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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면 용곡리 두룡마을 용암정(龍菴亭)문화탐방/栢江 위성록 이야기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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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8.07  10:3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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栢江 위성록/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위원

장흥군 장동면 용곡리 두룡마을은 제암산(807m) 아래 위치한다. 1519년(己卯) 평산 신국민이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되면서 두룡촌(斗龍村)이라 하였다. 1970년경에는 30호 이상 거주하면서 인천이씨가 세거한 한적한 농촌마을 이다. 제암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를 용류천(龍流川)이라고 한다. 마을은 천을 따라 조성되어 있으며, 상류 지점인 장동면 두용산길 178에 용암정(龍菴亭)이 위치한다.

   
 

이 정자는 마을에 살았던 용암(龍菴) 이평호(인천인 34세, 1880~1955)는 평생을 어질고 의롭게 살아오면서 용류천의 맑음을 무척이나 좋아하였다. 셋째 아들 소암(小菴) 이남기(1907~1990, 제19대 장흥향교 전교) 선생은 선친을 뜻을 이어받아 1969년(己酉) 용류천이 내려다보이는 언덕바지에 석축하여 정자와 제실 공간의 3칸 건물을 짓고 선대를 추모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후손들은 매년 4월 둘째주 토요일 이규화(29세 1727~1762) 등 이하의 후손 8위 제향을 모신다.
정자 앞 천에는 수로 암벽에서 떨어지는 10m가량의 쌍폭포와 아래 용문소(龍門沼)가 있다.

   
 

풍수설에 따르면 이곳의 뒷산은 용머리(頭) 형국(形局)이며, 소(沼)는 용의 입(口)에 해당된다.

   
 

소의 깊이는 “명주실꾸러미 하나가 다 들어갔고” 소에는 굴이 있어 “여기서 굴을 끼어 가면 장흥읍 백세 뒷등으로 나온다.” “마을 부녀자들이 용문소 태몽을 꾸게 되면 큰 사람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다. 현재 마을은 13호 주민이 거주하면서 오염되지 않는 산과 물이 있어 장수촌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정자 마루에는 7점의 편액이 소장되어 있다.

   
 

① 용암정(龍菴亭) 액호 편액은 송담(松潭) 이백순(1930~2012) 선생이 썼다.

   
 

② 용암정운(龍菴亭韻)은 1969년(己酉) 4월(淸和節) 불초자 이남기 근고(謹稿)하다.
선인이 남달리 좋아했던 이 맑은 못
그때 여기에 상량하여 추모 하였네
아주 외진 곳이기에 세상 소식 끊어지고
객조차 오지 않아 문밖엔 풀만 우거졌네
주림을 걷으니 산책은 푸른데
베개 베고 누워보니 티 없는 물소리뿐
영영(英靈)이 내려오셔 계신 듯하니
홀로 앉아 있을 적엔 이 정 이길 수 없네

   
 

③ 근차용암정운(謹次龍菴亭韻)은 1969년(己酉) 4월(槐夏) 금강(金崗) 백영윤(1884~?)이 썼다.
용암이 세운 작은 누정 청정하여라
편액 보니 이 누정 잘 계승 되었네
잘 자란 곡식 보며 완전한 알곡 바라듯이
좋은 인재는 틀림없이 굳은 뿌리 내린다네
벗들은 밤마다 찾아와 노래하며 흥을 돋고
아이들은 일년 내내 소리 내어 글을 읽네
언제나 유유자격 편안한 삶 누렸으니
화려한 권세 이익 아무 뜻도 없었다네

   
 

④ 근차용암정운(謹次龍菴亭韻)은 1972년(壬子) 9월(菊秋) 초은(草隱) 김익식(영광인 1890~?)이 지었다.
산은 절로 우뚝하고 물은 절로 맑아라
백년 만에 도모하여 정자 하나 세웠네
부지런한 본성으로 선대 유업 이어지니
후손들도 힘써 밭을 갈고 글을 읽네
날 저물면 주렴 걷어 달빛을 맞이하고
봄에는 말술 놓고 꾀꼬리 소리 듣는다네
작은 누정 아닌데 오히려 작다하며
검양 알고 스스로 마음 다스렸네

   
 

⑤ 경차용암정원운(敬次龍菴亭原韻)은 1974년(甲寅) 8월(中秋) 인재(忍齋) 김창혼이 썼다.
누정은 작다지만 신령스런 기운이네
그 가운데 이 어르신 누정을 지으셨네
여러 자제 가르쳐 훌륭하게 키웠으니
평생 업적 길이 남아 오래도록 전해지네
벗들도 청해서 세상 물정 나누면서
화목한 집안으로 명성까지 얻었다네
오동나무 아래 용담은 쉬지 않고 흘러가니
오랜 세월 맑은 마음 이야기로 남겠지

