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일은 제91주년을 맞이하는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일본학생들이 조선여학생들을 희롱한 사건의 발단도 있지만, 그 본질은 순종황제 인산일 6.10만세사건이후 광주엔 성진회라는 학생결사조직에 의해 나라를 잃은 설움의 항일감정이 조직적으로 터져나왔다.

당시 일제는 동아시아 진출을 위한 20년간의 한반도식민지배가 안정적으로 확고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확신하고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전역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불태우면서 조선인들을 우민화하기 위해서 고등교육제한, 직업교육과 일본어ㆍ일본역사교육 등을 실시했다. 또한 학생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자치활동금지, 조선학생들에 대한 무시 등으로 억압했다.
이에 광주의 조선학생들은 일본인 교육자들의 억압과 무시를 비롯한 우민화정책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되면서 결사체인 성진회와 독서회 등의 조직을 결성해 항일의식을 길렀다.

성진회는 1926년 11월 광주고보생 장재성과 왕재일, 광주농업학교 박인생 등이 주축이 돼 결성한 비밀결사체였다. 내세운 강령은 일제의 기반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쟁취할 것, 일제의 식민지노예교육을 절대 반대할 것,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요구할 것 등이었으며, 각자가 회원의 확충에 노력하고 비밀을 엄수하도록 하면서 학교별로 독서회 등을 조직해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이러한 항일의식은 1928년 6월 26일 광주고보생 이경채가 주도한 일본제국주의타도 및 조선의 독립 등을 주장한 내용의 격문을 배포한 사건과 관련해서 광주고보와 농업학교의 동맹휴교파동은 학생들의 구속과 퇴학으로 커다난 파문을 남긴 채 일제의 폭압에 의해 마무리 됐다.
하지만 광주의 학생들은 국권을 빼앗기고 차별과 탄압을 받으면서 무자비한 보복까지 당하는 현실을 목도했다. 1929년 새해를 맞았으나 마음속은 민족의 독립만을 갈구하고 일제침략자에 대한 저주와 분노를 새기면서 ‘조선독립만세, 조선혼을 고취하자, 6월이 되면 모두 맹휴에 들어가자’는 낙서가 화장실 등에 나붙었고, 이경채사건 1주년이 되는 날 한일통학생끼리의 충돌과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조선여학생들을 희롱하는 사건 등이 발생하자 이러한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11월 3일은 공교롭게도 음력으로 10월 3일이어서 우리나라의 개천절에 해당하는 날이었는데, 일제는 4대 명절인 명치절(明治節)이라 이날을 축하하기 위해 성대한 잔치를 벌일 작정으로 전남산 누에고치 육백만석 돌파 축하행사를 실시했다. 이 행사는 각 군에서 동원된 사람들로 인해 광주는 인파로 들끓었다.

기념일에 참석한 학생들은 우리명절인 개천절은 좋아할 수 없는 처지에 침략자들 명절인 명치절을 축하해야 한데다 며칠 전 나주역학생희롱사건에 대한 울분까지 겹치면서 일본인 광주중학생과 닥치는 대로 격투를 벌였다. 소식을 듣고 몰려온 도민들도 왜놈들을 죽여라고 함성을 지르며 사기를 북돋아주자 학생들은 ‘신천지에 휘날리는 우리 동포야, 길이길이 기다리던 오늘 왔구나’란 노래를 부르며 ‘조선독립만세, 식민지노예교육을 철폐하라, 일본인학교 광주중학을 폐쇄하라’를 외친 항일운동은 경찰의 비상경계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되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광주지역에 국한하는 단순한 시위에 그치지 않고 장재성과 장석천 등에 의해 보다 발전적인형태의 전국적인 항일운동으로 확산해 나갔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까지 파급돼 만주의 간도와 지린성 및 중국의 상하이와 베이징 그리고 일본 등지에서까지 광주항일학생운동을 격려하며 동참하는 시위가 이듬해 5월까지 이어졌다.

이처럼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어느 날 우연히 광주에서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망국에 처한 일제의 정치적 경제적 침략에 대한 축적된 분노가 조직적이고 능동적으로 표출된 것이며, 이는 동학농민혁명과 한말의병 그리고 3.1운동을 비롯한 항일투쟁의 계승이라는 깊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파악되어야 할 3.1독립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이었다. 

우리나라운동 거의 대부분은 서울에서 일어나 지방으로 확산됐지만, 광주학생항일독립운동은 광주에서 전국으로 더 멀리 해외까지 확산됐고, 윤봉길의사까지 연결된 항일독립운동으로 나라가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우국충정의 애국정신은 오늘날까지 민족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이 되어 이 나라 역사발전을 이끌어 오고 있는 것이다.

제91주년 광주학생항일독립운동기념을 맞아 뼈아픈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일본은 역사의 고비 고비마다 한 차례도 우호적이지 않았고, 현재 WTO사무총장선출에서도 반대세력에 위치해 있다. 앞으로도 극일은 우리민족의 사명일뿐 아니라 장재성선생을 비롯한 선열들에 대한 서훈으로 항일정신을 기려나가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