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목마을 이청준 선생 생가

2008년 8월 2일
아침신문을 보다가 이청준 선생님의 부음을 들었다. 초등학생 두 딸과 아내에게는 자초지종을 설명하지 않고 드라이브 가자고 꼬드겼다. 여수에서 목포까지 3시간이니까 장흥까지도 넉넉잡아 그 정도 걸릴 거라 얼추 짐작했다. 오후 두시가 노제이니 시간은  충분했다. 여수 목포 간 국도를 따라 순천 벌교 보성을 거쳐 장흥으로 접어들고 장흥에서 왼쪽으로 천관산을 따라 도니 회진면이 나오고 회진면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돌아 선생님의 생가 앞 공터에 도착했다. 추모제 안내문과 근조리본 그리고 장흥별곡문학동인회의 “이청준 삶과 소설을 위한 향연” 책자를 받아들고 마을을 들어오는 입구 쪽에 주차해둔 내차에서 추모식장을 보았다. 영구차와 함께 선생님께서 고향마을로 돌아오시고 노제가 시작되었다. 살풀이굿이 약간 길었고 현직 시인이라던 군수님의 추도사와 한승원님의 추도사도 있었다.
노모에게 애써 빚진 게 없다고 스스로 되뇌던 선생님은 아마도 고향에 진 빚 때문에 평생을 빚을 진 자의 부담으로 살았을 거라 추측해 보았다. 이제는 영원히 고향으로 돌아와서 이승에서 못 갚은 빚을 편히 갚으실 것 같았다.
“고향은 나를 밖으로 내쫓고 나서 다시 또 언제나 그렇게 기다리고 앉아 맞아 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고향을 떠나고  다시 돌아옴의 순환,
그 속에서 나는 나의 소설들을 써왔다. 그러면서 매번 새로운 모습과 의미로 읽혀지는 그 무한정한 사랑의 秘意에 나는 차라리 진저리를 치곤했다. 내 소설은 내가 창작해냄이 아니라, 그 고향과 어머니의 비의에 조금씩 눈이 뜨여간 과정에 다름아니었을  뿐이거니” -이청준 외 / “고향과 나의 문학, 차마 그 고향이 꿈엔들 잊힐리야” 문이당 1991년

선생님의 소설 속에는 항상 고향의 정서와 남도의 恨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강하지 않은 그리고 군더더기 없는 담백한 문장으로 걸러낸,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한이 녹아 흐른다. 멀리 보이는 바다 갯벌이 광주 가는 길에 들고 갔던 게를 어머니와 잡던 곳이거니 생각했다.

1984년 4월3일
  내 나이 스물, 여수에서 올라간 서울은 참 낯설었다. 물이 그리웠다. 학교 캠퍼스 호수로 양이차지 않으면 20여분 거리의 뚝섬 고수부지로 가곤 했다. 그래도 용케 잘 버텻다. 용돈이 떨어져 갈 때쯤이면 보상심리라도 되는 양 책을 한권씩 샀다. 시골서 보내주는 용돈은 늘 부족했으나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다. 물론 가끔씩 DDD전화기 앞에 부끄럽게 서기도 했다.
그때는 아무 이유 없이 책을 읽곤 했다. 데모는 한창이었으나 나와 맞지 않는 것 같았고 평택과 김제에서 올라온 시골출신 친구들과 학교 앞 가게에서 막걸리도 조금 먹곤 했다.
이청준, 이문열, 문순태, 송기숙, 한수산, 최인훈, 조세희, 김홍신 등등 소설이 꽤나 재미있었다. 그 중에서도 이청준 선생님의 소설은 대단했다. 행간에 스며있는 남도의 한을 본인의 정제된 언어로 쉽게, 부드럽게, 잔잔하게 풀어내곤 했다. 객지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나에게는 큰 위안이고 위로였다. “눈길”, “별을 보여드립니다!”. “난파선”, “가면의 꿈” 등등. 소설을 일는 동안에는 객지살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잊을 수 있었다. 다른 소설가에 비해 이청준 선생님 소설은 항상 따뜻했다. 나약한 인간에 대한 연민, 불완전한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과 존중, 인간 삶에 대한 신뢰, 그리고 가난에 대한 상처와 승화 등등. 소설을 다 읽는 것이 아까워 일부러 서서히 읽기도 했었다. 이청준 소설을 처음 만난 1984년 4월 3일 이후 사는 동안 내내 내 마음속에는 이청준 선생님의 부드러운 언어가 항상 흐르고 있고 나에게 위로와 위안을 주고 있다.

