고 스스로 여여자(如如子) 또는 허한 거사(虛閑居士)라고 불렀다. 대사의 속성은 조씨(曺氏)로 호남사람이며 아버지는 예창(芮昌)이고 어머니는 이씨(李氏)인데 이씨 꿈에 어떤 범승(梵僧)이 찾아와 뵈면서 “어미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고 하니 깨어나자 임신이 되어서 갑진년(중종39년1544) 정월 열 나흗날 태어났으니 가정23년이다. 대사의 사람됨은 체격과 용모가 유달리 수려하고 성품이 무리에서 뛰어났으며 떼를 지어 아이들을 거느리고 장난하며 즐겁게 놀 때는 불사(佛事) 놀이를 일삼았으니 이웃마을에서는 모두가 기특하다 보통아이들과는 다르다고 칭송했다. 
나이 겨우 열 살 때 양친이 모두 돌아가시고 오직 할아버지만 살아계셨는데 대사가 출가하려는 뜻을 품자 할아버지가 훈계하며 말씀하시기를 “네 부모가 먼저 세상을 떠나서 나는 의지할 곳이 없는데 네가 어떻게 할아버지의 정을 내버린단 말이냐.”하고는 견고하게 허락하지 않자 대사는 할아버지의 훈계를 따르지 않고 나이가 열다섯 살에 이르자 몰래 천관산으로 들어가 옥주선사(玉珠禪師)를 따라서 중이 되고 천관사(天冠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마음속에는 오직 도를 배우려는 의지만이 있을 뿐이어서 처음에는 이름난 유학자를 찾아가 부지런히 시서(詩書)를 배우고 고금사물의 이치에 통달한 이후에는 크게 한숨 쉬며 탄식하기를 “이것은 세간의 도 일 뿐이다. 출세간의 중생제도가 아니로다.”고 말했다.
이때에 원근에서 풍도(風度)와 법도(法道)를 지닌 스승을 찾아보다 출가승(出家僧)의 일대사(一大事)를 결판내고자 원철대사를 안내자로 삼아 처음에는 지리산에 들어가서 현운과 중덕을 찾아뵙고 여러 경전을 다 섭렵하고 나서 삼장(三藏, 경經ㆍ율律ㆍ논論)의 가르침 바다에서 노닐다 다음에는 희(熙)와 열(悅) 양 교사(敎師)를 찾아뵙고 견문을 넓히자 한 모퉁이에도 막힘이 없었다.
나이 서른에 이르자 바로 묘향산으로 들어가 청허대사를 찾아뵈었는데 그 때가 만력4년(선조9년1576) 병자년이었다.
청허대사가 쇠몽둥이로 달마가 서쪽에서 온 밀지를 깨부수자 대사는 감정과 이해의 가르침(해득하는 일)에 응체(凝滯)되어 있었는데 일시에 모든 기억을 놓아버리고는 지금 여기에 그냥 이대로(here and now)에서 곧바로 확연하게 깨쳤다.
이때부터 마음은 선의 세계(祖域,조사들의 영역)에 머물렀으며 언구(言句)가 발하는 것은 조사(祖師)의 가풍(家風)에 합당했다.
무인년(선조11년1578) 봄 금강산 내원동에 들어가 묵언수행을 결행한지 여러 해를 맞았다.
이런 까닭으로 도를 배우려는 자들에게 열어 보여 줄 무렵 먼저 ‘도서(都序)’와 ‘절요(節要)’로써 불법의 지식과 견문을 판단하여 결정하 ‘선요(禪要)’와 ‘서장(書狀)’으로 불법의 알음알이(知解) 병통(病痛)을 격파해서 그 가슴속이 시원스럽게 트인 연후에 법어 여섯 단락을 참구(參究)의 중요한 대목으로 삼게 했다.
평상시 방안에 있을 때나 사람을 제도할 때도 이와 같이 하셨고 대사의 절개와 지조는 서리속의 소나무와 같았고 물에 비친 달그림자와 같이 허령한 마음을 지니고 있고 일생의 생애를 베로 지은 옷에 변변하지 못한 음식으로 살았고 삼학(三學, 불교 수행의 기본 덕목인 戒學?定學?慧學)을 정밀하게 궁구해 출세간을 살아갈 방도로 삼았다.
