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北望之哭 - 임금(君)은 남면(南面)하되, 신하들은 북망(北望)하며, 그 임금 또는 부모를 그린다. 1521년경 장흥유배객 ‘영천 신잠(1491~1554)’은 임금에의 충(忠)과 모친에의 효(孝)를 그 북망(北望) 詩에 실어 보냈다. 지방관료들의 ‘망궐례(望闕禮)’도 있었고, 국상 때는 ‘망곡례(望哭禮),망곡의(儀)’가 있었다. 이번에 ‘수의봉 망곡(望哭)서(書)’ 현장이 재확인되었다. 혹자는 ‘발굴’을 말한다지만, 그 ‘감봉(感峰) 망곡’ 詩는 <조선환여승람, 장흥,1933>과 <장흥읍지 무인지.1938>에 이미 실려 있다. 돌이켜 장흥에도 ‘망군(望君), 망북(望北)’의 전통이 있었다.
문위세(1534~1600)-‘思君대(亭)’/문희개(1550~1610)-‘望君대’/정경달(1542~1602)-‘망북음(望北吟), 망미인(望美人)/정두흠(1832~1910)-‘망화(望華)대’ (‘망곡書’가 등장한 그 경술국치(1910년)에 정두흠은 ‘손명사’ 절명시를 남기고 순사하였다) / 문계태(1872~1955)-‘망미(望美)대’

2. 이번 언론보도자료에 소개된 “회은 위원량”의 “망곡서(望哭書)”
登臨是日感斯峰 /오늘 올라와 이 봉우리에서 느끼나니
峰是東邦守義峰 /이 봉우리야말로 동방의 의를 지킨 봉우리네
人多不守峰能守/사람 많아도 못 지킨 것을 봉우리는 지키니
可以人多不似峰/많은 사람도 이 봉우리만 못하누나. (장흥신문 기사)
 (<필자 각주> ①제3구의 “인다불수(人多不守)”에 대하여 <환여승람>은 “인지(之)불수(不守)”로, <무인지>는 “인이(而)불수(不守)”로 기록하였다. 그럼에도 '다(多)'로 보인다. ② 제4구의 “인다(人多)”를 <환여승람/ 무인지>는 “인혜(人兮)”로 기록하였다. 제4구 ‘人多’는 암각 현장사진으로도 ‘人兮(혜)’로 판독되는 것 아닐까?

