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위백규(1727~1798)선생이 평생 의지하며 위로를 받았던 '천관산, 서산'에 관련한 산문으로 <포봉기, 도산축문, 예예설> 등이 있다. ‘예예說’은 별도 기회를 통하여 소개하기로 하고, 오늘은 <포봉기>와 <도산축문>을 소개한다.

1) 포봉기(蒲峰記,1762) - 1762년 존재 36세. 그해  임오년 대한(大旱)이 있었고, 존재는 “천관산 포봉(蒲峰)의 태고송(太古松) 4그루가 임오년에 모두 말라죽었다”고 따로 기록하였다. (그 포봉記 자체는 1770년경에 쓴 것으로 처리되고 있다) 그 임오년에 ‘장천재’에 머물렀고, 음7월 하순에 ‘장천팔경’을 남겼다.

그런데 필자에겐 의문이 남는다. 그 임오년은 어떤 해인가? 그해 윤5월12일에 사도세자가 부친 영조의 명령으로 뒤주에 갇혀 사망하였던, ‘임오화변’이 있었다. 서울선비들이야 부러 침묵했을 터이나, 지방선비들은 아무런 소감이 없었을까? 서울을 오가며 소과 응시를 거듭하고 있던 존재 역시 그 왕세자 뒤주살인사건을 모를 리 없다.
또한 해남유배를 마치고 천관산 유람을 왔던, 그 ‘예예설(1739)’에 등장한 민형수의 아들 되는, ‘우의정 민백상’이 다른 두 정승과 함께 1761년 사도세자의 평양 밀행에 책임지고 음독하였던, 삼상(三相) 자살사건도 먼저 있었다. 경화벌족 민씨집안과 하향토반 위씨집안은 그 격차는 컸어도 결교지간이었다. 그러니 그 무렵 서울 하늘을 짓누르고 있던, 뒤틀린 분위기를 존재가 모를 리 없을 일. 그 흉칙한 소식을 접하고서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그해 ‘장천재’에서 공부하던 존재는 천관산 蒲峰에 직접 올랐으며, 그 말라죽은 太古老松 네 그루와 구절포(九節蒲)를 두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사라져버린 태고지망(太古之亡)이 어찌 소나무뿐 이겠는가?” 돌이켜, 1751년 25세에 ‘병계 윤봉구’를 스승으로 모셨지만, 존재는 소과에 매번 떨어졌다. 실력은 높다 해도 계속 낙방했고, 10여년 무심한 세월이 더 지나갔다. 1763년 임실향시에 1등을 했다지만 경시에서 낙방하여 그 소년 천재는 저편으로 멀리 사라졌다. 마침내 1764년에 존재는 詩 ‘유회(遺懷)’에서 ‘삼벽(三僻) 한(恨)’을 토로하기에 이르렀으니, 삼벽은 ‘지벽(地僻), 인벽(人僻), 성벽(姓僻)’ 궁색함을 말한다. 연보에 따르면, 그해 1764년 5월에 존재는 관청 무고사건에 연루되어 서울로 도피하여 공부를 했다한다. 드디어 1765년 2월에 39세로 소과 생원시에 턱걸이하였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지방출신의 소과입격은 아주 어려워졌으니, 장흥지방 경우도 4~50대 소과 입격자가 상당수 있음은 물론이고, 7,80대 합격자도 드물지 않았다. 다시 1762년 천관산 태고사송 임오대한 개고사(太古四松 壬午大旱 皆枯死) 이야기를 해본다. 그 ‘포봉 태고송’은 구직구곡(九直九曲)으로 온갖 풍상을 겪은 小松이고, ‘장천재 태고송’은 거목 大松이니, 서로 다르다. 그 蒲峰 높은 웅덩이에 살아가던 사시상청 일촌구절(四時常靑 一寸九節) 九節蒲도 말라죽었다. 왕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일 정도로 태고천도(太古天道)가 거꾸로 굴러가니 蒲峰 太古松과 九節蒲가 말라죽을 수밖에 없다고 개탄했던 것 아닐까? 존재는 포(蒲)를 말했지만 기실 포(哺)와 통했을지 모른다. ‘반포지효(反哺之孝), 포육지혜(哺肉之惠)’의 그 ‘먹일 哺’다. 그 30대 중반에 천관산곡을 오르내리며 흔들리던 존재 모습을 잠시 상상해보았다.

2) 도산축문(禱山祝文,1773) - 존재 47세, 대과는 진작 포기했다. 존재의 생원 자격에 음직(陰職)이 부여될 리도 만무하고, 업농자(業農者) 선비가 되었다. ‘독성(獨醒)’의 고고한 자세를 버리고 주변사람들과 어울려 취(醉)하는 ‘중취(衆醉)’의 태도를 보여야 했다. 이제 내 신세를 호소할 상대는 오직 ‘서산(西山) 천관산’ 밖에 없었으니, 그 산그늘에서 기도를 했고, 거기 그렇게 변함이 없는 ‘천관산’을 평생 동반자로 삼아 공부를 했다. 그 기도 덕분이었을까? 존재 선생은 1796년 나이 70에 ‘옥과 현감’으로 등용되어 그 3월에 임지에 도착했다.

- 저는 이제 이미 富를 위하여 不仁(불인)을 求(구)할 수도 없고, 또한 밭을 갈아 쌀을 市場에 내다 살만한 餘力(여력)도 없으니, 위로 父母를 모시고 아래로 妻子를 거느려 食口(식구)가 십 여인인데, 이들은 헐벗고 굶주려 겨울 포근한 날도 추위를 호소하고, 가을 곡식이 무르익은 때에도 배고파 울며, 마른 날엔 가죽신이 없고, 궂은 날엔 나막신이 없는데다가, 밭을 갈려 해도 소(牛)가 없고, 출입하려 하나 수레(車)가 없고, 귀여운 아들 어여쁜 딸들이 글공부나 길쌈에 전념치 못하고, 하나 뿐인 남종 여종도 나무를 하고 물을 깉는 일을 하지 못하니, 조상의 祭祀(제사)를 때 맞춰 지내지 못하고, 친한 客이 이르러도 供饋(공궤 -음식을 차려드림)할 수가 없고, 친인척 간에도 왕래 문안조차 할 수 없고, 歲時(세시) 절기를 당해도 스스로 차려서 즐길 수 없습니다. 父親이 올해 일흔이요, 母親은 올해 일흔 둘인데, 베옷을 면하지 못하고 나물국도 배불리 먹지 못하니, 실로 저를 菽麥(숙맥)을 분변할 수 없는 자로 만들었다면, 혹시 그만일 수도 있었겠으나, 이미 성근 자식이라도 있어, 세상에 비추고 제 몸 徵驗(징험)케 되니, 어찌 돌아보며 슬피 歎息(탄식)함이 없으리이까? 하물며 나는 無賴(무뢰)한 凶年(흉년)에  뜻밖의 돌림병을 만나 세상에 알아줄 친구 없으니, 누구와 더불어 周身謀本(주신모본)하여 서툴게라도 依託(의탁)하여 살 길을 찾으리요! 이제부터는 흩어져 구렁텅이에 거꾸러질 것이 단연코 의심할 바 없을지라, 비록 ‘顔子(안자 -공자의 제자 顔回)’라 할지라도, 이에 당하면 안연히 道를 즐길 수는 없을 것이로소이다. 실로 神明(신명)의 뜻을 알 수 없으니, 과연 저는 어찌해야 좋사오리이까? (김석회 역, 존재 위백규의 문학 연구,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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