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천박한 도시 - 민주당 대표가 한강변 고가아파트에 관하여 ‘천박한 도시’라 언급할 때, 대부분 논자들은 정치인의 천박한 말투라 비판하였다. 집권여당의 부동산정책 잘못을 호도하려 서울을 ‘천박한 도시’로 매도한 것이라고 맹공격했다. “고가 아파트를 원하는 자본주의적 욕망이 왜 천박하냐?”는 반문이었다. 그렇다고 서울을 ‘품격의 도시’로 불러야 합당하다는 식의 반론은 없었다. 그렇다면 ‘천박하다’를 대체할 표현은 없는가? ‘오만, 허영, 괴물, 수직, 황금, 비정(非情), 회색, 위선, 계층, 공범, 벌집’ 등 어떤 수사도 마땅치 않아 보인다.

2. 잔인한 도시 - 이청준의 소설에 <잔인한 도시>가 있다. 표면적으로는 교도소 앞 공원에서 일어난 가을 풍경을 그렸으나, 기실 그 교도소 안팎은 정분(情分)이 단절되고 소외(疎外)가 구조화된 대도시 전체를 암시한 것이리라. 도무지 출소하기 힘든 곳에서 막 출소한, 야전잠바를 입은 사내 주인공이 동료재소자를 위로하러 교도소 앞 ‘방생(放生)의 집’에서 새를 사서 방생하지만, 그 방생한 새들이 멀리 날지 못하도록 날개깃을 잘라놓은 새집 주인 젊은이가 밤이면 전짓불을 비춰대며 공원 숲에서 새들을 회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챈 사내는 분노의 불길을 가라앉히고 따뜻한 남쪽 길로 떠난다. 제2회 이상 문학상(1978년)을 수상한 후 40년이 더 지났다. 이청준은 그때 ‘정분이 없어지고, 날개를 파는, 전짓불로 쏘아대는, 가족이 없어진 세상’에 있는 ‘도시의 겨울추위’를 말했다. 그리하여 남쪽으로 하얗게 뻗어 나간, 신작로를 사내 주인공이 ‘빗새’와 함께 동행 하는 장면으로 소설을 마감했다. 남쪽 동네 따뜻한 곳, 뒷밭이 넓고 뒤쪽에 겨울에도 대숲이 푸른 곳, 탱자나무 울타리와 붉은 색 벽돌 굴뚝이 높은 집이 있는 남쪽 고향으로 떠나갔다. 아마 둥지가 없었던 ‘빗새’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줄 나무를 찾아가는 길이었을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찾아가는 남쪽 동네란다. 생각보다 그렇게 쉽게 찾기는 어려운 곳이지, 하지만 글쎄 그 남쪽 동네가 얼마나 따뜻한지 네가 어떻게 알기나 할는지”

3. 남도사람 연작 - <눈길,1977> 이후 10년이 지나서 <남도사람,1988> 연작이 나왔고, <서편제>로 개제되었다. 원래 <남도사람> 연작은 ‘1)서편제, 2)소리의 빛, 3)선학동 나그네, 4)새와 나무, 5)다시 태어나는 말’로 구성되었는데, 여기에 따로 발표된 ‘눈길, 살아있는 늪, 해변아리랑’이 보태지면서 <서편제>로 바뀐 것. 덧붙이면, <눈길> 역시 ‘홈(home)’과 ‘하우스(house)’의 차이를 행간에서 말하고 있다. <남도사람> 연작은 ‘보성, 장흥, 강진, 해남’을 오가는 남도길 여정 속에 ‘소리, 소리꾼’의 세계를 그려낸 것, ‘서편제/소리의 빛/선학동 나그네’ 등은 서로 서사적 친연성이 유지된 반면에, ‘새와 나무’는 그 소리 세계를 일부 언급하였어도, 나아가 사람들의 존재 양식을 설파한 점에 있어서 <남도사람> 연작의 결론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4. <잔인한 도시>와 <새와 나무> - 필자는 ‘잔인한 도시’의 후일담으로 ‘새와 나무’를 연결해본다. 앞서 소개한 ‘잔인한 도시’의 말미에 등장하는, 남쪽으로 떠나간 사내가 다시 ‘새와 나무’에 남녘 길손(客)으로 나타난다. ‘잔인한 도시’에 나온 ‘빗새’가 곧 ‘새와 나무’의 ‘빗새’가 되는 것. ‘빗새’는 비가 와도 깃들 둥지가 없는 새를 말한다. 이청준 소설의 특징 하나는 ‘늘 고향집으로 회귀하려는 삶, 그러나 쉽게 정주하지는 못하는 삶’을 묘파하는 부분이다. 유랑과 귀환이 대비된다.(그 사내를 맞아준 집 주인의 형 역시 가족을 등지고, 줄 끊어진 한 점 연이 되어 도시로 갔다가 종국에는 나무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역시 정착하지 못하였다.) 다시 궁금해진다. <잔인한 도시> 이후 40년이 더 지나갔는데, 그 옛날 가족과 정분이 있고, 나무가 있던 남쪽 고향 마을은 지금도 여전할까? 그 ‘잔인한 도시’의 공원 숲에만 새둥지를 틀 나무가 없었을까?

5. <새와 나무> - <남도사람> 연작의 ‘새와 나무’ 주제에 대해 작가 자신이 남긴, <후기>를 소개함이 더 나을 것 같다. “소설이란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대해 말로 꾸어지는 일종의 꿈이랄 수도 있으리라. 그래 나는 때로 그 존재적 언어와 관계적 언어 질서를 조화롭게 통합하는 총체적 언어(삶) 질서의 꾸어보곤 한다. 그것은 ‘나무와 새’에 관한 꿈이다. 나무의 삶은 대체적으로 자족적이다. 그것은 혼자 수분을 빨아들이고 햇빛을 취하여 줄기를 키우고 잎을 펼치며 열매를 맺는다. 그것은 결코 이웃을 얻어 함께 하기 위하여 스스로 새를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나무가 잎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이웃의 삶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기도 한 것. 나무의 잎들이 무성해지면 새들은 스스로 나무를 찾는다. 하여 나무가 크고 잎이 무성해질수록 나무의 사랑은 그만큼 클 것이고, 새들도 그만큼 많이 찾아와 새들의 노랫소리가 더욱 화창해질 것. (중략) 이 책에 묶인 <남도사람> 연작은 이를테면 그런 ‘나무의 삶(그쪽을 우선해서 본)’을 그린 셈이다.” 아마 이청준 선생의 고향지도에는 빛과 소리가 가득 피어난 ‘남도나무’의 그늘 아래 ‘남도사람, 남도 땅’이 함께 그려졌을 것.

6. 이청준과 동백나무와 새 - 얼마 전 <장흥신문>에 ‘이청준의 동백나무’가 보도되었다. 선생은 ‘나무’ 중에 특히 ‘동백나무’를 지목하여, “아이의 어미가 그토록 그 텃밭의 동백에 마음이 쏠리는 것은 그 나무에 오는 봄과 꽃을 보기 위해서만 아님은 물론이었다. 그 동백을 고른 것도 ‘빗새’가 의지 삼기 좋은 그 무성하고 넓은 나뭇잎과 가지들을 염두에 두었음이 분명하였다”라 말했다.

빨간 동백꽃이 아닌, 늘 푸른 ‘동백나무’를 거명하셨는데, 서울 ‘잔인한 도시’에서 헤매는 ‘빗새들’을 나름 챙기시며, 남쪽 천지를 오가며 고향사람과 고향땅을 살려낸 이청준 선생님 당신을 곧 불사(不死)의 ‘동백나무’로 추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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