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사 지면개편으로 <예강칼럼>을 다음 주에 마치려니, 마음이 급해진다. 지방향토사에도 여러 명암이 있다. 장흥 관련인물이란들 쉽게 과대평가할 일은 아니련만, 애향의 허세 속에 부풀려지기도 한다. ‘최고, 최초, 최대’와 ‘영웅, 불세출, 대문인, 비조’ 등 언사가 1회성으로 남발된다. 때론 무지 속에 저평가되면서, 풍문의 그늘로 숨어들기도 한다. 그때 활동했음은 분명하나, 기록으로 찾지 못한 사람도 있다. ‘끼어들기’도 있는 역사의 숲에는 쳐내야할 곁가지들이 꽤 있다.

1. 그런 일은 없었다. -여말 선초에 장흥으로 내려온 그들 모두가 ‘낙남(落南) 명현, 기묘명현’인 것은 아니다. 대의를 쫒아 낙남했을 수도 있지만, 때론 유배 좌천되거나 또는 처가(妻家)를 찾아 이거(移居)했을 수 있으니, 낙남시조의 벼슬과 행적에 대한 바깥 자랑은 경계해야 할 일. 어떤 집안 인물은 비록 장흥의 후대기록에는 나름 확인되지만, 중앙의 원전(原典)기록에서 찾을 수도, 있을 수도 없었다. 이하, 각자 입장을 앞세운 오해가 없기를 바라며, 몇 사정을 정리해 본다. ‘설암 김필’ 선생이 단종을 기리며 ‘사인정’을 세우고서 계속 은거한 일은 없다. ‘사인, 사인정’은 그보다 훨씬 높은 2품 벼슬의 ‘이조참판 영정, 신도비’에 스스로 모순되지 않겠는가? 후대에 ‘만포 심환지(1730~1802)’가 완곡하게 쓴 글을 받아들여야 한다. ‘설암’ 선생은 세조당대에 명망이 높았던 고위직 행정실무가였다. ‘추강 남효온’은 장흥 땅에 유배되지 않았고, 방문여행을 몇 번 왔을 뿐. <왕조실록, 추강집>에 비추어 보더라도, 오랜 동안 장흥에 머문 사실은 없다. 생육신으로서 ‘추강조대’의 명망이 후대에 지속되었던 것. 17년 장흥 유배객 ‘영천 신잠’을 장흥의 스승으로 기렸기에 ‘신잠사’로 모셨던 것이지, 처음부터 ‘예양서원’에 모셨던 것은 아니다. 차례로 다섯 인물을 배향하여 ‘오현사’가 되고, 또한 ‘예양서원’ 모습이 된 것. 평화리 ‘위습독 산정’에 찾아가 詩를 남긴 분은 ‘영천 신잠’이다. ‘영천’ 선생의 <관산록>에서 확인되는데, 후대의 일부 문집에 ‘추강’으로 오기된 사정으로 그 부분 오해가 되풀이되고 있다. ‘매월당 김시습’이 과연 장흥 땅에 들렸는지도 불확실한데, 어찌 ‘사인정’에서 십년을 지냈다고 단정할 것인가? ‘백범 김구’의 <백범일기> 등엔 ‘사인암 제일강산(第一江山)’ 이야기는 없다. 장흥의 ‘부춘정, 창랑정’에도 ‘第一江山’ 편액은 걸려있고, 전국적으로 그 사례가 많다. 판소리 ‘강산제’ 창시자로 당시 웅치방에서 살았다는 ‘명창 박유전’의 생몰년은 아무도 모른다. 국악계에서 주장하는 '1835~1906'은 실제 생몰년이 아니라, ‘헌종~고종 연간’의 인물로 짐작한데서 그 ‘헌종~고종 재위기’에 맞춘 계산법일 뿐. 그 보성 웅치 판소리를 웅치로 이거한 장흥인물 ‘김명식’이 후원했었다. 조선시대 내내 ‘예양강’이었고, ‘현 탐진강’ 명칭은 없었다. 장흥별호가 ‘관산’으로 “관산=장흥”이었으니, 옛 문헌에 나온 ‘관산’과 일제기에 등장한 ‘고읍=관산’을 부디 구별하자. 천관산에 ‘천관녀’는 없다. ‘장흥 天冠山’이요, ‘경주 天官寺’인데, 어찌 통할 것이며, ‘天冠보살’과 ‘天官녀’가 서로 같으리요. 정유재란 ‘회령포 향선10척’ 집결자에 '보성사람 김명립'은 없었다. 또한 장흥府 장흥땅에 속한 ‘군영구미 해창(海倉)’이요, ‘남쪽 회령포鎭(진)’일 뿐이다. 임진정유난과 조선수군 재건로에 관한 보성군 책자에는 ‘당대인물, 당대장소’를 왜곡하는 홍보성 주장들이 꽤 있다. ‘반곡 정경달’은 장흥 장동 반산에서 생몰한 장흥선비이며, 이른바 보성사람, 보성의병장이 아니다. 조선 내내 장흥 땅이던 ‘웅치,회령,천포’는 1914년에야 보성군으로 이속되었을 뿐이다.

