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말 - 지난 6월경에 <천관산, 홍순석>이 출간되고, 8월경에 천관산이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지정예고가 되었다. 그간에도 ‘천관산 시문집’ 시도가 있었는데, 우선 ‘천관산=관산’과 ‘장흥=관산’부터 분별하면 좋겠다. 그 시대적 순서로 배열하더라도 방문 시문객 처지에 따라, 예컨대 ‘장흥현지 선비, 인근지역 선비, 소과대과 급제자, 현직관료, 스님, 유배객, 유람여행객, 명망가, 단체유람, 산행기문’ 등 관점에서 분류해 보면 어떠할까? 또한 천관산 산림풍광과 사찰암자의 흥망성쇠에 대응하면 더 좋을 듯. 특히 ‘구룡봉, 태고송, 포봉, 금수굴, 의상암, 탑산암, 천관사’ 등은 더 챙겨볼 수 있겠다. 의상암에는 화엄종 ‘부석존자(의상)’와 ‘진감국사 혜심(1178~1234)’의 사연도 전해진다. 또 천관산과 월출산을 비교하는 시각에도 유념해 볼 필요가 있고, ‘구룡봉, 구정봉’에 관하여 월출산과 혼동해서는 아니 될 일, 불교용어 탑(塔)에서 유래한 ‘지제산’은 대부분은 ‘천관산’을 가리키나 때로는 ‘월출산’도 지칭했다. 한편 ‘이중환(1690~1752)’은 <택리지>에 비록 ‘천관산’을 언급하였어도, 전라도 땅에 직접 온 일이 없다. 천관(天冠)산에 ‘김유신 천관(天官)녀’를 결부시킴은 무도한 억단일 뿐이며, ‘장흥 天冠寺’와 ‘경주 天官寺’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2. “불영암, 불영대”와 원감(圓鑑)국사(1226~1293) - <천관산> 시문집을 보면, ‘불영암, 불영대’에 ‘圓鑑 또는 魏장원’이 등장함에도 아무런 설명이 없으나, 거기에서 왜 ‘圓鑑국사(魏장원)’가 나오는 것일까?
장육재 문덕구(1667~1718)ㆍ는 ‘천풍산 長詩(1707)’에서 “멀리 魏장원을 생각한다(遼憶魏장원)”고 했고, 같은 시대 위세보(1669~1707)는 ‘訪불영암’에 “언전(諺傳)에 圓鑑 소거처였다.(언전圓鑑소거,訪유거)”고 했다.
위영우(1786~1857)는 ‘詩불영臺’에서 “圓鑑은 이미 적멸가로 돌아갔네(圓鑑기귀寂滅邊)”라 했으며, 존재 위백규의 아들 위도급(1754~1821)은 ‘불영臺’에서 “명승이 머문 때가 언제인가(名僧래주知何日)”라 했다. 근대인물 양회갑(1884~1961)은 ‘登천관산’에서 “圓鑑국사 빈터만 이제 있고(圓鑑금기허)”라 했다. 이런 시구들을 합쳐보면, ‘불영암, 불영대’와 圓鑑국사의 인연은 뭔가 객관적으로 상당해 보인다. 그렇다면 다른 근거는 없는가? 마침 <지제지, 위백규, 1779>의 ‘불영대’에서 그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불영대> “(중략) 諺傳 高麗時 圓鑑國師名沖止 住錫於此 出家前有女子畜於菴 故爲此夾房及小庭 侍中金周鼎以湖南按使 訪師至此菴 見軒外女鞋 與師相희問答云 圓鑑是此邑人諺固不異但放. 宓庵集無一言 及於天冠山 與佛影臺者 殊可괴菴空久 英宗戊子年間훼 ”/“속설(諺傳)에 의하면, 고려 원감국사 충지는 여기서 주석(住錫)했고, 출가전 여자를 암자에 머물게 하였으며, 이에 협방(夾房)과 소정(小庭)이 있었다. 시중 김주정(金周鼎)이 호남안찰사로서 국사(師)를 방문함에 집바깥(軒外)에 놓인 여자신(鞋)을 본데서 상희(相戱)하는 문답을 했다. 圓鑑의 이런 모습에도 고을사람들은 ‘불이(不異)하다’고 여기고, 그냥 받아들였다. <복암집>에는 ‘천관산’ 언급이 일절 없으며, ‘불영대’는 매우 기괴하게 오랫동안 비워 있다가 영종 무자년(1768)에 소훼되었다,”

