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 선생의 소설에 <과녁,1967>이 있다. ‘활을 쏘며 사정(射亭)을 지키는 장인의 삶에 얽힌 비극성, 그 주변과의 소통의 단절’을 그렸다.
장소적 배경이 되는 ‘읍공원 북호(北虎)정’이 얼핏 옛 ‘장흥 남산공원 흥덕정(興德亭)’을 연상시키기는 하나, 내용은 무관하다. 소설 <따뜻한 강,1986>에는 서울 장충단공원 숲터에 있는 활터로 지칭되는 ‘남산 석호(石虎)정’이 나온다. 아마 서울 약수동 시절에 올라가셨던 모양. 현 ‘장흥 흥덕정’은 공원 아래쪽에 이건된 것인데, 여전히 걸려있는 ‘정간(正間)’ 목판이 ‘정간 배례(拜禮)’ 유풍이 지속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어떤 이들은 ‘정간(正間)’을 철거해야 마땅할 습속으로 주장했지만, 그 ‘정간’ 위치는 3칸 사정(射亭) 건물의 중심부에 ‘선생안(先生案)’을 보관하던 자리였으며, 또한 정간(正間)은 국가적 중심과 왕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망궐례’의 ‘궐패, 전패’에 해당하는 상징적 역할을 했던 것. 서울 황학정의 중심엔 ‘고종 어진(御眞)’을 배치하였고, 다른 사정들은 그 대신에 배치한 ‘정간’을 ‘射亭 예절’의 표상물로 삼았다. 이하, 우리 옛 장흥의 국궁(國弓) 전통에 관련한 명궁(名弓)과 여러 射亭들을 살펴본다.

1. 명궁(名弓) 인물들 - 무과장원 출신인 장흥任씨 ‘임득창(1455~1486)’을 두고 성종시대에 ‘한 시대를 대표하는 명장’이라 했다. 또한 안양사람 정해군 ‘백수장(1469~1543)’은 인조반정 공신으로 무과 중시장원인데, ‘백보천양(百步穿楊)’이라 했다. ‘백보 밖에서 버들잎을 명중할 정도로 재예가 출중했다’고 <계서유고, 백진항>는 말했다. 임진정유 양난에 활약한 장흥위씨 ‘위대기(1555~ )’ 장군은 ‘팔백근 활을 사용하는 여력’이 있었다는데, 영광김씨 김여정(1580~1642)은 ‘백구두혈 일궁도(百仇頭血 一弓刀)‘라 표현했다. 또한 용산사람 ’이맹(李孟)‘ 장군은 인천이씨 당곡사(唐谷祀)에 배향된 인물로, “남면 운주산 장군동(장구먹재)에서, 활로 왜군 격퇴를 했다(有壯士李孟 持弓立洞門)”고 전해진다. 또한 안양 ’기산 팔문장‘에 비견되는 ‘안양 팔장사’로 ’송정 회사처(會射處)‘ 출신의 여덟 무장이 있었다.

