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흥문화원 인문학 강의에서 ‘장흥 백사정과 군영구미 위치’ 발표가 있었다한다. 그간에 전남도와 보성군이 관여해온 ‘조선수군 재건로 프로젝트’에서 채택된 입장은 “보성읍-보성 회천 백사정-보성 군학리 군영구미-군학리 김명립 주도에 의한 향선10척 집결 및 해로를 통한 향선직진설-장흥 회령포진 당도”로 정리된다. 요컨대 ‘보성 군학리’ 당도 후에 이순신 일행은 장흥지역 육로를 통과하지 아니했기에 ‘조선수군 재건로 종점’은 보성 군학리가 옳다는 것이었고, 보성 군학리에 그런 홍보판이 세워져 있다.
이에 필자는 그간 <장흥문화, 장흥신문>을 통하여 ‘안양 해창 =군영구미’를 주장하면서 ‘군학리 군영구미說, 김명립 주도의 향선집결說’ 및 ‘향선 해로이동說’을 수차 비판해왔다. (각주 자료 참조) 그런데 이번 발표자는 수군 재건로의 총괄적 행로를 재정리하지 아니한 채, 부분적으로 ‘장흥 예양강 백사汀說’을 제시함과 동시에 ‘장흥 쪽의 통설인, 안양 해창 군영구미說’로 회귀한 것뿐이다. 그럼에도 장흥 일각에서는 ‘대서특필 환호작약’한다는 것이며, 또한 그들 나름대로 이순신의 장흥행로를 그간에 열심히 연구해 왔다고 나선다니, 필자로서는 이래저래 의아할 뿐이고, 꽤나 이상한 풍토라 여겨진다.

1) “장흥 예양강 둔치 백사정”설 - 그간 장흥 쪽 주장은 ‘백사汀’ 위치를 ‘보성 회천(옛 장흥 회령)의 율포(또는 명교) 쪽 해안’으로 보았던 반면에 이번 발표자는 ‘장흥읍 예양강(또는 역천) 白沙 모래밭 둔치’로 비정하며, 구체적 지점은 특정하지 않고 장흥 벽사역에 가까운 어느 모래밭 둔치로 추정하였다. 발표자는 “어느 정도 쌓인 모래밭은 흔한 사례이기에, 백사정(白沙汀)을 꼭 바닷가 고유지명으로 속단할 수 없으며, 달리 바닷가 모래밭이라면 이순신 일행과 말들이 쉴만한 장소가 못된다.”는 등의 논거를 댄다. (예전에는 강진 쪽도 ‘강진 백사汀, 강진 군영구미說’을 주장하다가 이제는 폐기되었다)

2) 검토 반박-  ① 발표자는 장군 일행의 전략적이고 상징적 행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당시 장군은 통제사 복귀사실을 전파하여 그 지지를 끌어들이며, 군사적 병력 및 군량미 확보를 위하여 중간 거점지를 체크하면서 ‘배설’ 잔군일행과 접선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 행로에 위치한 ‘벽사역’과 ‘장흥부 관아’를 체크하지 아니할 바에야 굳이 ‘예양강’ 둔치로 올 이유도 없는 바, 기왕에 ‘예양강’ 부근까지 왔다면 그 가까운 ‘벽사역 또는 장흥부 관아’에 들어가서 그 실태를 체크하며 휴식했을 것임에도 <난중일기>에 그런 사정에 관한 언급은 일절 없다. 예양강 둔치에만 대충 머무르다가 그냥 떠날 이유는 없었을 일.

② 장흥사람들의 역사적 기억에 ‘예양강(또는 역천)’ 부근의 ‘白沙, 흰 모래밭’과 ‘백사汀’ 사례는 없다. 옛 장흥시인들이 ‘예양강 봉명정’은 수차 읊었을지언정 ‘예양강 白沙’ 거명은 없었다. 도대체 예양강변 어디에 ‘백사, 백사정’으로 부를 만한 곳이 있었다는 말인가? 장흥사람 여러분들은 상상할 수 있는가?

