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본 원문에 스며들어 시적인 상상력으로 휘감긴
안중근! 동양평화 [각론]을 가슴으로 뿌리며

장흥군 장동면 만년리 해동사에는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를 모시는 국내 유일의 사당이 있다. 서거 112주년을 기념하여 장흥신문사에서는 한시의 대가이시며 문학박사인 우리고장 출신 장희구 박사의 자문을 받아 심혈을 기우린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을 중심으로 안중근 의사를 재조명키 위하여 목차의 순서를 거쳐 연재키로 한다.

【머릿말】
인류의 고요한 평화를 위한 동양평화론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숱한 침략과 수탈을 받았다. 임진왜란과 같은 〈중세사〉는 차제하더라도 1900년대를 전후한 〈근대사〉를 보면 침략한 경우가 심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란 소용돌이를 낳았고, 한국은 [침략의 다리]를 버젓하게 놓아주었다. 일본의 야욕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유럽대륙이란 거대한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1904년에는 러일전쟁을 일으키는 고집을 부리며 한국이 그 징검다리 놓아주기를 요망했다.

일본은 이토가 하얼빈 역에서 저격당한 후 운신의 폭은 약해지면서 곤경에 놓이게 된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안중근 저격이란 힘을 받아 조선인이 들고 일어날 기미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감싸이면서 조급해진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가 저격당하고 난 직후에는 다소 느긋해지더니만, 1910년 2월 7일부터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되는 등 8일 만인 1910년 2월 14일에는 사형을 선고하는 등 망나니가 된다.
사형이 선고되는 3일 뒤인 2월 17일 재판장을 만난 도마 안중근은 [안응칠 역사]인 자서전과 [동양평화론] 집필을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 했더니, 흔쾌히 그렇게 하라는 허락을 받았기에 항소까지 포기했다.
그래서 [안응철 역사]는 집필은 겨우 끝냈지만, [동양평화론]은 계획했던 〈서문-전감-현상-복선-문답(토론)〉이라는 5개 각론 중에서 〈서문-전감〉 집필만 완료했던 며칠 후인 1910년 3월 26일에 사형을 집행했다. “하하, 이보다 더 극심한 형은 없소?”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재판부를 향해 비아냥거리듯 한 쓴 웃음을 쳤다. 내가 죽거든 뤼순 감옥 주변에 묻어두었다가 조국이 해방되거든 고국 땅에 묻어 달라고 호소했건만, 일본은 지금까지 깜깜 이로일관하고 있다.
〈동양평화론〉은 한ㆍ중ㆍ일 3국 관계를 『수평적 대등 국가관계』로 보며, 이웃 국가에 대한 침략과 영토 확장 비판과 평화적 공존을 주장했다. 【①한ㆍ중ㆍ일 3국이 중심 되는 뤼순을 중심지로 삼고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한다. ②3국 공동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화폐를 발행한다. ③3국 공동의 군대를 창설하고 타국의 언어를 가르친다. ④조선과 청국은 일본의 지도 아래 상공업 발전을 도모한다. ⑤3국의 황제가 로마 교황을 방문하여 협력을 맹세하고 왕관을 받아 세계인의 신용(信用)을 얻는다】는 요지였다.
안중근 〈동양평화론〉은 동양 3국이 평등하고 상호 협력하는 동맹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데 그 취지가 있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제안이었지만, 서로 배타적인 주권을 자기중심적인 경쟁과 전쟁으로 점철되었던 제국주의 시대였기 때문에 자기도취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이런 구상은 유엔이나 유럽공동체보다 70년을 앞서는 일이였고, 최근 군주제를 수립하면서도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려고 18세기에 했던 칸트의 ‘평화연맹’과도 비교되면서 그 실체가 재조명된다.

