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장흥 先人들과 ‘족보자료관’예강칼럼(135)/박형상/변호사
관리자  |  ch2300@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20.10.16  10:11:28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1. 창녕인 “曺수(修,隨,璲,琇)”와 “曺휴(休)” - 지난 칼럼에 언급한, 조선초 인물 ‘창녕曺씨 曺수(修, 隨, 璲)’는 그 집안족보에 “曺休(一云 曺琇), 官 좌랑, 묘소-부평방 일월谷 有표석”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니 ‘曺휴(休)’와 ‘曺수(修,隨,璲,琇)’는 같은 인물이었다. (‘休’를 ‘수’로 읽었다는 견해도 있다) ‘조정’과 ‘조정통’은 항렬차 있는 선후인물이었다. 아직도 궁금한 장흥先人들이 있음은 물론이다. <정묘지 웅치방>에 묻힌 ‘魏장군 묘’는 누구이며, ‘영천 신잠’이 <관산록>에서 요절(夭折)을 애통하게 여긴 제자 ‘김옥강(玉剛)’은 어느 집안일까? 정유재란 때 이순신을 도운 ‘조선감 김세호(世浩)’는 김해김씨, 어느 마을 출신이었을까? 이에 제언한다. <정묘지>에 기록된 ‘장흥 토성’과 ‘22개 이래(移來)성’을 포함한 40여성 족보를 비치한 <족보자료관>을 마련하면 어떠할까? 옛 시절 향토인물의 생몰년, 묘소위치를 통한 지명유래, 당대혼맥에 실린 집안교류, 장흥선비들 문집내용 등을 짐작할 수 있다. <정묘지>등 장흥읍지에 <집안족보>를 보충한다면 더 신선한 사실과 사연, 당대 사회상을 알 수 있을 것.

2. “영천 申잠”이 말한 “分派自吾宗(분파자오종)” - 1521년 장흥유배객 ‘申잠(1491~1554)’은 유배초기에 장흥사람 ‘조보(曺輔)’에게 “分派自吾宗”이라 말하였다. ‘申잠’의 <관산록>에 조보(曺輔)’ 신원 언급은 없는데, <창녕曺씨 족보>에 을묘년(1504) 진사로, ‘부 조석견, 조부 조여해’의 자손이었다. 낯선 땅에서 아직은 불안하던 차, ‘고령申씨 申잠’은 그 말벗 ‘창녕조씨 曺輔’에게 읊었다.

“輔之見烏次(보지견오차) / 장흥 땅에서 ‘曺輔’를 만났는데,
分派自吾宗(분파자오종) / 우리 ‘고령’에서 나온 분파로구나.”
도대체 무슨 뜻인가? 창녕曺씨와 고령申씨 간에 무슨 역사적 인연이 있었다는 말인가? 그 <曺輔 집안족보>를 보고서야 비로소 알았다. 그 ‘曺輔’의 母親이 마침 ‘申잠’의 ‘고령 申氏’이기에 “曺보, 당신은 고령 申씨에서 나온 고령 분파 아니냐?”는 우스개 표현을 하였던 것. 장흥읍 평화리 후등 포치(蒲峙)에는 曺輔와 선대 묘소들이 지금도 모셔져 있다. <관산록>에 등장한 ‘梁진사(제주), 卞진사(초계), 朴진사(진원)’는 <정묘지> 또는 그 <집안 족보>로 확인되고 있다.

3. <청강유고, 이승(李昇)>에 실린 “만시 2편, <名缺>”은 누구인가?
1) 挽金公 <名缺> - “이름은 알 수 없다.”
無愁村近菟裘洞 / ‘무수村’ 가까이에 ‘토구(菟裘)洞’ 있어
匹馬曾鼓松竹門 / 필마로 일찍이 ‘松竹문’을 두드렸다네
美酒佳肴惟記憶 / ‘미주가효’ 잔치를 아직도 기억하는데
不堪斜日送殘魂 / 석양에 지는 혼백 차마 감당 못하겠네.