③ 마침 1521년경에 온, 17년 유배객 ‘영천 신잠(1491~1554)’은 <관산록>에도 ‘바닷가 백사汀 선유(船遊)’는 나오지만 ‘예양강 백사汀’은 전혀 없다.

④이순신 장군도 전쟁 발발 전, 1596년경 관내순시 길에 ‘고흥 녹도진’에서 배를 타고 그 건너편 해안인 ‘장흥부 백사汀’에 닿은 전례가 있다. 그때 ‘백사汀’에서 점심을 먹고 ‘장흥府’에 들어갔다는 것이니, 그 두 곳은 서로 꽤 떨어져 있다할 것이고, 그 ‘백사汀’이 ‘예양강 둔치’일 수는 없을 일.

⑤발표자는 “백사亭은 <장흥읍지>에 정경달(1542~1602)이 지은 정자로 나오지만, 백사汀은 나오지 않았다. 정경달이 전쟁 후에 지은 백사亭과 구별된다.”는 취지로 주장하는데,(백사亭을 반곡 정경달이 직접 창정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그가 당대에 남긴 시문을 모은 <반곡집>을 보면, 그는 ‘백사구호(白沙口號)’를 읊으며, 본가가 있는 ‘장동 반곡(盤谷=반산,霜산,霜촌,霞촌)’에서 산너머 처가와 동생들이 사는 마을 쪽, ‘회령 백사(白沙=沙촌,長沙,水雲촌,어촌,포구촌)’를 수시로 오고가면서 ‘白沙’에 ‘해은당’을 지었고, 포구를 가로지르는 ‘白沙’와 老松을 바라보며, ‘在회령白沙’에 ‘청람대’를 지었다는 것이니, 당시 ‘白沙’ 지명은 분명하다. <정묘지,1747>에도 “백사亭, 在포촌 東數里明沙 四面淸江, 海棠靑松 음영左右/정경달이 ‘백사亭記’와 ‘백사亭歌’를 남겼다”는 것이니, ‘백사, 백사汀 漁村’에 있던 ‘백사亭 정자’는 <반곡집>에 나온 ‘상안정(上岸亭)’으로 도 짐작된다. <정경달, 난중일기>에는 1599년 3월경에 ‘백사정(白沙亭)’이 나왔고, 1599년 8월경에 ‘유 백사(遊 白沙)’ 표현이 나온다.
요컨대, ‘白沙’는 ‘백사汀’이 있는 ‘白沙’ 어촌으로, ‘백사亭’도 입지한 풍광 좋은 海村인바, 당시에 그 ‘회령 포촌 白沙’ 말고는 장흥 일대에서 다른 ‘白沙’ 장소를 찾을 수 없다. 요컨대, <이순신, 난중일기>의 ‘백사汀’은 ‘장흥읍 예양강 둔치’가 아닌, ‘회천 포촌(율포)쪽 白沙 마을의 백사汀’으로 비정된다.

3) 추가적 의문 - 이번 발표의 다른 문제점은 ‘예양강 백사정’을 통과했든, ‘회령 백사정’을 통과했든, 그 일행이 ‘안양 해창 포구’에 도착한 후에 다시 어떤 경로로 ‘장흥 회진 회령포’에 도착했다는 말인가? 과연 ‘노기욱, 이수경’ 팀은 ‘군학리 ~ 회령포진 향선이동(해로직진)’說을 포기하였는가? 필자는 그간에 ‘군학리 김명립’이 아닌, ‘주촌 마하수’가 앞장을 선 ‘향선10척의 회진 회령포 집결’을 주장해왔고, 당시 이순신 장군이 말(軍馬)을 타고 ‘회진 회령포’에 육로로 도착한 행보를 지칭한, “단기치도(單騎馳到) 회령포” 표현의 전거(典據)를 제시하였다. ‘위 향선이동설을 포기했는지’ 여부는 이번 취재보도자 ‘김선욱’ 기자와 장흥문화원 ‘위종만’ 사무국장이 대신하여 그 답변을 구할 수 있겠다.

