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함은 익숙해 지고 방역수칙은 엄정하게 지키며 살아야 하는 시대
지난 한 해 우리 모두의 화두는 코로나로 멈추어 버린 이 상항이 “언제쯤 좋아질 것인가?”였다. 수없이 많은 경우의 수는 있었지만 그 누구도 명쾌한 해답을 가져다 줄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간들을 그저 참는 것으로 견디고 있어야 했다. 전쟁도 기아도 아닌 예측 가능한 자연 재해도 아닌 바이러스의 습격이 이 세상을 “멈춤”의 시대로 몰아갈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 것인가. 이렇듯 답답한 상황속에서 미래학자들의 진단이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것이다.
이제 이 세상은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이후”로 나뉘어 질 수 밖에 없고 코로나 이전의 그 자유와 여유를 향유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는 진단이다. 결론은 우리 사회의 삶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건 불가능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세상 그 “멈춤”의 일상에 적응하며 살아야만 한다. 결코 희망적일 수 없는 세상, 그지없이 불편해진 세상을 어찌 견디어 내야만 하는 것인가. 돌이켜 보면 인류는 수없이 많은 곡절들을 겪으며 역사를 축적해 왔다. 그 역사속에는 엄청난 재앙과 사건과 사고가 있었지만 의연히 극복해 왔다. 그 사실들이 오늘의 불편함을 위안하는 사례는 될 수 없지만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우리의 미래에 대한 그리고 더불어 살아야 하는 새로운 방법들에 익숙해 져야 만 할 것 같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코로나 시대의 불편함에는 익숙해 져야 하지만 「방역수칙」의 엄정함은 한 치라고 소흘히 할 수 없는 삶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우동 세 그릇 그리고 가로등
지난 해 12월 중순 무렵이었다.
마을 회관의 현관에 신발 몇 컬레가 보였다. 마을 회관이 소통과 휴식의 장소인 어르신들이 코로나19에 묶여 자유스럽게 모이지도 못하는 형편이어서 반가운 생각으로 문을 열었다. 세분의 어르신들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맞이 했다.
“아이고 오랜만에 얼굴 뵙네요. 보일러 따땃하게 트세요.”
“예마리요. 은제나 맘대로 모이고 밥도 묵고 그라까이. ”
“금메 말이요. 기왕에 오셨응께 점심이나 지어 드시재 그라요”
“뭣이 있어야재 요새 통 장도 안봐나서 반찬거리가 없당께”
그 정황이 짐작이 되었다. 마침 점심녁이었다. 말 대접으로 지나치기에는 아쉬움이 앞섰다.
“그라면 마침 세 분인께. 내가 점심 대접 할게요. 배달 편하게 우동이나 짜장면 으짜까요”
하여 삼선우동 세 그릇을  배달해 드렸다. 저녁 나절쯤에도 회관에는 신발이 있었다.
드려다 보았더니 역시 세분이었다. 우동을 드셨을까. 문을 열자마자 말 대접부터였다.
“워매 잘 묵었오예. 우동이 풀떼기(채소)랑 해물이 어째 푸짐한지 마침 여섯이 나눠 묵었어도 배가 부릅디다야. 설거지도 안 하고 포식 했오야.”
“아니 우동 세 그릇을 여섯분이 드셨다구요”
“그래도 배 부르더랑께.. 얼령 묵고는 많이 모여 있으면 말 듣것다고  서이는 핑 들어 갔어”
우동 세 그릇, 여섯 분의 어르신들이 나누어 드셨어도 배 부르더라는 덕담 끝에 1반 반장 아짐이 말을 이었다.
“그라고요. 저그 향교길 사거리에 어저께 전봇대에서 먼 공사를 하드마는. 저녁에 내다본께 가로등에 전구를 새 것으로 달았는갑서. 워마 골목이 어찌께 훤 하든지.. 눈이 개안하데.
“저도 보았습니다. LED 전구로 교채 했더라구요”
“오랜만에 만난 우동도 묵고 골목은 훤한디.. 이놈의 코로난지 뭣인지는 은제 없어 지까이?”

◆성찰과 사유 그리고 변화의 시대
코로나19로 우리나라에서 사망한 숫자자 1,000명을 넘어 섰다고 한다. 바이러스가 전쟁에 버금가는 죽음을 몰고 오고 있는 것이다. 이 죽음의 사태를 피하기 위하여 국가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 하고 있으며 국민은 비대면의 세상, 거리두기의 삶, 멈춤과 제한의 불편함들을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19를 극복 할 수 있다면 현재보다 더한 상황도 즐거히 감당 하겠다는 것이 여론이기도 할 것이다.
지난 일년동안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온 이 시대적 재앙을 이제 우리의 것으로 수용하려는 성찰과 사유가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삶의 지형이 변하고 있다.
사회의 질서가 변하고 있다.
이 변화의 시대, 코로나19를 이겨 내려는 치열한 성찰과 사유의 자세가 우리들의 미래를 결정 할 수 있다는 각오, 그 각오가 포스트 코로나 원년의 다짐이어야 할 것 같다.
참으로 절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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