이 때문에 옷 한 벌에 바리때 하나 외에는 영원히 세상일에 힘쓰지 않았다. 부자가 넘쳐나는 칠보(七寶) 물리치는 일을 외려 지푸라기와 같이 하듯이 존귀한 일품의 벼슬아치 보기를 “어찌 안개구름뿐이랴.”라고 했고 인생무상을 극도로 싫어해야 학문에 근본이 있는 자는 깊게 궁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만력20년(선조25년1592) 임진 왜변 때 선조는 좌 영장(左營將)을 맡기며 몸소 직첩을 수여하자 대사는 굳게 사양하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누추한 시골로 도망가 숨었다.
청허당 대사가 편지로 불러내자 대사는 부득이해서 진영(陣營)에 나아갔다. 청허당은 대사를 유나(維那, 절의 사무를 맡아 지휘하는 소임)로 삼고 납승(衲僧) 약간의 무리를 거느리게 하자 경건하게 정연(淨筵)을 설치하고 성력(聖力)을 몰래 빌려 여러 날 관음기도(觀音祈禱)를 올리자 그 거침이 없던 왜적의 기세가 모두 사라졌다.
청허당이 가상하게 여겨 임금에게 글을 올리자 주상도 가상하게 여겨 선교양판(禪敎兩判)의 임무를 하사하자 완강하게 사양하며 물리치고 말하기를 “일 만 리 장강의 물은 오명을 씻으며 흘러가지 않습니다.”고 하며 즉시 그 직첩(職牒)을 돌려보내고 묘향산 동천에 여러 해 자취를 감추고 빛을 숨겼다.
좋은 평판이 멀리까지 퍼져 문채로 드러나니 사방 학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어느새 법석을 베풀자 이때부터 혹은 풍악산으로 혹은 오대산으로 혹은 치악산으로 혹은 보개산 등 여러 산에서 놀이를 즐겼고 거처는 정한 곳 없이 자기 뜻대로 했다.
그러나 여러 산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금강산은 전후 거처기간(居止)이 삼십 여년이나 되었다.
만력46년(광해10년1618) 무오년 봄에 다시 은선동을 찾아 암자 수 칸을 짓고 하안거(夏安居) 결제(結制)를 일곱 번이나 끝내고 “제월당(霽月堂)”이라는 당호 편액을 내걸었다.
천계3년(인조원년1623) 계해년 봄에 대사가 산을 나가려는 계획을 갖고 있어 제자 등이 말리자 대사가 시 한 절구로 답하기를,
 好在金剛山 금강산에 있으면 좋지만
長靑不起雲 오래도록 푸르기만 하고 구름도 일지 않구나.
單瓢冝早去 단표의 즐거움도 일찍 떠나야 마땅하니
風雪夜應紛 밤이면 눈보라도 응당 어지럽게 흩날리리라.       

注)
單瓢 - 단표누항(單瓢陋巷).'누추한 거리에서 먹는 한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이라는 뜻으로 소박한 시골 생활을 비유한 말.
風雪 - 눈보라. 세상살이의 온갖 고난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병발(甁鉢)과 석장(錫杖)을 오대산으로 옮기자 그 후에 일이 징험이 있었는지 과연 그 말과 같았다.
대사는 중생들을 거느리고 사십 여년 설법했는데 언구(言句)는 비구름처럼 천하에 가득하지만 대략 말하면 다음과 같다.
‶가르침의 바다에 오랫동안 걸터앉아 가없는 파란을 일으키며 두루두루 선풍을 떨쳤으나 조사의 뜻은 깊고 깊었다.″로 요약할 수 있다.
