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제목이 ‘천관’이지만 천관산 일대에 한정한 내용이 아니며, 1960년에 개인이 사찬(私撰)형식으로 펴낸 <장흥군지> 일종이다. ‘편자, 천관지편찬위원회/발행자, 대덕남교장 김봉룡/주필, 정용채’로 ‘정가 1000환’으로 책정되었다.
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장흥군수 차세영(재직,1960,5,23~10,12)’을 비롯하여 ‘장흥군교육장,경찰서장, 지원장, 전남道문정과장’이 참여했다. <정묘지.1747> 이래 역대 <장흥읍지>의 전통을 승계한 공식책자는 아니나, 당시 車군수가 ‘집필자 정용채 교사’를 적극 후원한 것으로 짐작된다. 주필 정용채는 해남 옥천면 출신에 고졸 경찰경력자로서 남도일대 근무를 거쳐 대덕남교에서 봉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비록 외지인의 한계가 크게 드러남은 분명하지만, ‘1960년경 당시의 장흥지방 사정’을 나름 알려주고 있다. 옛 장흥부의 역사적 연혁에 관련된 ‘행정구역의 관할이속’은 언급하지 못한 반면에 그에게 가까운 대덕면 사정에 대해서는 더 상세한 소개를 하고 있다. 이하, <책자 전반부>를 소개한다.

1) 지세(地勢)편에 장흥산물로 거론한 “삼백(三白),이흑(二黑),일청(一靑)”은 ‘쌀, 무, 모시 (아니면, ‘무’ 대신에 ‘면화’일까?) /김, 흑콩(서리태)/ 대나무 정도 되었을까? “장흥평야는 전남 굴지의 미곡산지이다”고 말했다.

2) 자연환경으로 ‘탐진강, 내양강(금강), 용산천(남상천, 용강천, 여의천), 고읍천, 신월천, 분토천’ 등을 언급하였고 ‘예양강/ 용두천’은 나오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강우량이 가장 많은 지역”이라고 말하고 있다.

3) 원주민 동족부락으로 “상금,수원白/호계,청주金/학송,장흥馬/기동,장흥魏/우목,죽산安/조양, 진주鄭/수양, 수원白/우봉, 죽산安/건산, 죽산安”을 말했다. “건산리는 죽산 安씨215호, 타성626호”라 했다. ‘장흥魏, 영광金, 인천李, 남평文’ 집성촌을 더 언급하지 아니했는바, 토반들 집성촌 이해가 부족하였던 것 같다.

4) 1942,11,1에 장흥읍 승격이 있었고, 장흥군 인구는 11만2378명이라 했다. 1960년경 당시의 장흥읍면과 각 마을의 ‘인구통계’가 수록되어 있다. “본군에서 행하는 독특한 오락”으로 ‘당구’를 소개하면서 “읍은 물론이고 면소재지까지도 당구장 1~2개를 두고 있다”고 했고, ‘대덕 도청 기미년 독립운동’을 기록했다. 당시 “천 톤급 배가 오갔다”는 ‘장재(長財)항’은 ‘해창포’로 여겨지는데, ‘삼십포’에 대해 “군내 유일의 무역항으로 연3억원 물동량”으로 소개하였다.

5) 1960년경 장흥군 관내의 11개 섬으로 ‘우산도, 돌의도, 고마도, 장고도, 안양 구(龜)도, 장재도, 래덕도, 소회도, 죽도, 노력도, 대지(大知)도’를 나열했고, 1960년경 현존 사찰로는 ‘보림사, 신흥사, 천관사, 부용암’ 4곳만 나온다.