2. 장흥기록에 나온 사정(射亭)들 - 먼저 장흥 부동방 벽사역 射亭으로 ‘관덕사(觀德射) 또는 관덕정(觀德亭)’이 있었다. <논어>의 ‘사이관덕(射以觀德)’에서 유래한 ‘관덕(觀德)’은 선비들의 활을 쏘며 심신을 다스리는 행위를 德을 함양하는 행위로 본 것. ‘관덕정’은 전국적으로 꽤 있다.
용계방 동백정은 射亭으로도 활용되었다. 김억추(1648~1818) 장군 등을 배출한 청주김씨 무반들 會射處였다. 용계방 瓦里都亭(와리도정)은 초기에는 會射處로, 후기에는 서실(書室)로 사용되었다한다. 안양방 기산 송정(松亭) 사대(射臺)는 8장사 會射處로 유명했다.
한편 <장흥 정묘지>에는 장흥 건산(巾山) 射亭이 나온다. “건산 후등에 있고 예전에 축대 3층인데, 느릎나무 홰나무가 막아주어 활을 쏘며 놀이하는 유사지소로 일읍무반들이 재예를 이루는 곳(在건산後 古時축대3층 槍楡槐爲 遊射之所(창유괴위 유사지소) 一邑名武 於此成藝(일읍명무 어차성예)”이라 했다. 아마 장흥읍의 대표적 射亭이었을 것. ‘만수재 이민기(1646~1704)’는 <答(답)연곡 회사격문(會射檄文)>에서 그 당시 땅에 떨어진 활터 법도를 개탄하고 있다. 당시에 ‘건산백년(巾山百年) 명기일부(名基一府)’이라 칭할 정도로 ‘건산 射亭’이 연륜이 있는 명소였음에도 아마 참가자들의 편사(便射)에서 지나친 무례(無禮)와 승부의식으로 큰 소란이 일어났던 모양이다. 고읍 방촌 쪽에는 ‘호동 射亭’이 있었다. <정묘지>에 나온 ‘莎亭(사정) 古寺’ 터와 겹칠지 모르는데, <조선지지>에는 ‘射亭野(사정야), 射場(사장)이들’이 나온다. 조선 후기로 넘어가면서 射亭 건물을 대신한 곳에 ‘사장(射場)이 들어서며, 큰 ‘사장나무’ 아래에서 활쏘기를 하게 된다.
조선 후기에 무과를 만과(萬科)라 호칭할 정도로 오로지 활 솜씨로만 무과급제자를 대량충원 하면서 전국 곳곳에 활터射場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선 것. 숙종 시기(1676)에는 무려 1만8천명 남짓이 급제하였다. 장흥읍 평화리 동네 초입엔 ‘평화리 射亭’ 비석이 있다. 한때 무반가로 명성이 높았으니, ‘射亭 또는 射場’이 있었을 것. 장흥 안양 선비 ‘백암 마석순(1882~1966)’의 詩에 ‘춘일회우사정(春日會于射亭)/ 사정공화(射亭共話)’도 나온다. 남산공원에 있던 옛 ‘장흥 흥덕정’은 1960년에 창정되었다한다.

3. 장흥지방 향사례(鄕射禮) - 국가적으로 ‘대(大)사례’, 지방에는 ‘향(鄕)사례’가 있었다. 영광김씨 ‘방호 김희조(1680
~1752)는 詩 ’觀(관)鄕射禮 - 쟁야은연군자풍, 爭也隱然君子風/존심정이기재중,存心正已在其中/반우인득오유술, 反隅認得吾儒術)/수성공부대저동, 修省工夫大抵同‘을 남겼다. 고읍사람 ‘존재  위백규(1727
~1798)’는 1788년(62세)에, ‘다산정사 낙성연’에서 ‘鄕射禮’를 주관했다. 鄕射禮는 문무겸전의 실천덕목이자, 지방향약에 대응한 풍속교화의 방법으로 활 쏘는 행위를 통하여 권선징악(勸善懲惡) 규범실천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해배 직후에 그 고향 ‘향사례’에 참여하였다.

4. 기타 활, 화살에 관한 특산품 - 죽성(竹城)으로 호칭될 정도로 옛 장흥에는대나무가 많았으니, 죽실(竹實)을 먹는 봉황이 날아드는 ‘봉명정(鳳鳴亭)’과 ‘죽교(竹橋)’가 있었다.
<정묘지>의 토산(土産) 품목에 ‘죽전(竹箭)’이 나온다. 부동방 평화리 죽봉(竹峰)에서 ‘전죽(箭竹)’이 생산되었고, 부산방 민역(民役)에는 ‘전죽’을 만드는 대나무를 베어내는 ‘전죽작취(箭竹斫取)’가 있었다. 회령방 民役에는 ‘관혁판(貫革板), 弓竹(큰 활대)’ 납품이 있었다. 그 지명으로 ‘고읍방 竹靑’도 있었고, ‘대흥방 竹靑’도 있었다. ‘죽청’ 지명은 대나무 집산지 정도의 유래를 가진 것 아닐까? 인근 다른 지역에도 그 지명사례가 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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