Ⅰ. 꿈에도 그렸던 [동양평화론] 문을 열며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토를 저격하여, 침략과 침범으로 위장된 동양평화의 올바르지 못한 덧씌움을 열어 보이려했다. 터무니없는 망령이 도지는 일이 두 번 다시없기를 바라는 의사(義士)의 올곧은 판단이었으리라. 이는 인간의 노력이라기보다는 하늘의 뜻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1910-02-14 안중근 사형이 확정되는 며칠 지난 어느 봄날, 일본 [언론]에 다음과 같은 시문(詩文)이 실려 나와 뜨거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1910년 2월 22일자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 7면에 [안중근 의사가 일본인 변호사 미즈노기치타로(水野吉太郞)의 수첩에 직접 적은 글]이 보도되었다.
1910년 3월 26일이 안중근 의사 순국일이고 보면, 지나간 역사이겠으나 역사의 순환을 들썩여서 그 나름 110년이 넘는 이 시점에 넓은 의미가 담겨있는 의의는 작다고 할 수는 없다. 曲突徙薪無見澤(곡돌사신무견택) 굴뚝을 구부리고 섶을 치운 이는 혜택이 없는데 焦頭爛額爲上客(초두난액위상객) 머리를 태우고 이마를 덴 이가 상객이 되었구려.
爲楚非爲趙(위초비위조) (이는) 초(楚)를 위함이지, 조(趙)를 위한 짓만은 아닐지니
爲日非爲韓(위일비위한) (꼭) 일본을 위한 일도 되겠고, 한국을 위함만은 아니리라. 라는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큰 화제가 되어 쑤석쑤석 언론의 비빔밥이 되곤 했다.
앞의 두 문구는 중국 역사책인 '한서(漢書)' [곽광전(藿光傳)]에 나오는 내용인 바 '曲突徙薪(곡돌사신)'이란 ‘굴뚝을 구부려 놓고 굴뚝 가까이에 쌓아 놓은 섶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는다'는 뜻이 담겼는데, ‘악의 화근을 미리 없애 재앙을 사전에 예방한다’는 의미를 담는 성어다. 뒤의 두 문구는 ‘위초비위조(爲楚非爲趙: 겉과 속이 다르다)’는 고사에 대한 안중근 본인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데, 이는 ‘위일비위한(爲日非爲韓)’을 직접 화살로 빗대었다. 당시 일본인 미즈노변호사가 안중근에게 들었던 고사의 민낯 해설이 신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부연설명]으로 얹었던 것으로 전한다.
【이것은 집에서 불이 났을 때 일이다. 화재의 근원인 굴뚝은 화도(火道)를 구부려서 만들고, 모닥불은 서서히 지펴야 하는데, 누군가가 큰 섶나무를 가져다 놓은 것을 빨리 알아채서 큰 화재를 미연에 방지한 선각자에게는 아무런 포상도 혜택도 없다. 오히려 마침내 큰 일이 난 다음에야 머리를 태우고 이마를 데며 허풍스럽게 불을 끈 구경꾼들이 상객(上客)이 되어 크게 대접받는다.
이는 바로 동양의 대화재는 아직 이토라는 불길이 하늘을 태우고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았다고 진단하면서 동양의 대화재는 아직 불길이 하늘을 태우고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데에까지 이르지 않았다. 〈나는 이토라는 섶을 치워 한국이라는 굴뚝에서 불이 나지 않도록 하였고 나아가서 동양이란 하나의 가옥을 태우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한 선각자가 아닌가?〉 하얼빈의 거사는 정치범이든, 복수의 적이든 달리 불릴 이유는 없고 동시에 나는 한국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일본을 위해서 한 일이다】고 안중근이 했던 말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이 부연 설명함에 따라 더욱 설득력이 있었다.
안중근의 평화 사상을 전하는 기록은 두 가지가 남아있다. 처음 하나는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자 법원장 면담을 요청한 사흘 뒤에 이루어진 면담에서 자신이 구상하는 동양평화 실현방안을 말하려 하는데, 통역이 면담 내용을 잘 기록하여 「청취서(聽取書)」라고 이름 붙인 서류가 남아 있다. 다른 하나는 1910년 3월 18일경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탈고한 뒤 바로 집필하기 시작한 「동양평화론」인데, 3월 26일 조기사형 집행으로 「동양평화론」은 미완의 유고로 남았다.
이 책은 안중근의 평화사상을 전하는 기록으로 남아있는 「동양평화론」과 「청취서」, 두 개의 원고를 묶어 <한글, 영어, 일어, 중국어> 등 4개 언어로 번역하여 수록되었는데, 미완의 유고 「동양평화론」이 사상적인 내용을 담았다면, 「청취서」에는 그 구체적인 실현방안 등이 곱게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는 것과도 유사하겠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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