존재 위백규(1727~1798)가 <지제지 원본>에 圓鑑의 행적을 언전(諺傳)형식으로 명기했음에도 후대의 <지제지 국역본>은 아예 묵살해 버렸던 것인데, 앞서 소개한 ‘불영암, 불영대, 천관산’ 시문의 작자들은 ‘圓鑑국사, 魏장원’의 관련성을 따로 언급하였던 것. 한편 장흥의 평생처사 ‘청사 노명선(1587~1655)’의 가사 ‘천풍歌’에는 빠져있는 반면에 문과급제자 ‘문덕구(1667~1718)’는 유교적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지적했다. 장흥府 수녕현 출신 ‘魏원개(1226~1293)’는 ‘법명(충지/법환), 자호 복암(宓菴), 탑호 보명, 시호 圓鑑‘으로 1244년(19세) 장원급제에 1254년(29세)에 출가하였다. 그러니 출가 전에 혼인했을 속처(俗妻)가 ‘불영암’에 비구니로 머물 만도 했을 것. <원감국사집> 시문에 1284년 5월경에 圓鑑과 ‘김주정(金周鼎,?~1290’)의 회합이 불발된 사정과 ‘김주정’이 제형(提刑) 안찰업무를 맡던 사정도 나오고 있으니, 앞서 <지제지, 불영대>에 등장한 ‘호남안찰사 김주정’이 ‘천관산 圓鑑’을 방문했을 개연성이 높다. (圓鑑은 1244년 장원, 김주정은 1266년 장원이다) 또 <신증>에 기록된 고려 명환으로 1274년경 장흥부사로 동정전함 건조감독을 했던 ‘윤해(尹諧,1231~1307)’도 <원감국사집>에 등장한다. <정묘지, 부내방>에는 ‘魏원개, 魏문개’ 형제의 장원급제에서 ‘장원봉’이 유래한 사정(一家生得 二龍頭)이 기록되어 있고, <정묘지, 부산방>은 병풍암 불상을 두고 ‘언칭(諺稱) 圓鑑국사 승방(僧方)’이라 했는데, ‘마애불 좌상’ 논란이 있다. 또한 圓鑑국사가 장흥 부산방에 있던 ‘금장사(金藏寺)’의 대선사(大禪師)가 보내온 신차(新茶)에 감사를 표한 “謝금장대선惠新茶”라는 詩도 있다. 1286년에 송광사 6세국사가 된 圓鑑국사는 평생 고난의 시절을 살았다, ‘몽골침입(1231), 삼별초 난(1270), 일본1차동정(1274), 2차동정(1281)’ 등 여러 국난을 거치면서 한편으로는 기층농민의 고초에 가슴 아파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축군호국(祝君護國)의 자세를 견지하며, 송광사(수선사) 보전을 책임져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면, “장원급제자 圓鑑은 왜 출가하였을까”라는 질문이 남는다. 개인적 결단으로 보는 견해와 그 부친 ‘魏소’가 유배를 당한 어려움에서 찾는 견해도 있는데, 최씨 무신정권 시대의 무도함과 암울함에 실망한 문과급제자 관료들이 속세를 등지고 출가하는 경우는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圓鑑국사의 ‘천관산 불영암, 불영대’ 시절과 상황 역시 우리들이 대면 직시해야 할, 장흥의 문화적 콘텐츠요, 역사적 자산에 해당할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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