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534년 경사 - ‘대과2명, 소과4명’이 배출된 중종29년에 장흥문풍(文風)은 크게 진작되었다할 것. 그해 ‘퇴계 이황(1501~1570)’도 대과 을과1위로 급제했다. 그 갑오년 이전엔 송흠(1459~1547)등 몇 문관출신 장흥부사들이 있었지만, 장흥선비의 과거진출은 미미했으며, 영광김씨 급제자들이 있었어도, 그들은 이미 서울에서 입지했던 낙남가문이었다. 그 무렵 역시 입신양명의 ‘과거지학(科擧之學)’으로 학문과 철학을 겸행하던 시절이었다. 16세기 초 이래 소과2인 배출에 불과하였는데, 1521년 겨울 ‘영천 신잠(1491~1554)’이 장흥유배를 왔으며, 1531년 진사1인 입격을 거쳐, 드디어 1534년에 ‘대과2인, 소과4인’을 배출하였다. 바로 그 1534년에 소과입격을 하고서 처사로 은둔한 ‘천방 유호인’을 두고 ‘장흥 고문학(한문학) 선구자’로 칭하는 일부 의견이 있는데, 그 천방선생의 ‘생존기(1502~1584)’에 대응하여 장흥선비들의 과거진출 현황을 살펴본다. 과연 천방선생 활동 이전에는 이른바 장흥고문학(한문학)이 ‘절맥(絶脈)’ 또는 황무지 상태였을까? 천방선생과 사제인연이 없던, 더 많은 장흥선비들은 이른바 고문학(한문학)에 무지했으며, 한시(漢詩)에 문맹수준이었을까?

2. 그 시절 선비들 - 1504(소)변대손/1510(소)양억주/-1519년 기묘사화 /1521, 영천 신잠(1491~1554) 장흥유배 /1525 정해군 백수장(1469~1543)은퇴 /1526 장흥府교관 ‘김기’ 부임(~1529)/1531(소)김삼택/*1534년에 ‘대과2명, 소과4명’배출. <대과2인>-김삼택, 갑과3위,영암김씨(1531진사)/김협, 을과6위, 광산김씨 <소과4인>-유호인(1502~1584),임회(1508~1573),김희련(1510~1564),김삼달(생몰?)/-1537년 ‘신잠’해배/1540(대)임회(1508~1573),1540(소)임분(1501~1556),(소)김응권/1543(대)김삼달/1546(소과양시)임희중(1492~),보성이거/1549(소과양시)백광홍(1522~1556),(소)위곤(1515~1582)/1552(대)백광홍,(대)김응권,1552(소)최해,(소)최붕/-1555년 ‘을묘왜변’/1555(소)김귀명(1517~1555),위대용(1530~1610),(소)김정(1527~1613)/1561(소)백광성ㆍ(1527~1593)/1564(소)백광훈(1537~1584), (소)김공희(1540~1604),(소)이만춘(1530~)/1567(소)문위세(1534~1600),(소)조여흠(1549~1579)/1568(소)임발영(1539~1593)/1570(대)정경달(1542~1602),1570(소)김윤(1506~1571),(소)정명세(1550~1593)/1573(대)위천우(1537~),1573(소)김삼로,(소)위덕의(1540~1613)/1576(소)문희개(1550~1610)/1579(대)정명세/1580(대)김공희/1584년 ‘천방선생’ 타계(같은 해에 ‘율곡 이이(1536~1584)’도 타계하였다)