2020년 9월4일
올해 초에 30여년 직장생활을 마무리하고 쉬는 동안, 항상 가보고 싶은 곳으로 마음에 남아있던 장흥을 가보리라 하고 집을 나섰다. 세상이 좋아져서 핸드폰 길안내를 켜니 남해고속도로를 통해 이청준 선생님 생가까지 상세한 경로안내와 함께 125키로미터 1시간48분소요라고 알려준다. 3시간이 넘던 곳이 1시간대로 줄어들었음을 실감하고 우리의 삶도 그렇게 짧아진 시간만큼 풍요로워 졌는지 생각도 해보았다.
회진중학교 조금 지나 회진항과 회진읍내가 보이는 곳에 잠시 멈추었다.
아마도 아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훌쩍 실어 담고 가버린 버스를 원망하며 혼자 돌아가는 길에 잠시 쉬면서 회진포구를 바라보았을 어머니를 생각하며 나도 회진 바다를 잠시 바라보았다.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너하고  나하고 둘이 온 길을 이제는 이 몹쓸 늙은 것 혼자서 너를 보내고 돌아가고 있구나! 내 자석아, 내 자석아, 어디를 떠돌든 부디 몸이나 성하게 지내거라. 부디부디 너라도 좋은 운 타서 복 받고 살거라..... ” 이청준 / 눈길
진목마을 공터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이청준 선생님 생가로 향했다. 지난 바람에 입구 골목길에는 덜 익은 똘감이 떨어져 있었다.
생가를 둘러보고 시골집 마루에 앉아 대문을 바라보며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다. 장독대, 배나무,  그 아래 떨어진 배 몇 개가 이청준 선생님의 글처럼 소박하고 담백하게 마당을 채우고 있었다. 이청준 선생님은 살아생전 고향을 “언젠가 내가 마지막으로 돌아가 내 삶과 문학 모두를 의지해야 할 歸依地,  내 영혼의 성지”라고 했다. 생가를 돌아보며 이청준 선생님이 오래 살아서 연륜 속에 묻어나는 남도의 한과 맛깔스런 삶의 의미들을 문장으로 남겨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청준 문학자리 초입에서 바라본 덕촌 간척지 들 너머의 바다는 쪽빛이었다. 이곳이 이청준 선생님의 묘지가 아니라 선생님의 집필실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노작가의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메시지가 그리웠다. 커다랗게 놓여있는 바위는 진실하고 진중한 인품을 지니신 선생님의 이미지와 닮았다고 느껴졌다.
“여자는 그저 아무 때고 하고 싶은 때에 소리를 하는 게 아니었다. 여자의 소리는 언제나 포구 밖 바다에 밀물이 들어오는 때를 맞추고 있었다. 그것도 마치 성한 눈을 지닌 사람이 바닷물이 차오르는 포구를 내려다보듯 한 눈길로 반드시 마루께로 자리를 나앉아 잡고서였다” - 이청준 / 仙鶴洞 나그네

선학동 주막 마루에 앉아 탱자섬과 노력도, 회진대교를 앞에 두고 포구에 물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혹여 나도 마음으로 볼 수 있을지 몰라서 눈을 감고 한참동안이나 마루에 앉아 있어보았다. 눈 먼 소리꾼 여자가 마음의 시선으로 보았다는 광경, 포구에 물이 차오르고, 건너편 관음봉이 물위로 내려와서 한 마리 학으로 날아오르는 광경. 나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살아온 세월의 풍상에 녹슬어서 마음의 눈은 이미 시력을 잃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가셨어도 선생님의 문장은 영원히 뭇 사람들의 가슴에 살아 숨 쉬고 있으며, 선생님의 향기는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아쉽고 또 아쉬운 것은 선생님이 너무 일찍 가셔서 나이 들수록 짙어가는 농익은 향기가 밴 선생님의 글 들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또 삶에 지치고 마음이 복잡할 때 아무런 계획 없이 그냥 또 찾아오리라 다짐하며 회진을 지나 천관산을 돌아 나왔다.

▲이청준 문학자리 초입에서 바라본 덕촌 간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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