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고
고향의 샘고병균(高秉均)/시인,수필가
관리자  |  ch2300@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20.09.10  17:30:25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1946년 장흥출생
-전직 초등학교 교장
-계간 공무원문학 수필 등단(2006년)
-월간 한비문학 수필 등단(2015)
-계간 동산문학 시 등단(2016)

나의 고향 평화 마을에는 공동 샘이 셋 있다. 집안에 우물이 있는 고영완 가옥을 비롯해서 해리 할아버지 댁과 우리 집 말고는 모두 공동우물을 이용했다. 그 샘의 물은 하나 같이 시원하고 수량도 풍부했다. 이들 샘은 편의상 제1호 샘, 제2호 샘, 제3호 샘으로 구별한다.
제1호 샘은 내가 태어난 집 입구에 있는 ‘아래샘’이이다. 길보다 약간 낮은 위치에 있는 사각형 모양의 샘이다. 이 샘물은 바로 위쪽에 사신 지동할아버지와 건너몰 사람들이 이용했다.
당시 여자들의 일상은 물 긷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물동이를 샘의 턱 위에 올려놓고 바가지로 물을 떠서 찰방찰방할 정도로 채운다. 그 위에 바가지를 엎었다. 이고 가는 동안 물이 출렁거리는 것을 막으려는 옛날 어른들의 지혜이다.
그 다음에는 똬리를 머리에 얹고 거기에 달린 끈을 이빨로 문다. 그리고는 물동이를 들어 머리에 얹었다. 이 과정에서 기술이 필요하다. 똬리가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아야 하고 물동이가 안정되게 놓여야 한다.
숙달된 누나들은 물동이를 잡지 않고도 걸어간다. 그러나 어린 소녀들은 가끔 물을 흘렸다. 우물에서 계단으로 올라설 때, 징검다리를 건널 때, 부엌의 문지방을 넘을 때 촐랑거리는 물을 감당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면 옷을 적시고 얼굴에도 물방울이 떨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고개를 숙일 수 없다. 
언젠가 마을 어른들이 이 샘물을 퍼냈다. 뱀이 지나갔다는 게 그 이유다. 샘물이 오염되면 마을 사람 전체에게 피해가 간다.
제2호 샘은 장성 할아버지 댁 바로 아래 있는 ‘윗샘’이다. 이 샘물은 도랑 건너편에 사신 아천 할아버지와 근방의 사람들이 이용했다.
이 샘물은 수질이 좋고 수량도 풍부해서 수년 전까지만 해도 장흥읍내에 있는 식당의 사장님들이 많이 이용했다. ‘성산약수’라는 표지석이 군민회관 앞 도로변에 있다.
제3호 샘은 내가 태어난 집의 뒤쪽에 있는 ‘가운데샘’이다. 마을로 들어오면 오른쪽으로 골목길이 있다. 그 길의 양편으로 깎아지른 언덕이 있는데 좁아서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없다. 그 언덕 위에는 200년 이상 된 팽나무가 마주 보고 길게 늘어서 있어서 낮에도 들어가기에 겁이 날 정도이다.
이 샘 근처에 살던 종운이 아제는, 여름날이면 샘터로 간다. 바가지로 물을 떠서 몇 번만 끼얹어도 열대야는 저만치 달아난다.
이 샘물은 수위가 높기 때문에 호수만 연결하면 별다른 장치 없이 물을 길어다 쓸 수 있다. 그 호수를 집에까지 연결하여 편리하게 사용한 분이 있었다. 지금은 이 샘의 주변에서 사는 사람이 없다.
고향 마을 주변에는 옹달샘도 두 개 있었다. 그 하나는 ‘서당샘’이다 옛날 이곳에 서당이 있었다고 하여 그 근방의 밭을 ‘서당등’이라 불렀다, 이 샘은 밭의 가장자리에 있었다. 앞 쪽에 돌이 쌓여 오목한 형태였는데 한 사람이 들어가면 딱 맞는 구조였다. 이 물은 어찌니 시원한지 밭에 일하러 가시는 할머니를 따라가서는 물도 한 모금 마시고 이마의 땀띠를 식히려고 세수도 자주 했었다.
또 다른 옹달샘은 ‘정재나캐’라는 쉼터의 주변에 있었다. 그곳에는 그늘을 만들어주는 느티나무가 세 그루 서 있고, 그 아래 커다란 바위가 널려 있었다. 지나가는 나그네나 나무꾼들이 이곳에서 땀을 식히기도 하고, 위쪽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목을 축이기도 했다. 바위에 앉으면 장흥읍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계절에 따라 다양한 색깔을 연출하는 한들과 탐진강의 풍경이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이들 옹달샘은 평화 마을에서 용산면 원등 나의 진외가로 가는 억불산 산길의 초입에 있었다. 10여 년 전, 억불산에 천문대가 들어서면서 도로가 개설되고, 이들 옹달샘은 약수터로 개발되었다. 당국에서 수시로 수질 검사를 실시하기 때문에 지역의 사람들은 물론 외지인들도 안심하고 이용한다.
고향의 샘은 나의 아버지와 그 윗대의 할아버지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생명의 젖줄이었다.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비가 많이 내려도 넘치는 일 없는 천연 약수였다. 이렇듯 물이 풍부한 곳을 장흥 고씨의 세거지(世居地)로 삼으신 분은 나의 9대조 고석겸이시다. 연자시의 저자 만거 선조의 아들이다.
지금도 거기에서는 생수가 솟고 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이 샘물을 사용하지 않는다. 상수도가 가정의 부엌에까지 연결된 이후로 그런다. ‘성산약수’로 소문난 제2호 샘 ‘윗샘’마저도 물을 뜨러 오는 분이 없다.
내가 고향에 갈 때마다 제1샘인 ‘아래샘’ 옆을 지나간다. 그 샘의 가장자리에 대나무의 마른 잎이 수북이 쌓여 있다. 그래도 검정 치마에 하얀 저고리를 입은 누나들이 물동이를 이고 가던 모습 키 작은 누나들이 주전자를 들고 가던 모습이 정겨운 추억으로 되살아난다. 활동사진을 보는 것처럼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진다.
 

관리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가장 많이 본 기사
여백
여백
여백
톱기사
여백
중요기사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주)장흥신문  |  전남 장흥군 장흥읍 건산리 470-1  |  농협 657-01-073148(장흥신문)  |  문의전화 061-864-3721  |  청소년보호책임자 최정옥
Copyright © 2013 (주)장흥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