-“金公”은 누구인가? ‘송천 김응규(1542~1620)’로 ‘오우당 김응원(1569~
1638)’의 형으로 짐작된다. ‘무수(無愁)촌, 무수(舞袖)산’은 ‘무쇠촌, 수철(水鐵)점’에서 유래한 것으로, 옛 부서방 평장리 김안마을, 옛 ‘토구동’ 부근에 있다. 경주김씨 김희련(1510~1573)의 아들 ‘김응규, 김응원’ 형제는 정유재란 때에 왜구를 퇴각시킨 ‘각왜동’ 일화로 알려져 있다. ‘도고동’은 ‘토구동’을 순화시킨 명칭. 시문에 나온 松竹은 ‘오우당 김응원’의 ‘五友’에도 들어간다. 경주金씨 선영이 마침 용산(남면) 운주동이라 ‘청강 李승(1556~1628)’은 더 알았을 것.

2) 挽魏公<名缺> - “이름은 알 수 없다.”
三丙辰生一戊午 / 세 사람은 병진생, 한 사람은 무오생으로
四人心只一人心 / 네 사람 마음 오직 한 사람 마음이었네
三人已去一人在 / 세 사람은 벌써 떠나고 한 사람만 남으니
每憶平生淚不禁 / 항상 그리워하며 평생 눈물 금치 못하네. (역 이병혁)

-“魏公”은 누구인가? ‘3丙辰(1556)生’에 ‘1戊午(1558)生’이 모였다. 같은 용산 하금의 1556년생, ‘인천李씨 李승, 영광金씨 金여중’이야 바로 짐작된다. ‘청강 李승(1556~1628)’은 1606년 진사이고, ‘헌헌헌 金여중(1556,6~1630)’은 1591년 진사였다. 그러나 정작 ‘李승’은 위 輓詩 작자에 무관할 것 같다. “세 사람은 이미 가고, 이제 한 사람만 남았다”는 사정은 그 마지막 생존자가 언급할 수 있는데, ‘金여중’이 ‘李승’보다 오래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金여중’이 쓴 輓詩가 그만 ‘李승’의 <청강유고>에 실린 것은 아닐까? 위 詩題의 ‘魏公’은 ‘魏덕후(1556~1605)’일 것 같다. 다른 丙辰생으로 ‘동애 안중묵(1556~1607)’과 1589년 진사 ‘칠원윤씨 윤회(1556~?)’가 있다. 그렇다면 ‘남은 戊午생 1인’은 누구인가? 역시 첫 조건은 ‘金여중’보다 먼저 타계해야 한다.
그러니 ‘魏정망(1558~?), 魏홍주(1558~1634)’는 아니다. 魏덕홍의 아들 魏정망은 1591년 생원으로 1636년과 1644년 생존기록이 남아있다. 그 4인 모임에 항렬차 있는 ‘魏씨 족숙’이 참여함도 부자연스럽다. 그 一人心, ‘戊午생 1인’은 누구인가?

3) ‘헌헌헌 金여중’이 기린, ‘반세정친(情親) 李승’을 위한 輓詩
一里東西共卜隣 /한 마을에 동쪽 서쪽 함께 터 잡고, 追歡半世信情親 /즐거운 반생 참으로 믿은 ‘정친’이었네不將雲雨隨時態 /무상한 구름비 같은 세태 따르지 않고相許金蘭契我眞 /서로 ‘금란’을 허락하며 진심을 맺었네
儀表忽驚長入夢 /본보기 되던 분 홀연 놀랍게 돌아가시니屋樑那忍每傷神 /달빛 아래 들보에서 어찌 차마 슬퍼할까門란賴有諸孤在 /문 난간 의지해 여러 아들 남았으니時復摩사慰故人 /때로 다시 어루만져 ‘고인’ 위로하려네. (역, 이병혁)

관리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가장 많이 본 기사
여백
여백
여백
여백
톱기사
여백
중요기사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주)장흥신문  |  전남 장흥군 장흥읍 건산리 470-1  |  농협 657-01-073148(장흥신문)  |  문의전화 061-864-3721  |  청소년보호책임자 최정옥
Copyright © 2013 (주)장흥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