   
 

⑥ 용암정기(龍菴亭記)는 1979년(己未) 1월 성주인 이백순(1930~2012) 기록하다.
어떤 산이 보성(寶城)과 장흥(長興) 사이를 진호하고 있다. 두 고을을 흐르는 강의 근원이 나오는 이 산은 제암산(帝岩山)이다. 제암산의 한 줄기가 서북방향으로 수리를 뻗어 내려오다 굴곡져서 둘러 안고 있는데 지세의 변화가 끝나는 곳에 마을이 잇다. 두룡(斗龍) 마을이다.
두룡마을 곁에 위 아래로 두 소(沼)가 있다. 용추(龍湫 용문소)이다. 위에 있는 것은 절벽이 깎인 듯 물속에 거꾸로 비추고, 아래에 있는 것은 잡목을 껴안은 듯 푸르다. 두 웅덩이에 임하여 정자가 있다. 용암정(龍菴亭)이다.
용암은 돌아가신 인천 이평호(李平浩) 공의 별자(別字)이다. 용암은 인(仁)을 이루고 의(義)를를 펼치며 수 십년 살아오다 향소(鄕所)에서 추천을 받았다. 용암이 세상을 뜨자 그의 셋째 아들 남기(南基)가 아버지의 발길이 미쳤던 곳에 나아가 방 세 칸짜리의 집을 건립할 것을 구상하였다. 이어 큰 형님이 이미 저 세상으로 가니 형님의 아들 강흠(康欽)이 숙부를 도와 이를 완성하였다. 정자가 이미 완성됨에 강흠은 숙부의 뜻으로 삼사(三舍 90리)를 산 넘고 물 건너서 시천(보성군 복내면 시천)의 내 집을 찾아왔다. 와서는 서액(書額)으로 그 실상에 대한 기문(記文)을 요청했다. 나는 글 솜씨가 졸렬하고 비루하다 하고 두서너 차례나 사양하였지만 끝내는 어쩔 수 없었다.

두룡마을은 인천이씨의 세거지로 양궁과 양치의 아들이 했던 것처럼 선대의 유업이 대대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소암(小菴) 남기도 또한 돈독한 효성으로 이미 유업을 계승하려 마음먹고 아버지가 평소에 휘파람 불며 노닐던 언덕의 공의 호를 문미에 쓰고 흠모하니 용암이 집을 다스리는 점을 또한 알 수가 있었다.
소암은 사는 집과 정자 사이가 불과 일궁(一弓 가까운 거리)도 되지 않아서 아침저녁으로 여기에 나아가 세속의 걱정을 떨쳐내며 독서도 하고 천고의 위를 거슬러 성현들의 유훈을 탐구하였다. 또 방안에서 조용히 관조(觀照)하면서 철따라 새롭게 변한 당시의 물상을 완상(玩賞)하였다. 혹은 형제들과 숙질을 불러서 천륜의 정을 펼치고, 혹은 벗들과 빈객을 맞이하여 한가로이 즐거운 날을 보내기도 하였다. 고요히 있기도 하고 즐겁게 떠들기도 하니 날이 부족할 줄 몰랐다. 소암은 만년에 자신의 계획을 이루었다고 말할 만하다.
아! 자손 된 자에게 모두 소암의 마음을 자신들의 마음으로 삼게 한다면 가업이 계승하지 않을까 어찌 걱정하겠으며, 이 정자를 이어 보수하지 않을까 어찌 근심하겠는가? 만약, 산수의 안개와 구름이 완상할 만하다면 이 정자에 올라보라. 마땅히 저절로 얻어지리라. 여기에서 이만 줄인다.

   
 

⑦ 용암유장(龍菴遺庄)은 1986년(丙寅) 5월 초 단오(天中節) 해산(海山) 정영주가 썼다.

또 다른 용문소의 흔적으로는 1791년(辛亥) 3월 존재(存齋) 위백규(1727~1798) 선생은 사자산에 올라 유람하고 돌아오는 길에 용추(용문소)를 찾아 비경을 보고 느낌 “哀龍湫文”을 지어 존재집에 담아져 있다.

