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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노장 투혼, 이제 ‘청춘’이어라예강칼럼(145)/박형상/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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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1.08  09:4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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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출과 혼인연령이 점차 늦어지는 요즘 현실이다. 머지않아 백세 노인시대가 도래할 터이니, 우리들 선택지는 그만큼 다양해질 수 있겠다.
그 시절 폐쇄적 신분제 시대에는 과거응시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여의치 않았으니, 늦은 나이까지 과거공부를 한들, 경제적 어려움을 감수하는 것 말고는 달리 흠 잡힐 일이 아니었다.
진사와 생원이 되는 소과(사마시)는 대과 응시자격을 얻는 통로에 해당하지만, 소과 입격만으로도 음관자격과 군역면제 등 특혜가 뒤따르고, 동년 입격자간에 전국적 유대가 형성되며, 향촌의 ‘사마재’ 조직을 통해 일정한 발언권을 행사하기에 사실상 ‘선비 자격증, 양반 자격증’ 취득시험이었다.
소과는 3년 식년시 단위로 전국에서 진사100명 생원100명을 지역할당제로 뽑는데, 역시 어려웠다. 소과를 통과해도 그 입격자 절반이상은 대과 문턱을 못 넘었다. 소과 낙방이면 유학(幼學) 신분으로 대과응시로 직행하는 방법도 있지만, 대과 준비에 평생을 소진하기도 했다. (소과 입격자명부에 해당하는  <사마재 제명록>를 두고 ‘그 명부에 유학출신 대과급제자를 빠뜨렸다’고 비난하면 이상한 지적일 것) 그런데 지방의 한미한 집안출신이면 설령 대과 장원이라도 남다른 출세는 어렵다.
장흥출신, 44세 대과 장원은 ‘현감, 군수’로 끝났었다. 대과급제자 평균연령은 35~38세 정도였다고 한다.  다시 ‘소과’ 이야기를 해보자. 늦게라도 입격하면 자존심 보상에 ‘선비양반 자격증’ 취득이니 가문의 큰 경사였다.
여러 반칙과 편법 잡음이 난무했던 조선 후기에는 지방거주자의 소과 입격은 매우 어려웠다.
하향벽지 장흥거주자 경우에는 서울에서 그 거리도 멀고 특례시험 정보에도 어두웠다. 장흥의 소과(사마시) 입격자는 장흥향교 <사마재 제명록>에 입록 되는데, 그 일부 오류를 조심해야 한다.( 숙종 때 사마재 화재로 원래 명부가 소실되고서 그 한참 후에 다시 만든 명부가 부실해졌다) 돌이켜 장흥의 50세 이후 소과 입격자를 보면, 50대 3명, 60대 4명, 70대 4명(73세 2명, 77세 1명, 79대 1명)이고, 최고령자는 1876년에 입격한 80세이다. 비록 늦었을지라도 서울과 성균관 출입 경험을 하면서 안목이 훨씬 넓어지니, 식견 높은 선비로 거듭 태어나기도 한다.
존재 위백규(1727~1798)는 39세에, 동생은 62세에 소과를 통과했다. 노사 기정진(1798~1879)과 매천 황현(1855~1910)은 34세에 소과 입격이었다.
경화벌열의 자식이라면 대체적으로 소과와 대과를 별 어려움 없이 통과하든지, 아니면 소과입격으로 음직을 얻은 다음에 다시 느긋하게 대과 문턱을 넘었다.
‘대과’ 이야기를 해본다.
16세기 인물 기봉 백광홍(1522~1556)은 28세로 사마 양시(생원, 진사)에, 31세로 대과 급제했고, 홍문관(옥당)에 진출했었다.
장흥출신의 대과갑과 장원은 2명으로 ‘1621년 알성시 선세휘(39세)’와 ‘1723년 식년시 정재춘(44세)’이 있었다. ‘갑과3위 2명’에, ‘20대급제자 3명’ 등으로 대과급제자 전체 숫자는 다른 부사고을에 밀리지 않는다.
한편 소과를 비껴난 ‘유학(幼學)’ 출신이 대과급제를 한들 우대받는 것은 아니다. 소과입격에 대과급제가 정통엘리트 코스였다.
28세 대과급제자 '반곡 정경달(1542~1602)'은 ‘유학’ 출신사례로 그 초반 벼슬길은 무척 어려웠다.
어찌 보면 임진난에 그 역량이 드러나면서 기회를 잡은 것. 특별한 기회와 배경을 얻지 않는 한, 출세의 요체는 역시 출신 집안의 명망과 문벌등급 여부이다.
대부분 경직(京職)요직은 경화벌열 출신이 차지하며, 지방의 한미한 집안출신이나 40~60대 급제자는 파직 또는 중도하차가 아닐 때 ‘현감, 찰방, 군수’ 등에서 끝나며, ‘목사, 부사’도 결코 쉽지 않았다. 어떤 61세 급제자는 흥양현감으로, 67세 급제자는 양재찰방으로 끝났다. 장흥 벽사역 찰방으로 내려온, 어떤 대과급제자는 바로 사직하고 일단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지방한직 말직을 전전하다가 관직을 마치는 대과급제자는 문집유고를 남기기 어려운 반면에 소과입격자는 고향 집성촌에서 독서생활을 하는 경우에 문집유고를 남길 수 있게 된다. 어쨌거나 그 시절엔 비록 노장 고령이었다지만 자신의 선택이었기에 꿋꿋이 버티며 공부를 천직으로 즐기기도 했을 것.
이제는 백세 장수(長壽)로 가는 세상이 되었으니 나이 6,70에도 쉽게 포기할 수는 없을 일. 그 시절 나이 7,80으로 입격한 노장투혼 선조들도 존경스럽지만, 이제 후생들에겐 그런 과거시험 말고도 靑春을 더 누릴 수 있는 기회가 훨씬 남아있을 일.

<고령의 소과입격자> - 魏정헌(1570~),66세,1635년 /朴광희(1632~),62세,1693년/文덕룡(1666~),52세,1717년/ 丁윤창(1691~),51세,1741년/丁시엽(1723~),79세,1801년/ 魏백순(1737~),62세,1798년/ 李복연(1768~),58세,1825년/魏탁(1794~ ),73세,1867년/盧관(1797~ ),80세,1876년/李희석(1804~),77세,1880년/ 盧유삼(1808~),73세,1880년/ 金학선(1814~),69세,1882년.

<소과를 비껴난 幼學 출신> - 丁경달(1542~1604), 28세, 1570년 대과,  선산부사. 李충무공 종사관, 청주목사/ 文덕린(1673~1739), 35세, 1708년 대과/鄭재춘(1680~), 44세, 1723년, 대과갑과 장원/ 金성후(1683~), 45세, 1727년 대과, 풍기군수/金광호(1695~1746), 28세,1723년갑과3위, 창락찰방, 사헌부지평/姜언보(1703~), 61세, 1764년 대과ㆍ흥양현감/ 張욱(1705~ ), 67세, 1772년 대과/양재찰방/高익경(1721~1800), 27세, 1747년 대과/장령. 북청부사, 한성부우윤(2품)/鄭두흠(1832~1910), 47세, 1879년 대과/사헌부지평/78세에 ‘손명사 절명시’ 순절.

<장흥 출신, 대과 갑과 장원> - 선세휘(1582~ ), 소과 출신(1606), 알성시 갑과장원(1621,39세), 성균관 전적, 1623년 유배/ 정재춘(1680~1750), 幼學 출신, 식년시 갑과장원(1723, 44세), 가평군수, 해남현감.
조선시대 과거제도는 1894년 갑오년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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