6) 인물 열전 편에서, ‘사환(仕宦)’으로 ‘정명진, 정분, 임의, 임원후, 마천목, 위문개, 백한남, 위계정, 이침, 문위세’등을, ‘충의(忠義)’로 ‘문원개,문기방,임발영,위덕의, 정명세, 김축, 문영개, 김응룡, 추수경, 정곤수, 문홍개, 위대기, 김윤명, 정경달, 고제홍, 김광철’등을, ‘도학문장(文章)’으로 ‘김장현, 위백규, 김윤,김화준, 정명열, 김학선, 추적’등을 소개하고 있는데, 기산 팔문장이나 ‘백광홍, 백광훈’도 나오지 않았다. ‘은일효열(孝烈)’로 ‘고석겸, 고후진, 김광범, 김상범, 김경추’등을 소개하고 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한참 부정확하며 미흡한 내용이다.

7) 고적(古蹟)으로 보림사 국보 등을 소개하면서 “보림사 3층 북탑은 6륜 보주”라 말했고, “보림사 西부도는 서로 2개가 마주보고 있다”고 했다.

8) 기타 석탑(石塔)으로 ‘장흥읍 축내리 전중(田中) 석탑’과 ‘용산면 불용암사 석탑’을 언급했다. ‘장흥읍 남문고개 모퉁이의 석불 미륵당’은 언급했으나, ‘동쪽 안양면 방향의 미륵사(미륵불)’에 대한 언급은 없다.
9) ‘사묘(祀廟)’로는 장흥의 서원서우와 더불어 1956년경 안중근 의사를 모신 ‘해동사’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설립 주도자 ‘안홍천’ 이름도 나온다.

10) ‘전각누정(樓亭)’편에서 지금의 예양걍 팔정자 중 ‘독취정, 창랑정’을 제외한 나머지 정자들과 ‘부산면 내안리 영춘재(永春齎)/수인산 병암의 송암정(松庵亭)’을 거명했다. 송암정은 ‘회은 위원량(1882~1945)’이 1943년경에 신축했다가 1964년경에 현 ‘경호정’으로 이건 되었다. 용산면의 ‘진수재,영석재,관수정,비정,낙영재‘를, 장평면의 ’영모정, 열락정’을 소개하였다.

11) 고분(古墳) 장소로 ‘사안리, 우목리, 신흥리’ 3곳을 거명했고, 기타 성지(城址) 유적지로 기존 여러 城과 함께 ‘안양면 불사산성 토루(土壘)’를 말했다.

12) ‘명승(名勝)’으로 장흥의 여러 큰 山과 함께 ‘수문포 해수욕장, 대덕 옹암, 회령진, 우산(牛山) 해수욕장, 수인산(수리봉, 천마봉, 노적봉), 장재도, 수대폭포, 남산공원, 삼십포, 남포’를 나열하였고, ‘천연기념물’로는 ‘대덕 양하리 철새(백학), 유치면 금사리 철새, 덕산 황새’, ‘수양리 소나무 임수(林藪)’를 말하였다.

13) 마지막으로 <내 고장(장흥군)모습지,天冠> 책자가 남긴 미덕으로는 ‘용산면 어산 금평나무(‘검팽’을 ‘금평’으로 표기한 것 같다, 푸조나무)’를 비롯하여 ‘1960년경 장흥군 노수(老樹), 거수(巨樹), 명목(名木)’ 등 목록을 일부 전설과 함께 기록한 점이다. 다만 ‘관산 당동의 효자송’은 나오지 아니했다. 일부 내용이 부정확하더라도 2020년경 현재의 수종, 수령 상태와 비교해 자료가 되겠다.

14) 기타 <장흥모습지 천관,1960>이 언급을 하지 아니한 부분이 있다. ‘장흥 별호/관산’과 ‘예양강’ 개념이 아예 없었다. ‘장흥 간척사업’과 ‘장흥 가마터’ 언급이 없다. ‘고읍 당동’도 따로 취급되지 않았다. 일제당국이 전통마을들을 병합한 명칭을 따로 등장시킨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예컨대 ‘고읍 옥당’은 ‘옥동, 당동’을 합하여 등장시킨 신흥마을(소재지)이다. 이 기회에 부언하면 ‘용산 금곡, 장흥읍 괘야, 우목, 장동 만수원’은 일제 창지(創地)지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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