이때에 선교(禪敎)의 학도들은 비우고 왔다가 채워서 돌아가는 자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불법(佛法, 부처의 가르침)이 이미 가득차면 도연삼매(度緣三昧또는 도경계삼매度境界三昧라 한다. 이 삼매에 머물게 되면 육진六塵 안에 모든 번뇌의 연緣이 다 멸진되고 능히 대해大海를 건너게 된다)가 이윽고 지극해 진다.
대사는 이때에 문인 등에게 명하여 나의 썩은 나무(朽質, 쓸모없는 사람)를 인연 있는 산에 버리라고 하면서 숭정5년(인조10년1632) 임신년 여름에 치악산에서 수레를 타고 영주산(靈珠山, 현재 강원도 철원군 보개산寶蓋山) 영은사(靈隱寺, 지금은 폐찰)로 가서 하안거 결제를 두 번 마치고는 조금 편찮은 기색을 보이시더니 마침내 귀적(歸寂)하시려는 기세가 있으셨다.
문인 등이 임종게(臨終偈)를 청하자 대사는 꾸짖으며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으시다가 두세 번 청하자 한참 뒤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시가(詩歌) 한 수(一首)로 읊어 문인들에게 보여주셨으니 때는 계유년(인조11년1633) 겨울이 시작되는 처음시기인 10월로 섣달이 머지않은 26일 해시에 고요히 오랜 길을 떠나갔다.
그때에 상서로운 빛이 동천을 비추더니 삼나무와 향나무가 하얗게 변하고 닷새 째 이르자 문인 등이 심원사(深源寺)의 서쪽 고개에서 육신을 모시고 다비할 때에 영골(靈骨)에서 소리가 나더니 두서너 파편이 서쪽 가로 튕겨나가는 것을 재가자와 출가자 수천의 절반이 넘는 대중이 보고 듣고 있었다.
이때에 문인 등이 열나흘 동안 부지런히 정진하던 중에 맑은 빛 다섯 줄기가 둥근 달을 관통하고 큰 바람이 나무를 뽑아버리고 상서로운 기운이 하늘에 서리고 해도 빛나지 않더니만 대낮인데도 소낙비가 쏟아진 뒤에 사리 세 개를 수습해 한 개는 문인 설경(雪冏)이 보개산(寶蓋山) 심원사(深源寺) 동쪽 모퉁이 정광여래 석종 곁에 탑을 세워 안치했고 한 개는 문인 설현(雪玄)이 금강산 표훈사(表訓寺) 남쪽 기슭 청허대사 탑묘 곁에 부도탑을 건립했고  한 개는 문인 응화(應和)가 지제산(支提山,天冠山) 천관사(天冠寺) 서쪽 기슭에 부도탑을 세웠다.
대해산(大海山)에도 문인이 있어 담원(曇元) ‧ 행준(行俊) 등도 경건하게 기도하고 사리 두 개를 수습해 한 개는 묘희암(妙喜庵) 동쪽 기슭에 석종을 건립했고 한 개는 문인 명의(明義)가 성흥산(聖興山) 향림사(香林寺) 북쪽 기슭에 탑을 세웠다.
우와, 우리 대사의 빛나는 최후의 시기에 사리는 하나가 아니요 신비한 영험은 파다해서 천만리 밖에서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경악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휩쓸려서 너도나도 흠모하니 탄식하며 말하기를 ‶참 부처가 세상에 나왔다.″고 칭찬하는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았으니 앞 세상을 비춘 기적이라고 말할 만하고 만세를 뛰어넘는 신령한 발자취를 남기셨다.
대사의 세수는 91세이고 법랍은 76년이니 오호라 슬프구나, 대사가 적멸하면 인적 없는 쓸쓸한 산골짜기는 오직 제월당의 이름만 머물 뿐이겠구나.

숭정8년 을해(인조13년1635) 3월 일 송암 도인 홍택은 삼가 짓다.

역자 注)
이런 뛰어난 도인이 장흥고을에서 태어났는데도 속가의 인연을 알 수 없어 이 지역 창녕 조씨 문중에 연락해 족보 신구보新舊譜를 다 뒤졌으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안타까울 뿐이다.

▲관산읍 천관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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