2.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 어떤 인물평가에 있어 벼슬과 등과도 중요한 요소이겠지만, 그들이 남긴 문집(유고)과 전체 인생을 소중히 평가하자. ‘어디에 몇 줄 기록이 있고, 어떤 명사와 교제했다하더라’는 식의 단편적 자료에만 의존하지 말자. 무슨 8문장, 3대 처사라는 것은 한 시절 수사일 뿐이겠다. 한편 수직(壽職), 증직(贈職)’ 벼슬과 비석머리 치장한 ‘비석’ 세우는 일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또한 조선말기와 일제시기에 부쩍 늘어난 ‘사우, 사당, 정자’ 숫자가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겠는가? 부디 ‘나열주의, 물량주의’ 과장법을 피하자.

1) <기봉집, 옥봉집, 반곡집> 국역본도 장흥후손에 의한 ‘장흥판’으로 보완해보자. 그 시적(詩的) 시공간(時空間) 상황과 등장인물을 제대로 풀이한 <옥봉집, 장흥판>이면 ‘문림의향’ 명성에 한층 부합될 일. <반곡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정경달의 지인들은 누구인가? ‘金진사’는 ‘광산김씨 김정(조부 정인걸의 외손자. 그 아들이 김택남)’, ‘선장(善長)’은 ‘죽천사에 배향된 위덕원’ ‘叔獻(숙헌)’은 ‘김기해(‘율파 김득추’의 아들)’, ‘고종사촌형’은 ‘김공희(‘남계 김윤’의 아들)’이다.

2) 임진, 정유란에 참여한 장흥사람 ‘조선감 김세호(金世浩)’가 있었다. ‘귤은재 김류(1814~1884)’ 문집에 나온 <부장김公행장序>가 소략하여 아쉽지만, ‘고려 봉직랑 金之후손, 전함8척 건조, 벽파진 해전전사, 후손 김윤현(金允賢)‘ 등을 언급하고 있다. 그 ’김해김씨 김세호‘를 찾아낼 수는 없겠는가?

3) ‘고읍 당동’에 '孝子 백씨형제'가 있었다. <정묘지 고읍방,1747>에 “동찬(同餐)사십년, 견목(見木) 일근양조자 불인절(一根兩條者 不忍折)”로 기록된 ‘나무 모습’과 진원박씨 ‘동계 박춘장’이 천관산과 당동 방문 후에 남긴 <지제산유상기,1638>의 ‘정려각 목격’을 합쳐보면, 그 ‘백씨형제 효자’가 확인된다. 예전엔 ‘향교, 관아를 통한 孝子공인제’를 시행했기에 장흥기록에 등재되지 아니한, 이른바 ‘전설 속 효자’를 현실에서 그대로 수용하기는 어렵다. (장흥 孝子烈女들은 언젠가 따로 이야기해 보겠다)

4) 그 묘소의 장군들은 누구인가? 그 시절 웅치방의 신전 대산2리 서쪽 범바위등에 있다는 ‘魏장군 묘’, 그 시절 용계방, 현 장동면의 어느 고갯길에 지금도 있다는 ‘盧장군 묘’의 주인은 누구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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