◆ 哀龍湫文(용추를 애도하는 글) 번역문 ◆
내가 천관산에 산 지 올해로 65년이고, 용계(龍溪) 1)거개소(居開所)와의 거리가 60리 정도로 가까운데도 용추(龍湫)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신해년(1791, 정조15) 음력 3월에 여러 벗이 서로 권유하여 사자산(獅子山)에 올라 의상암(義尙庵), 제암(帝巖), 병풍암(屛風巖)을 보고 돌아오는데 만족스럽고 흐뭇하였다. 세상에 묘향산과 봉래산은 제쳐 놓고 또 이에 해당할 만한 산이 있는지 모르겠다. 다음 날 호탕하게 돌아오다가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부질없이 사자산을 자주 돌아보았다.
벗 이(李)가 멀리 들판의 언덕을 가리키며 “저곳에 용추가 있는데 가서 보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한번 가 보니 경치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함께 따라온 가까운 사람들과 늙은이, 젊은이 십여 명이 용추 주변에 빙 둘러 앉아 용추의 경치를 이야기하였는데, 모두 눈앞에 펼쳐진 모습이 말이 필요 없음을 알면서도 오히려 감탄의 말을 그치지 못하였다.
나는 매우 의아스러웠다. 만일 2)사마덕조(司馬德操)가 와룡(臥龍 제갈량(諸葛亮))을 성심으로 지목해서 천거했다면 유 예주(劉豫州 유비(劉備))는 하루가 가기를 기다리지 않고 이미 진즉에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용추는 내가 백발이 성성하도록 듣지 못했으니, 감탄하는 자들이 진심으로 깊이 알고 한 것이 아니라, 다만 눈에 보이는 것만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 사람이 생겨난 이후로 4만 5000년 동안 한 사람도 용추를 아는 자가 없었다는 사실이 이상하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낚시터나 정자터가 없고 다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농부가 소를 몰고 물가를 지나는 모습과 시골 사람이 땅을 개간하여 물굽이에 밭을 만들어 놓은 광경뿐이니, 아, 용추가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이 이처럼 심하단 말인가. 지금 비로소 나를 만났지만 나는 단지 바닷가 보잘것없는 사람일 뿐이니, 마음으로 사랑할지라도 어찌 너로 하여금 인간 세상에 알려지게 할 수 있겠는가. 아, 용추가 나를 만났지만 불우(不遇)함이 더욱 심하도다.
못의 용이 큰 가뭄에 만물이 타들어 갈 때를 만나면 어찌 성상(聖上)이 만민을 구휼하도록 구름과 비를 불러서 물을 대 주지 않겠는가. 신(神)의 공덕을 수렴하여 도로 옛 못에 잠수하면 저 농부와 들 아낙네가 이 비가 이 못에서 시작되었음을 어찌 알겠는가. 이 때문에 기우제를 지내는 사람이 또한 오지 않으리니, 아, 이 못의 용이 장차 용궁의 그윽한 구덩이에 엎드려 있으면서 천지와 더불어 무궁할 뿐이란 말인가. 아, 너 용의 삶이 어찌 다만 이와 같단 말인가.
내가 만약 힘이 있어서 이 곁에 몇 칸의 초가집을 얽는다면, 용 역시 지기(知己)를 만날 것이니 또한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죽 그릇, 소금 쟁반에 처자식이 울고 있는 가난한 처지이니 어찌하겠는가. 아, 용추가 불우함에서 끝마칠 뿐이란 말인가.
하늘이 신령스러운 구역을 만들어 놓고 끝내 숨겨 둘 까닭이 없을 것이니, 잘 알고 있는 자가 와서 주인이 될지 어찌 알겠는가. 그러면 거개소의 용추가 지역 내에서 이름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오늘날 용추를 슬퍼하는 것이 도리어 훗날 용추에게 좋은 일이 될지 어찌 알겠는가. 용추와 같은 뛰어난 풍경을 아는 자는 저절로 알 것이고, 모르는 자는 비록 알려주어도 모를 것이니, 여기서 일일이 말하지 않겠다.

1)거개소(居開所)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7〈전라도(全羅道)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의 고적(古蹟) 조에 나온다. ‘사구세’ ‘사구시’ ‘사개소’ ‘사구실’ 등으로 불렸다. 지금의 장흥군 용곡리 거개마을이다.

2)사마덕조(司馬德操)가….것이다 : 사마덕조는 사마휘(司馬徽)로 당시 사람들에게 수경 선생이라 불리던 은사(隱士)이다. 유비가 형주(荊州)에 있을 때 사마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 일이 있었다. 그날 밤, 사마휘가 유비에게 천하를 경영하고 세상을 다스릴 모사(謀士)로 제갈량(諸葛亮)과 방통(龐統)을 추천하였는데, 유비가 그들이 누구인지 더 물었을 때 말을 흐린 채 더 이상 대답하지 않은 일을 말한다. 그때 사마휘가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해 성심으로 말해 주었다면 유비가 그날 밤에 곧바로 삼고초려를 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三國志 蜀志 諸葛亮傳》
/출처 : 존재집 제1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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