2, 덧붙이는 부분
1) 필자의 관련 글 - 칼의 노래 유감(장흥신문,2001.9)/ 이충무공과 장흥관계 연구(이순신논총9호,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2007)/‘벽사역과 백사정’(신문2007.6)/이충무공과 장흥, 장흥문화30호(2008)/ 수군재건로 군영구미(‘보성 군학’ 아닌, ‘안양 해창’이다.) 장흥문화37호(2015) /수군재건로 군영구미(신문2015.7월 3회)/‘단기치도 회령포’(신문2018.10)/마하수3부자,마하수5부자(신문2019.1)/의향장흥,회령포향선10척(신문2019.8)/회령포진과 회령폐현 구별(신문2019.9) 등.

2) ‘김기자, 왜 그래?’ - ‘테스兄, 왜 그래?’는 못 될, 김선욱 기자는 2018년도 회령포 축제 강의현장에 참석한 일도 없고, 당시 강의를 취재한 사실 자체가 없었으며, 이번에도 필자에 대한 어떤 취재도 없었음에도 “군영구미에 관한 박변호사의 주장은 설득력이 미흡하고, 논거도 미약한 부분이 있었다.”고 부러 지적하고 있다.
당시 강의는 그 현안쟁점 ‘향선10척의 해로직진설’에 대한 비판이 주된 내용이었고 ‘군영구미 안양 해창설’은 별 언급을 하지 않았을 뿐인바, 모름지기 기자라면 필자 졸고(“수군재건로, ‘군영구미’는 ‘안양 해창’이다”. 장흥문화37호) 등을 필독할 것을 권고 드린다.
우리 모두는 짧은 두레박줄 고사(    短汲深)에 유념할 일이다. 이번 발표자가 <軍史,제116호>에 투고한 논문을 보면, ‘군영구미 위치비정에 관한 11개 선행사례’ 중에 필자가 제시한 ‘안양 해창 군영구미’ 주장(이순신논총 9호,2007)가 유일하게 소개되고 있다. (軍史, 2020년 9월호, 제103쪽 ‘위치 비정표’ 참조) 이번 발표자가 ‘필자의 2015년도 글’까지 참고했더라면 더 좋았을 일이었다.

3) 조선수군 재건로의 역사성과 관광가치 - 필자는 ‘안양 해창 군영구미’를 제시한, <이순신논총 9호,2007>에서 ‘장흥 벽사역 백사정說/ 강진 대구면 군영구미說’을 비판한 이래 ‘벽사역 백사정’說과 ‘강진만 해안쪽을 우회한 회령진 도착’說이 대부분 수정되며 ‘장흥반도 동안(東岸)의 수군재건로’를 확보하게 되었음에도, 어느 날 전남도와 보성군이 주도한 ‘이른바 향선이동’說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현실로 바뀌면서, 이에 우리 장흥 땅에서 ‘조선수군 재건로 구간 표지판’이 없어지게 된 것인바, 역사의 파탄이다.
한편 필자는 지난 2014년경 인천 제물포고 동문으로 구성된, 백의종군 및 수군재건로 답사팀을 동행하면서 당일 도착한 ‘회진’에서 점심을 한 후 ‘회령진성’을 살펴보고 거꾸로 도보 출발하여 ‘관산읍’에서 1박을 하고 계속적인 행군을 마친 후에 장흥읍 평화에서 식사를 대접한 적도 있다. 그 답사 중에 ‘방촌 유물관’과 ‘초계변씨 13 충훈비’를 안내하였다. (임용철, ‘산티아고 가는 길보다 의미 있는 수군재건로 답사기’, 장흥문화36호,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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