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감사의 말씀 - 오늘 ‘예강칼럼’이 일단은 마지막입니다. ‘예강’은 ‘예양강(汭陽江)’의 줄임말입니다. ‘예강(汭江), 예수(汭水)’로 약칭되었고, 조선시대 내내 그 이름이었습니다, ‘석천 임억령’ 선생이 안타까이 남도비가사(南道悲歌士)로 호칭하던 선비, ‘옥봉 백광훈’이 늘 회한 속에 눈물을 보태던 고향 강입니다. ‘예강’을 자칭함은 오늘의 탐진강을 그 ‘예양강’으로 불러야 옳다는 것은 아니고, 장흥의 옛 글에 나온 ‘汭陽江’을, 그 시절 그 강 이름대로 기억하자는 것입니다. 그 ‘예양강’ 이름으로 조선시대 내내 보림사 계곡, 장흥 정자들을 지나서 강진만 구강포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동학 혁명 때도 탐진강이 아닌, ‘예양강’이었습니다.

그간의 기고 칼럼에서 생긴 오기(誤記)에 대해서는 송구하게 생각합니다. 신문사 컴퓨터의 한자(漢字) 지원이 부족하여 ‘빈칸, 또는 ?’로 처리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떤 인물의 생몰연대와 관력(官歷), 추증(追贈) 시기의 착오도 있었습니다. 장흥 무반들을 정리해보면서 ‘위덕화, 무과 갑과(甲科) 장원’으로 인용한 적이 있는데, “갑과 출신은 아니다”는 후손의 지적을 검토해보니, 일부 기록과 비석 등에 ‘갑과’로 기재됐을지언정, 실제는 ‘갑과’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그간 칼럼의 오류에 대해서는 나중에 간행될 책자로 재정리할 작정이오니, 계속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돌이켜 칼럼 연재를 A4, 1장으로 시작할 때는 힘들었지만 2장으로 늘어나면서 나름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장흥현지 확인이 미흡한 데서 늘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장흥에 내려가면 동네 한 두 곳 정도는 둘러보긴 하지만, 차창으로 바라보는 모습이라 한계가 있습니다. 장흥향토사에의 관심은 <장흥읍지 모음집, 영인본,1992>를 접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장흥출신 ‘이청준, 한승원, 송기숙, 이승우’에 대한 ‘전작(全作)주의자’를 표방하고, 그 초간본도 수집하면서 부지런히 읽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저는 ‘죽천 박광전’ 선생을 배출한 보성의 진원박씨가 본관이며, 임진난 이전에 인천이씨 사위로 용산 하금곡에 입거한 장흥파의 후손(유치파, 오복 사미동)입니다. 그 시절 입거 선조는 용산 어산 마을 앞에 500년 푸조나무를 남기셨습니다.

향교 장의였던 조부와 외조부의 만남으로 부모님 혼사가 이루어졌고, 외가는 안양 수원백씨, 처가는 유치 남평문씨입니다. 선친께서 마침 읍면을 옮겨 다니는 공무원이라서 어린 시절부터 여러 지역을 겪었기에 고향향토사에 더 친숙했을지 모릅니다. ‘용산 삼십포-거문도-울릉도 뱃길’ 사정은 어린 시절에 이미 보고 들었습니다. 최근에도 ‘울릉도 본가, 거문도 외가, 용산면 상금곡 출생자’와 통화를 나누었습니다. 천관산의 남북 모습이 크게 다르다는 것도 그 때 알았습니다. 선친의 임지 용산면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장흥읍에서 계속 성장하며 장흥초등학교와 장흥중학교를 마쳤습니다. 그간에 독자들께서 보내준 격려와 관심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2. 함께 가는 길 - 어떤 후배는 “장흥의 사색당파와 동향을 정리해 달라”는 요청을 해왔는데, 그 기회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1862년 장흥민란의 주동자요, 탐관으로 취급되던 ‘국로 고제환’에 관한 재평가 칼럼에 대한 여러 격려에도 감사드립니다. ‘장흥지명의 유래와 정체성’에 관한 글을 반기는 입장이 더 많았습니다. 지명 유래는 그 지역과 역사의 정체성과 상통할 것이기에 아주 소중한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장흥의 박사 ‘최상채, 김두헌’과 강진의 시인 ‘김영랑, 김현구’에 대한 짧은 언급에도 그 반향이 있었는데, 모름지기 ‘문림장흥’을 강조하려한다면 오히려 ‘강진, 해남, 보성, 완도’의 문학과 문학인에 대한 포용적 자세가 필요할 일입니다. ’서편제’의 원제목이 ‘남도 사람’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이청준 서편제’는 기실 ‘장흥 서편제’가 아닌, ‘남도 서편제’로 보아야 마땅합니다. (‘동,서편제’를 섬진강으로 구별하고, ‘중고제’를 충청도 판소리로 여기는 분류법에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해남의 ‘김남주, 고정희’, 보성의 ‘조정래, 문정희’ 문학을 장흥사람들이 먼저, 함께 논의할 때에 오히려 남도 웅부(雄府)로서 장흥 역할이 커지고, 장흥이 중심이 되는 남도문학의 외연과 내포가 풍성해질 것입니다.

정유재란 회령포진 수군통제사 취임식을 둘러싼 갈등적 상황을 장흥의 문화상품으로서 연극화할 수 있겠고, 재기와 치유의 ‘판소리 이순신’ 작업도 가능할 것입니다. 부디 장흥출신자 이름만 거명하는 식의 ‘나열주의, 물량주의’ 함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소설가 이승우를 두고 “장흥 출신이 ‘이상 문학상’을 받았다더라.”로 끝내지 말고, 이제는 ‘이승우 문학’을 이야기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이청준, 한승원, 송기숙’과 분별되는지 한번 이야기해 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그저 ‘최고, 최초, 기록원 인증’ 운운하면서 장흥 연고에만 매몰된 ‘장흥 수사학의 과잉’, 그 허세에서 벗어나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나간 시절의 불세출 영웅이 남긴 영광이라 한들 다가오는 시간 앞에서는 ‘침몰선’처럼 하찮게 또는 무겁게 가라앉을지 모릅니다. 과거사(史)의 편면적 윤색보다는 다가올 미래에 대비하며 오늘의 향토사(事)를 구체적으로 논의해보면 어떨까요? ‘소프트웨어 컨텐츠’를 담보하지 못하면서 “먼저 유치하자, 건물을 짓자”는 식의 ‘하드웨어 우선론’에 수반되는 위험성을 미리 계산하여야 합니다. 과연 다가올 장흥 일을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요? 아마 가까이서, 또한 멀리서, 그 중간 지점에서, 또한 함께 본다면, 더 잘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장흥문화원의 ‘장흥문집 국역사업’은 장흥의 미래에 대한 장기적 투자가 될 것입니다. 이제 ‘방호집(김희조)’과 ‘은암집(김몽룡)’을 추천합니다.

3. 더 쓰고 싶었던 과제들 - 예컨대, 장흥 땅과 ‘평산 申씨’ / 장흥의 비극적 인물들/ ‘존재 위백규’를 만든 인물들 /유배객 ‘영천 신잠’과 연곡선생/ 금강산에 다녀온 장흥선비들/ ‘장택폐현’의 독자성 /‘웅치 회령 천포’ 3방/ 장흥의 형제들/ 장흥의 나무들/ 장흥의 효자 열녀들/ 민정중이 유배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던 길/ 강진 정약용의 두 번째 거처/ 장흥 땅의 풍수적 명암/ 장흥 병영(兵營) 시대의 명암/ 장흥여성과 억불산 바위/ 장흥 서편제, 남도 서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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