 3. 회은(悔隱) 위원량(魏元良,1882~1945) - ‘장흥위씨 오덕(五德)’의 세째, ‘운암 위덕관(1547~1628)’의 후손으로 “1964년경에 ‘경호정’으로 이건된 ‘송암정’을 애초에 지은 분, 1936년경 평화리 ‘하산사’로 ‘백산재’ 건물을 옮겨 기증한 분, 수인산록 병암 쪽에 ‘풍호대’를 암각한 분, 천석꾼 부자” 정도로 알려졌지만, 위 ‘망곡서(望哭書) 위원량’에 관하여 <환여승람, 장흥 / 장흥읍지, 무인지>에 기록이 꽤 있다. <환여승람, 산천>편에 기록한 ‘수의봉(守義峰)’ 산명은 이때 처음 등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대개는 ‘수리봉, 응(鷹)봉’ 정도로 부르는데, ‘망곡(望哭)’의 대의명분을 살려 ‘守義峰’이라 칭명했을 것. (아마 ‘守利峰’과도 대비될 것) <환여승람>은 “감봉(感峰)詩”라 지칭하며 ’望哭書’를 소개하였다. ‘풍호대(風乎臺)’에 대해 “수의봉 중록(中麓)의 수십인 모임 장소에 위원량이 ‘풍호대’를 각(刻)했다”고 했다. (그 ‘풍호대 암각’의 현존여부도 궁금하다) ’계관봉(鷄冠峰)‘에 대해 “위원량이 ‘수의봉 병암(屛巖)’ 자리에 정자를 지었다.”고 했는데, 그 정자는 ’송암정(松巖亭)‘을 가리킬 것. <수비(竪碑)>편에 “실적비(實績碑)-부산면 유량리, 참봉 위계선 진휼(賑恤)실적비/선행비(善行碑) -부산 금자리, 참봉 위원량 시혜(施惠)선행비”가 나열되는데, 위원량의 부친이 ‘경은 위계선(1858~1917)’이다. <정려(旌閭)>편에 “효열각(孝烈閣) -부산 유량리, ‘위유권(1829~1873,조부), 위계선(부친)’과 ‘며느리 양씨(1903~1921)’등 3세 효열”이 나온다. <누정(樓亭)>편에 “송암정(松巖亭)- 부산 수인산 병암上, ‘위원량’의 소요(逍遙)지처”로 기록했다. 다시 <효자(孝子)>편에 ‘위유권(조부), 위계선(부친)’이, <정렬(貞烈)>편에 ‘며느리 제주양씨’가 있다. <환여승람, 음사(蔭仕>편에 기록된 ‘위계선, 고종조 효릉 참봉/ 위원량, 관(官) 경기전 참봉’ 경력은 <무인지, ‘음사’편>에는 없다. 이번 ‘망곡書’에 관련하여 <무인지, 1938> 역시 “수인산 동(東)에 위원량의 ‘감봉(感峰) 명(名)’ 영시(詠詩) 각암(刻岩)”이라 기록하였으니, 어쨌거나 그 시절에 “감봉(感峰)詩, 망곡(望哭)書”는 나름 알려져 있었으며, ‘위원량’ 혼자 비밀스레 간직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 또한 “그 아래에 습례(習禮)암과 풍욕(風浴)암이 있다”고 했으니, 그 ‘풍욕암’은 ‘풍호대 + 욕호암’을 뜻하는 것으로 ‘풍호대 암각’ 장소와 겹쳐질 수 있겠다. <정사(亭榭)>편은 “송암정- 위원량 건(建)”이라 했다. 여타 <무인지>의 <수비(竪碑), 효자(孝子), 열부(烈婦)>편 내용은 <환여승람>과 같다. 한편 <무인지, 속지>에 참여한 ‘찬성원(贊成員)’ 명단에 ‘위원량’ 이름이 올라있다.
또한 장흥향교 쪽 기록에 ‘위원량’은 없으며, 달리 장흥의 유학 선비로서 행적은 따로 드러나지 않았고, 정작 ‘위원량 행장(行狀)’도 볼 수 없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11월경에 타계하였다는데, 그 말년 무렵이 궁금하다. 언제 다시 한번 흰 상복을 입고 ‘수의봉’에서 홀로 ‘망곡’을 하였을 것인가? 부산면 자미마을 후등에 있다는 묘소 묘비에는 ‘회은처사(悔隱處士)’로 새겨있다. 그 개인적 삶의 행로는 어떠했을까? 1910년 28세에 ‘망곡’을 각서(刻書)했건만, 평생 심질(心疾)로 고생하던 아들 위형환(1901~1925)을 먼저 잃고 말았으니, 혹 이때부터 그 삶의 방향이 바뀐 것은 아닐까? 자식이 부친보다 먼저 떠났기에 위원량에 관한 기록도 부실해졌을 것. 이에 나라를 잃고 자식을 잃은 상태에서 ‘회은 위원량’은 “위선보종(爲先補宗) 휼궁주빈(恤窮?貧)” 사업에 치중한 것 아닐까?, 1928년경에 ’3세 효열각‘ 건축, 1936년경에 하산사 ’다산묘각 중건기증‘ 사업이 있었다.

4. 기타자료 - ‘오헌 위계룡(1870~1948)’은 족질 ‘위원량’에 대해 “회은평생능수의(平生 能守義)”라 하며 ‘수의(守義)’라는 말을 사용했고, 또한 “송백불변(松柏不變) 세한지지(歲寒之志), 경재호시 천성(輕財好施 天性)”이라 했다. ‘오헌선생’은 문집에 <登회은족질송암정(松巖亭)次원운/위원량爲先표창비(表彰碑)윤고(輪告)문/다산묘각(墓閣)중건記/송암정記>를 남겼다. 장흥읍 평화리 ‘위씨 하산사’에 들리면, 그 앞뜰에 있는 ‘중건묘각 표창비’ 비석을 한번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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