3. 문풍 배경 - 1534년을 고비로 장흥에서 과거진출은 하나의 흐름이 되었다. 안양 8문장 시대로 연결된 장흥문풍의 흥기(興起)에 어떤 배경이 있었을까?
첫째, 무엇보다 장흥지역의 문화적 자생력과 자존의식 증대일 것. 조선개국 140년 남짓이니 부사(府使)고을의 지역토대가 튼실해진 것. 장흥향교는 이미 1398년에 생겼다. 낙남가문이든 외래가문이든 사회적 생산역량이 안정화되었을 것.
둘째, 1521년부터 장흥유배기 17년을 지냈던 '영천 신잠'의 기여도가 각별했던 것. 고령申씨 신숙주 증손에 ‘진사시 장원, 기묘시(현량과) 급제자’로, 기묘명현 그룹에 속하였고, 부친 ‘삼괴당 신종호(1456
~1497)’는 ‘소,대과,문과중시’ 三槐(삼괴) 장원의 엘리트였다. ‘신잠’의 <관산록>에는, 그가 장흥府의 사실상 교관을 겸하면서, 장흥유생 제자들을 가르치는 장면과 호남의 당대명망가들, 기묘명현 유배객들과 어울리는 보림사 서계(西溪) 시회(詩會) 장면이 나온다. <정묘지> 등 기록에 잡히는, ‘신잠’의 장흥제자들은 ‘대과-김희련, 백광홍, 임회/ 소과-김윤, 임분’ 등이다. 나아가, ‘(대)백광홍’의 동생이 ‘(소)백광훈’, 사촌동생이 ‘(소)백광성’이고, ‘(소)김윤’의 아들이 ‘(대)김공희’, ‘(소)임분’의 동생이 ‘(대)임회’이니. 가히 안양 8문장은 ‘신잠’ 문맥이었다. 그 은덕에 보답하여 예양강변 ‘신잠祠’에 그를 모셨던 것.
셋째 <정묘지>가 ‘향선생(鄕先生), 향당사종(鄕黨師宗)’으로 천명한 ‘천방 유호인’ 평생처사 역할도 컸을 것. 그 제자로 ‘위덕의, 정경달, 문희개’ 등이 거명된다. 훗날 1612년에 ‘정명열(1566~1627),이승(1556~1628), 위정훈(1578~1662)’ 등 장흥후학들은 ‘영천 신잠을 주벽(主壁), 천방선생을 배향(配享)’으로 모시는 ‘사우당(祠宇堂)’ 건립을 논의했다.

4. 평가 - 어떤 선현의 공과(功過) 평가에는 당대사회의 시대적 배경과 추세를 이해하여야 한다. 벌써 16세기 중후반의 장흥지방이면 어느 누구라도 이른바 ‘고문학(한문학) 선구자, 성리학 비조’를 자임 감당할만한 상황은 지났다. 230년 후에 비로소 간행된 천방유집 한권, 행장기록, 일부학맥에 의지해본들 그런 호칭이 독점될 여건이 아닌 것. 그런 식의 단편적 평가보다는, “왜 장흥선학들이 ‘외지유배객 신잠’을 당시 ‘신잠祠,사우당’ 主壁으로 모셨는지”를 이해하여야 한다. 장흥제자들을 키운 천방선생의 교육공덕을 더 평가한다한들 <정묘지>가 칭한 ‘향선생(鄕先生),향당사종(鄕黨師宗)’과 그 논자가 인용한 ‘사표(師表)’ 호칭이 너무 합당해 보인다. 이른바 ‘성리학 비조(鼻祖)’ 표현도 그렇다, 무슨 ‘성리학 저서’ 한권 온전히 전하지 못한 마당에 단편적 전문(傳聞)과 후대 소문을 인용하여 바로 ‘비조’ 타령을 할 수 없을 일. 그럼에도 ‘고문학(한문학) 선구자, 성리학 비조’에 관심이 여전하다면 그 실제적 1차 자료를 제시하면서 학문적 논증과 설득을 계속 하시길 당부 드린다. 금일에 이르러 ‘최고, 최다, 최초, 최대, 본향, 원조, 시조, 비조, 선구자, 영웅’ 등 난무하는 최상급적 표현에 접하노라면, ‘정명(正名), 과공비례(過恭非禮)’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군자불기(君子不器)’라 하는데, 왜 평생처사 천방선생을 어떤 특별한 그릇에 가두려 하고, 어떤 딱지만 부치려 하는가? 너무 지나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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